리비아 왕국

 


'''리비아 왕국
المملكة الليبي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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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1951~1969'''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면적'''
1,759,541km²
'''인구'''
약 109만명[1]
'''수도'''
트리폴리, 벵가지, 알바이다
'''공용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수니파)
'''통화'''
파운드
'''정치 체제'''
연방국가, 입헌군주제, [2]
'''국왕'''
이드리스 1세
'''시간대'''
EET (UTC+2)
'''국가'''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성립 이전'''
키레나이카 토후국, 프랑스페잔-가다메스
'''멸망 이후'''
리비아 아랍 공화국
1. 개요
2. 상징
3. 자연
4. 역사
5. 경제
6. 정치
6.1. 이드리스 1세
7. 사회
8. 여담


1. 개요


'''리비아 왕국'''은 리비아이탈리아 철수 후 세워진 왕국이다. 존속 기간은 1951년부터 1969년까지 18년이다.

2. 상징




3. 자연




4. 역사




5. 경제


독립 후 3년 동안은 최빈국 수준이었으나 1955년 대량의 석유가 발견되면서 나라 전체의 GDP가 상승했다. 그러나 그 후 부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부패한 일부 세력과 석유 채굴권이 있는 미국에게만 돌아가 국민의 생활 여건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이 결과는 많은 아랍 사회주의자를 만들었으며 리비아를 아랍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게 되었다.

6. 정치


독립 후 이드리스 1세의 집권이 이어지다가 1954년 트리폴리타니아의 국민의회당과 그 밖 지역의 독립당의 갈등이 있었다. 국민의회당은 단일국가비례대표제를 원했고 그 결과 왕에 의해 당수는 추방되고 국민의회당은 강제해산된다.

6.1. 이드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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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ris I'''
1889~1983
키레나이카 토후국과 리비아 왕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왕, 세누시 왕조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맞서기 위해 연합군을 지원했으며 영국미국에게 경제 원조를 받는 대신 군사 기지가 설치되었다.
키레나이카트리폴리타니아의 내각 의원을 불공정하게 뽑으면서, 지나치게 고향 키레나이카에 우호적으로 추진해 지역 감정 격화와 쿠데타로 인한 실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일당제 및 연합 폐지로 전환하면서, 관료들은 전부 키레나이카 출신 꼭두각시들로만 임명하여 1인 독재를 했다. 뇌물도 흔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1969년 터키 순방을 틈타 리비아는 완전히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후 이드리스 1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5번이나 결혼해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얻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로 죽었기에 자손은 없다. 이집트에서 살 때, 알제리인인 고아 소녀를 양녀로 받아들여 그가 죽을 때, 이 양녀가 곁을 지켰다.
아들로는 하산 앗세누시 왕세자가, 조카로는 무하마드 알 세누시가 있다.

7. 사회


사실 카다피 정권 이전까지만 해도 이탈리아가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라 부족 및 촌락 갈등은 매일같이 일어났고 독립 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도시의 치안만 다른 의미로 안좋아질 뿐이었다. 게다가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이탈리아 식민지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고 촌락의 추장과 주민들에게는 국가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건국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이루어내고 독립 후에도 지방 자치단체의 무관심 속에서 사실상 일부 권력 집중 세력들만의 왕국이 되었다.

8. 여담


지금까지 이 나라가 존재했더라면 내전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일부 의견이 있지만 사실 왕의 후계자 문제, 빈곤과 기아, 부의 분배 등의 이유로 왕국 내 내분이 일어날 까닭은 충분하다.
[1] 1954년 기준.[2] 과거에는 의원 내각제였으나 총리의 부패로 인해 결국 단일 왕정 체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