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엄 브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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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피(Chippy)'''[3]
아일랜드의 전 축구선수.
리암 브래디는 아스날 FC 역대 공식 베스트 11에 들어갈 정도로, 절대 잊혀지는 선수가 아니다. 당장에, 아스날의 10번 계보의 시발점이 되는 선수가 바로 이 선수, 리암 브래디이다. 소위 아스날 역대 베스트 11을 보면, 철의 포백 & 벵거의 아이들의 선수가 대부분 주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그러한 베스트 11에서 유일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리암 브래디이다. 리그 우승은 고사하고, FA컵 우승이 한 차례만 있음에도 그가 베스트 11에 들어갔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이고 팬들이 그를 알고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2. 커리어
2.1.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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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더블린에서 태어난 이후 학창시절부터 축구를 즐기기 시작하여 9살 때부터 세인트 피터 보이스 팀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1970년에 학생 신분으로 아스날 유소년 팀에 입단하여 17살 때인 1973년에 버티 미 감독에 의해 1군으로 편입되어 그해 10월 6일 버밍엄 시티 전에서 데뷔했다.
경기 당일 스쿼드에는 12명밖에 없었고, 그 탓에 브래디만이 유일한 서브였다. 경기가 시작하고 10분이 지난 시점에 팀의 센터백이었던 제프 블락키가 부상을 당하자 그가 투입되면서 꽤 선전했고, 트레버 프랜시스 등의 선수들을 따돌리며 그날 1대 0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다음에 열린 토트넘 핫스퍼와의 북런던 더비에서는 미숙한 경기력을 선보여서 2-0으로 패배했다. 첫 시즌에서 브래디는 6경기를 뛰었다고 한다.
이후 브래디는 1974/75 시즌부터 주전으로 확고히 자리잡아 기복 없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창조적인 플레이의 축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어시스트와 골을 선사했다. 그 중에 가장 인상깊은 경기가 1978년 12월 23일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북런던 더비였는데, 그는 필드 중앙에서 피터 테일러에게서 공을 빼앗아 좌측으로 치고 들어가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주무기인 왼발로 대포알 같은 슛을 골문 오른쪽 상단에 꽂아 넣었다.
이중 브래디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은 대 사건이 바로 197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결승전. 그는 결승전에서 뒤늦게 터진 앨런 선더랜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과 1980년에도 FA컵 결승전에 출전하기도 했으나 둘 다 졌고, 1979년 FA컵 우승 자격으로 출전한 1979/80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승부차기 도중 페널티킥을 실축하여 발렌시아 CF가 우승하는 빌미를 마련하기도 했다.
어쨌든 브래디는 그간의 활약으로 올해의 아스날 선수로 세 번 선정되었고, 1979년에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선수협회에서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그가 1970년대 후반에 보여준 노련하고 정확한 패스는 맬컴 맥도널드와 프랭크 스테이플턴에게 도움을 주었고, 나중에 중앙 미드필더로 뛸 폴 데이비스와 마이클 토마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감독인 테리 닐과 리엄 브래디는 가치관 차이로[4] 사이가 좋질 않았고, 그는 출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1979/80 시즌이 시작할 즈음부터 유벤투스로 가려고 했지만 팬들에게 모습만은 남겨야 된다고 생각했고, 이에 따른 압박을 받아 시즌의 반을 날려먹었지만 남은 시즌은 성실히 수행했다. 이후 그는 아스날과 7년간의 인연을 마무리한다.
2.2. 세리에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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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아스날 FC를 떠난 이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명문팀 유벤투스 FC로 이적한 뒤 1981년과 1982년에 두 번 세리에 A에서 우승하여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활약했으며 AS 로마의 호베르투 팔캉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후 1987년까지 UC 삼프도리아, 인터밀란, 아스콜리 등을 거치며 그럭저럭 선수생활을 보냈다.
2.3.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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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커리어를 보낸 그는 자신의 아이를 잉글랜드에서 키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1987년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잉글랜드 땅을 다시 밟아 그는 웨스트햄에서 활동하는 동안 119경기 동안 10골을 넣어서 그럭저럭 활약했다고 한다. 1988/89 시즌에 웨스트햄이 강등당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뛰다가 1990년 5월 5일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경기를 끝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2.4. 국가대표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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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유로 1976 예선전을 시작으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까지 국가대표팀에서 숱한 경력을 선보였지만 정작 본선 출전 기록은 없다.[5]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1991년부터 셀틱 FC와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감독을 거쳐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아스날 FC의 유소년 감독으로써 잭 윌셔, 키어런 깁스 등 후학들을 기르는 데 주력해왔고, 2008년부터 2년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조반니 트라파토니를 보좌하기도 했다.
2013년부터 아스날 유소년 아카데미 단장을 1년간 맡다가 현재는 아스날의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다.
[1] 공격형 미드필더[2] 現 아스콜리 피치오 FC 1898[3]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피시 앤드 칩스라 이런 별명이 붙었다.[4] 브래디는 챔피언을 노릴 만한 팀이 되어야 한다는 야망을 지녔지만, 테리 닐 감독은 그렇지 않았다.[5] 유로 1988에야 처음으로 아일랜드가 본선에 진출했지만 정작 브래디는 부상으로 못 나갔다.[6] 옆의 인물은 존 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