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런던 더비
1. 소개
북런던 더비는 잉글랜드 런던 북부의 축구팀들인 아스날 FC와 토트넘 홋스퍼 FC가 벌이는 더비 매치를 일컫는다. 양팀의 경기는 1909년 12월에 있었지만, 이때부터 양팀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더비 매치를 한 것은 아니며, 1913년 아스날이 토트넘 옆으로 이사오면서 지역 더비로서의 경기가 성사되었다. 단순한 지역 라이벌이었던 이 두 팀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잉글랜드의 1부 리그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승격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어 현재 프리미어 리그[2] 에서 노스웨스트 더비와 함께 손꼽히는 더비 매치가 되었다.
2. 더비 현장
3. 역사
양 팀 라이벌 관계는 처음부터 치열했던 것은 아니다. 1913년 북런던 토트넘 인근에 아스날이 이사를 오게 되면서 북런던 더비가 시작되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스날이 처음 이사왔을 때 토트넘의 근처였을지언정 당시 토트넘은 당시의 행정구역상 런던이 아니라 미들섹스 지역에 소속되어 있었다.
즉, 엄격히 말하자면 북런던에 먼저 도착한 것은 토트넘이 아니라 아스날이었다. 아스날이 1913년에 건설한 아스날 스타디움이 위치한 하이버리는 1900년에 "1899년 런던 정부법"에 따라 이미 런던에 편입된 상태였다. 이 1900년 시행된 법에서 첼시, 풀럼 등 지역이 런던에 편입되었지만 토트넘이 있었던 토트넘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토트넘이 런던으로 편입된 것은 1965년에 "1963년 런던 정부법"에 따라 런던이 그레이터 런던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이후부터 토트넘 등 몇 개 지역이 해링게이 구로 합쳐지면서부터다.
3.1. 연고지 이전
1910년, 풀럼의 회장이었던 헨리 노리스는 재정위기를 겪으며 파산직전에 있던 '울위치 아스널'(Woolwich Arsenal)을 인수했다. 풀럼의 헨리 노리스가 아스널을 인수한 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는데, 풀럼과 아스널 두 클럽을 합병하여 하나의 축구클럽을 만들어서 런던을 대표하는 최고의 팀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 연고팀 중 역사가 깊은 두 클럽인 아스널과 풀럼의 합병이라는 노리스의 황당한 목표는 풋볼리그와 축구협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리고 헨리 노리스는 잉글랜드 축구계에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
'''1913년, 헨리 노리스에 의한 아스널의 북런던 이전'''
아스날은 재정난을 악화시키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이 연고로 했던 지역인 울위치 지역이 지리적인(또는 교통적인), 그리고 낮은 인구에서 비롯된 문제로 경기장에 입장하는 관중의 수가 너무 적었던 것이다. 현대와는 달리 쉽게 멀리 이동할 수 없는, 입장권 수입이 팀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20세기 초반에 있어 그런 문제는 결국 아스널의 재정파탄 위기에 직면했다.
1913년, 2부리그로 강등된뒤 아스날은 토트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홈구장을 버리고 연고지 이전을 강행했다. 아스날은 '''연고지를 남부 울위치의 매너 그라운드에서 북런던의 하이버리로''' 옮겼다. 이사한 아스날 홈 스타디움은 당시 미들섹스[4] 에 위치한 토트넘의 화이트 레인에서 불과 4마일(약 6.4km) 정도 떨어진 장소.
그리고 그들은 이듬해 구단 이름에서 울위치를 빼고 현재의 아스날 FC로 바꾼다.
3.2. 승격 스캔들
'''2부 리그 5위였던 아스날이 1부 리그로 승격, 1부 리그 20위였던 토트넘의 강등 사건'''
토트넘과 아스널의 맹렬한 라이벌관계는 아스널이 북런던으로 이주한 것에서 촉발되어 1919년, 헨리 노리스에 의해 토트넘이 강등 당하는 대신 아스널이 승격하는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아스널의 헨리 노리스 구단주는 아스널을 1부리그로 승격시켰고, 1부리그로 승격한 아스널 대신 2부리그로 강등당한 것이 다름 아닌 지역 라이벌 토트넘이었다.
1914/15 시즌, 1부 리그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두 팀은 첼시(19위)와 토트넘(20위)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도중에 중단되었던 리그가 재개되면서, 리그측에서 참가팀을 20팀에서 22개팀으로 늘리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이 알려지면서 투표를 통해서 참가팀을 확정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신문을 통해 알려짐에 따라 [5] 각 팀들은 각자 자신의 팀이 승격되어야 하는 이유를 로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중에는 토트넘도 있었다. 아스날은 같은 시즌 2부 리그 5위를 기록해, 2부 리그 1, 2위가 아니므로 정상적으로는 승격이 어려운 상황. 이에 헨리 노리스 구단주는 아스널의 승격을 이끌기 위해 활발하게 로비를 해서 아스날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이성모 기자의 칼럼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리고 1919년, 19위였던 첼시 FC는 잔류, 2부리그 1, 2위 팀은 승격, 남은 한 자리는 1부리그 꼴찌팀인 토트넘과 2부리그 3-7위였던 반즐리 FC, 울버햄튼 원더러스, 아스날, 버밍엄 시티 그리고 헐 시티가 입후보해 투표로 결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결국 아스날이 이 투표에서 승리해 아스날이 1부리그로 승격되었다. 이후 아스날은 2021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2부리그로 강등되지 않는 1부 리그 최장 기간 생존 기록을 세우게 되었고, 아스날 대신 2부 리그에서 뛰게 된 토트넘은 아스날과 질기고 질긴 악연을 이어가게 된다.
1927년에 헨리 노리스는 팀 버스를 매각한 자금을 횡령하여 £125를 그의 주머니로 챙긴 죄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또, 그는 자신의 운전수 월급을 클럽의 비용에서 지급하였고, 선수 연봉지불에 대한 규정을 어긴 등으로 인해 (1925년에 선더랜드에서 뛰던 찰리 부칸이라는 선수에게 아스날로 오라고 하면서 허용되던 최대 연봉 이상의 금액을 제시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당시에 이러한 규정위반은 비일비재하였다) FA는 그를 축구계에서 영구 제명했다. 이러한 헨리 노리스의 행실로 비추어볼 때, 토트넘 팬들은 헨리 노리스가 선거에서 뇌물을 주는 등 부적절한 방법을 통해 부정선거를 저질렀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토트넘은 당시에 다른 팀들에게 인기가 크게 없었다는 증거 역시 존재한다. 당시 맨체스터 이브닝 크로니클 기사를 찾아보면, 실제로 토트넘이 그다지 타 구단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언급이 되어 있으며, 그 이유를 토트넘의 과거 행적에서 밝히고 있다. 1890년대 후반에 토트넘은 오늘날의 EPL의 전신이 되는 EFL(English Football League)의 일원이 아니라, Southern League라는 EFL과 경쟁하는 리그의 일원이었다. 두 리그는 서로 규칙 등도 완전히 달랐고, 별개의 리그에 있는 두 팀 사이에 이적이 이루어질 시에는 이적료조차 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에 따라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에, 그 당시 꽤나 부유했던 팀이었던 토트넘은 EFL에 있는 셰필드, 뉴턴 히스(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에버튼, 스토크 시티, 프레스턴 등 여러 구단들에게서 도합 적어도 14명의 선수를 영입하였던 기록이 있었다. 이렇게 선수를 보상료조차 받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일은 EFL 소속 구단들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고, 실제로 이에 따라 1900년에 FA에서는 리그 사이에서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고 선수를 빼올 수 없게 하기 위해 두 리그 모두에 대해 주급의 상한선을 도입하였다. 리그 간 이적료의 도입은 1910년 5월이나 돼서야 Southern League와 EFL간의 합의를 통해 도입되었다. 요약하자면 애초에 토트넘은 EFL 소속 구단들에게 있어 별로 인기가 없었고, 이를 잘 활용해 아스날이 토트넘을 떨어뜨렸을 개연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스날 팬들은 매 시즌마다 St. Totteringham's day라는 이름으로 아스날이 토트넘보다 리그 순위가 더 높은 것이 확정된 날을 기릴 정도로 토트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 성적도 아스날만 못하고, 하술한 에피소드들처럼 당한 것도 많은 토트넘 팬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수준.
2016년 21년만에 토트넘이 아스널을 앞서는 시즌이 나올 뻔했으나... 막판에 토트넘이 자멸하면서 이번에도 St. Totteringham's day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2016/17 시즌에 드디어 토트넘이, 그것도 안방에서 열린 북런던 더비에서 2-0으로 승리하면서 1994-95 시즌 이후 처음으로 아스날보다 윗 순위의 시즌을 확정짓고 22년만에 St. Totteringham's day가 열리지 않았다.
3.3. 선수 이적
2001년 여름에 이 더비의 열기에 기름을 붓는 일이 발생하는데 바로 '''토트넘의 주장'''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 솔 캠벨이 아스날로 '''자유계약 이적'''을 한 것이다.
당시 캠벨은 계약 만료가 코앞인 상황에서 재계약을 미루고 있어서 토트넘 팬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팀의 리더이자 핵심 선수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선수를 돈 한푼 못 받고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더욱 더 그랬다. 캠벨은 토트넘의 로컬보이로서 토트넘에는 큰 애정을 품고 있었지만, 팀이 우승권에 들지 못하자 한계를 느끼고 잉글랜드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라는 위상에 걸맞게 우승을 할 수 있는 팀으로 이적을 할 수도 있다며 조금씩 간을 보기 시작한다.
그가 빅클럽으로 이적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려면 토트넘 측에서 솔 캠벨의 주급을 대폭 인상한 계약 조건을 내미는 수 밖에 없었는데 토트넘도 팀의 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재계약이 계속해서 결렬되면서 일단 솔 캠벨은 거의 토트넘을 떠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캠벨은 "재계약을 할 수도 있고 이적할 수도 있는데, 이탈리아에서 연락이 오고 있어서 고려 중임.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팀은 맨유나 리버풀 쪽으로 생각하고 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스날은 안 감."''' 이런 식으로 발표하여 팬들은 최악의 경우는 없을거라며 안도하고 있었고, 서포터 그룹쪽에서도 '''"캠벨에게 그동안 활약에 대해서 감사하며 앞으로 다른 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길 빈다."'''라는 성명까지 발표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었다.
하지만, 바로 얼마후 솔 캠벨은 '''토트넘 팬들의 뒷통수를 치면서 아스날과 계약을 해버린다.''' 토트넘 팬들은 유스 때부터 토트넘 맨이자 주장이었고 토트넘 수비의 핵심이었던 솔 캠벨의 이적을 눈뜨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웬수와도 같은 라이벌 구단으로.''' 일부 과격한 팬들은 솔 캠벨에게 살해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솔 캠벨의 배신은 루이스 피구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과 더불어 축구판에서 가장 충격적인 선수 이적 사례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제적인 파장은 1년전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에서 FC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던 루이스 피구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에 비하면 덜한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피구가 선수로서의 급[6] 이 더 높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고 엄밀히 따지면 솔 캠벨의 이적이 한 술 더 뜨는 사건이다. 적어도, 피구는 바이아웃으로 이적했기 때문에 돈은 많이 안겨주고 갔기 때문이다.[7] 하지만, 캠벨은 자유계약이었기 때문에 토트넘은 단 한 푼도 얻지 못했다. 게다가, 루이스 피구는 바르셀로나의 부주장이고 팬들에게 인기가 많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포르투갈 출신이라서 외국인 선수였다. 반면에, 솔 캠벨은 토트넘이 발굴한 로컬 보이 유스 출신에다 주장으로 핵심 선수로 활약했었고 자국 잉글랜드 국가대표 주전 멤버로서 토트넘 팬들에게는 솔 캠벨의 빈 자리를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자부심을 심어줄만한 선수였기 때문에 더더욱 배신감은 더 컸을 것이다.
이적한 시즌에 아스날은 캠벨의 합류 덕분에 노쇠화된 수비[8] 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리그과 FA컵을 우승하면서 더블을 달성했고 아스날 팬들은 토트넘 팬을 조롱하는 응원가를 불렀다.
토트넘 서포터 그룹의 성명대로 솔 캠벨은 다른 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긴 한 셈이다. 더비 라이벌이니 문제였지만.우리는 솔 캠벨을 얻었다. 우리는 솔 캠벨을 얻었다. (화이트하트)레인에서 솔 캠벨을 뺏어왔다. 더블 (X3) 솔 캠벨은 더블을 했다. 레인에 있는 선수들중에 더블 해본놈 있냐? 하지만 솔 캠벨을 더블을 했다. 이봐 거기 토트넘 양반들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지. 니네 주장 어디갔냐. 쓰레기들아?
그리고 2003-04 시즌에도 북런던 더비에서 아스날은 '''토트넘 원정에서 2-2로 비기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바로 이 시즌이 그 유명한 '''아스날의 무패 우승 시즌'''이다. 당시에도 아스날 원정 팬들이 토트넘 팬들을 도발하는 문구를 걸었다.
결국, 솔 캠벨이 포츠머스 FC로 이적한 후에도 토트넘과의 경기가 있으면 당연히 토트넘 팬들은 신나게 온갖 쌍욕과 야유를 퍼부었다.왜 솔(캠벨)이 (화이트하트)레인을 떠났을까? 아스날 우승! 43년 동안 너네들은 뭐했냐? (또는 43년 째 너네들은 아직도 기다리고만 있지?)[9]
솔 캠벨의 이적 사건이 터지기 전만해도 인터넷에서는 조지 베스트의 북아일랜드 국가대표 동료로 유명했던 팻 제닝스의 이적으로 논란이 일었고 열기가 더 뜨거워졌다는 정보를 실었으나 이 사건 이후에는 거의 다 캠벨의 이적사건만 다룬다.[10]
솔 캠벨의 이적 사건 이후 9년 뒤, 2010년에는 반대로 아스날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윌리엄 갈라스가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다만, 아스날 팬들은 솔 캠벨 이적 당시의 토트넘 팬과는 다르게 잘 나갔다라는 반응이다. 애초에 첼시에 있다가 애슐리 콜이 아스날에서 불화를 일으키면서 첼시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트레이드 식으로 왔기에 본인이 아스날과 팬들에 대해 가지는 애정은 그다지 높지 않았고, 팬들 역시 그가 온다고 해서 딱히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데니스 베르캄프의 번호 10번을 과분하게 이어받은 주제에 주장이라면서 사미르 나스리와 불화를 일으키는[11] 등 팀 분위기를 개판으로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저 놈은 원래 그런 놈인줄 알았다. 아마 은퇴는 웨스트햄에서 하겠구만?"[12] 같은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에 엠마누엘 아데바요르 역시 아스날 - 맨체스터 시티 - 토트넘 순으로 이동했는데, 중간에 어디를 거쳤느냐를 떠나서 이 쪽은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역주행 세레모니 등으로 인해 아스날 팬들에게 '''갈라스보다 더 찍힌 존재'''라서 어딜가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데바요르는 토트넘 소속으로 아스날을 상대로 또 다시 화끈한 세리머니를 펼치면서 아스날 팬들의 증오를 재점화시켰다. 정작 아데바요르는 토트넘에서 주전에서 밀리고 떠난 이후 토트넘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바람에 토트넘 팬들마저 아데바요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020년 여름이적시장에는 U-23선수 조나단 딘제이가 토트넘에서 아스날로 이적하였다. 이적료가 발생하지 않은 자유이적.
3.4. 토트넘의 불운과 아스날의 조롱
그리고 지금도 아스날 팬들은 토트넘과 그의 팬들을 조롱하는 '라자냐 송'을 부르고 있다. 라자냐 송이란 2005-06 시즌에 아스날과 토트넘 사이에 있었던 또 다른 악연의 끈을 상기시키는 노래.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토트넘은 4위, 아스날은 5위였다. 토트넘의 상대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여기서 승리하면 (비록 예선을 치르긴해도) 토트넘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1995년 이후로 11년간 아스날보다 순위가 높아봤던 적이 없던 토트넘이라 그 기대는 더욱 컸다. 당연히 아스날 팬들은 아스날이 최종전에서 위건 애슬레틱을 이기고 토트넘이 져서 그 결과가 뒤집히기를 바랐다. 반대의 경우에는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이겨야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확보가 가능했다.
그런데 경기 전날 토트넘 선수들 대다수가 런던의 매리어트 호텔에서 라자냐를 먹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얼마 안 있어서 사이먼 데이비스, 티무 타이니오, 로비 킨, 마이클 도슨, 마이클 캐릭, 아론 레넌, 라덱 체르니, 데이븐포트, 바나드, 그리고 '''이영표''' 등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구토를 시작한 것이었다.
토트넘은 경기 취소를 원했고 웨스트햄도 동의했지만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서 퇴짜...[13] 결국 경기를 강행할 수 밖에 없었고 예상대로 토트넘은 요시 베나윤에게 결승골을 얻어맞아 지고 아스날은 티에리 앙리의 해트트릭으로 이겨서 순위가 뒤집히고 말았다. 아스날은 챔스 진출, 토트넘은 UEFA 컵... 그리고 토트넘을 아스날 못지 않게 싫어라 하던 웨스트햄[14] 은 토트넘 선수들과 관중들이 볼 수 있도록 아스날의 스코어를 전광판에 계속 중계했고, 이후 라자냐 송도 아스날 팬들과 함께 부르고 있다. 지못미...
4. 이영표의 증언
▲ 손흥민은 토트넘 구단 관계자에게 '빨간색 차를 구매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토트넘 선수로서 이 더비를 겪어본 이영표는 2015년 토트넘에 입단한 손흥민에게 주의하라며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해준 바 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토트넘 지역까지의 거리는 약 4km이다. 원정 경기를 마친 토트넘 선수들은 이 거리를 통과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경기가 끝나면 토트넘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3시간 가량 대기한다. 그 사이 경찰들이 밖에서 양 클럽의 팬들을 모두 해산시킨다. 팬들이 흩어지고 선수들이 버스에 오르면 경찰 차량 5~6대가 호위한다. '''모든 신호를 미리 조작해 버스가 대기 시간 없이 자동 통과하도록 조치한다'''. 이렇게 해도 위협은 가해지기 마련. 갑자기 매니저가 버스 안 선수들에게 말한다. "고개를 숙여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어."● "토트넘 크리스마스 파티에선 산타클로스 모자도 파란색. 클럽하우스에 절대로 빨간색 옷을 입고 가면 안 된다"[15]
● (더비가 현지 시각 정오에 열렸던 것에 대해) "밤에 열리면 경기 후 심한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이영표
당시 이영표는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곧 이유를 깨닫게 된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버스 유리창으로 맥주병과 돌이 날아든다. 온갖 물건들이 버스에 쳐박히고 유리창은 금이 가고 이영표는 기겁한다. 고갤 푹 숙여 매니저의 말대로 한다. 버스가 교차로를 지날 때 그 팬들이 튀어나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교차로를 지날 때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영표는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토트넘까지 4km 중 2km는 아스널 지역, 2km는 토트넘 지역이다. 매니저가 '이제 괜찮아. 고개를 들어'라고 하면 아스널 지역을 통과해 토트넘 지역으로 접어든 거다,"고 멋쩍은 웃음을 보인다.
겨우 토트넘 구역으로 들어오니 이런 공격이 뚝 줄었는데 나중에 이영표는 같은 팀에서 뛰었던 로비 킨에게 "아니 자기네(아스널) 팀이 이겼잖아? 그랬는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너무한 거 아냐?" 그러자 킨은 "쟤들에겐 말이지,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토트넘 자체가 증오스럽다 이거지." "우리 팬들은 어떨 것 같아. 쟤네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아?" #
2008년 1월 23일, 칼링컵에서 토트넘이 5-1로 아스날을 개박살내자 '''5-1''', '''5-1 승리!'''라고 써있는 토트넘 기념 유니폼과 굿즈가 불티나게 팔린다. 이후 토트넘 서포터들은 아스날 차량이 지나가면 물건들을 던지고 이 굿즈들을 흔들며 5-1!, 5-1! 이라고 크게 외쳤다고 한다.
5. 전적
2020-21 시즌 전반기 기준 아스날 77승, 51무, 토트넘 60승. 아스날이 우세하다.
아스날은 1994-95시즌부터 2015-16시즌까지 리그 순위에서 앞섰다.
1999년 11월 7일 1-2 패배 이후 2010년 4월 14일 1-2 패배 전까지 리그에선 지지 않았다.[16]
2015-16시즌, 토트넘이 리그 37라운드까지 2위를 사수하여 21년만에 아스날 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최종전에서 강등이 확정된 뉴캐슬에게 1-5 대패를 당하며 순위가 뒤바뀌었다.
하지만 2016-17시즌, 토트넘이 리그 탑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이며 아스날을 압도한다. 그리고 2017년 4월 30일 펼쳐진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의 마지막 더비에서 2:0으로 승리하며 24년 만에 2골 차 이상 승, 22년 만에 리그 순위에서 앞서게 된다.
2017-18시즌, 에미레이츠에서는 2:0 아스날 승, 웸블리에서는 1:0 토트넘 승. 리그 순위는 토트넘 3위, 아스날 6위.
2018-19시즌, 아스날이 새로 부임한 에메리의 첫 더비에서 4대2로 이겼으나, 보름 뒤 열린 리그컵 8강에서는 토트넘이 2:0으로 이기며 복수에 성공한다. 이 경기에서 손흥민이 결승골을 넣었다. 시즌 세 번째 더비에서는 경기 막판 요리스와 베르통언의 결정적인 오바메양 페널티 세이브로 1:1 무승부, 아주 중요한 승점을 가져간다. 이 경기 결과에 힘입어 리그 최종 순위는 '''승점 1점 차이로 토트넘이 4위로 챔스, 아스날이 5위로 유로파로 가게 된다.'''
2019-20시즌, 두 클럽이 동시에 부진하고 결국 두 팀 다 감독을 경질한다. 무리뉴 감독의 토트넘이 점점 순위를 회복하는 반면 융베리 감독대행의 아스날은 아직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나... 아르테타 부임 이후 아스날도 반등에 성공했다. 시즌 막바지 토트넘이 다시 부진하고 있는 사이 아스날은 승점을 쌓아올리며 어느새 토트넘을 추월했다. 이에 오바메양이 토트넘을 조롱한다.
허나 더비 경기에서 토트넘이 2-1,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내며 다시 순위를 역전시킨다. 손흥민은 1골 1도움 활약하며 리그 10골-10도움[17] 을 달성한다. 경기 직후 오바메양은 토트넘 팬들의 무수한 역공을 당하고 말았고, 4시즌 연속 토트넘이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FA컵을 아스날이 우승하면서, 아스날은 유로파리그 직행 티켓을 따게 되고, 자연히 6위 토트넘은 한자리 밀려 예정에도 없던 유로파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18]
2020-21 시즌, 첫 더비를 앞두고 토트넘은 리그 1위, 아스날은 강등권에 가까운 15위에 쳐져있다. 더비에서 양 팀의 순위 차이만큼 압도적 경기력으로 아스날을 2-0으로 찍어누르고 더비 2연승을 가져갔다. 손 & 케인의 두 번의 카운터 어택으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아스날은 점유율은 가져갔으나 90분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6. 한국과의 인연
북런던의 클럽들은 한국 선수들이 진출한 덕분에 국내에 팬들이 꽤 있는 편이다. 현지에서만큼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치열하게 두 서포터즈가 싸운다.
이영표는 중박의 활약, 박주영은 최악의 시기, 손흥민은 클럽 레전드의 길을 걷게 된다.
- 이영표 - 토트넘 홋스퍼 FC (2005~2008)
- 박주영 - 아스날 FC (2011~2014)
- 손흥민 - 토트넘 홋스퍼 FC (2015~ )
7. 여담
- 토트넘 팬들은 아스널과 관계된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 화이트하트 레인에서 열린 토트넘과 크리스털 팰리스의 '런던 더비'를 보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하던 한국 기자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열차에 타고 있던 대부분의 승객들이 하이버리역에서 두 눈을 가리거나 감아버린 것. 화이트하트 레인이 위치한 세븐 시스터즈역에 가기 위해선 하이버리역을 거쳐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곳엔 아스널이 2006년까지 홈 구장으로 사용한 하이버리 스타디움이 있었다.#
- 2015년 9월 23일 캐피탈원컵 북런던 더비에서 아스날 팬이 토트넘 구단이 설치한 배너를 뜯어서 기물파손. 토트넘은 아스날 측에 배상을 요구했다.# 직관한 통신원은 경기가 끝난 후, 전철역으로 향하는 동안 양팀 팬들의 고함소리가 계속 들렸고,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경찰이 데리고 가는 모습을 봤다고 서술했다.# 난동부렸던 아스날 팬 10명은 체포되었다.#
- 2016년 3월 5일, 경기 시작 전 화이트 레인 바깥 원정 서포터 골목에서 토트넘 팬들과 아스날 팬들이 서로 충돌했다. 직관한 통신원은 화이트하트레인 주변에서 300여명의 경찰 병력과 20여기의 기마경찰을 보았다고 서술했다. 경찰 병력과 기마 경찰 그리고 경찰차로 원정 서포터석 가는 길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경찰 바리케이트 너머로 계속 욕설을 하고 이미 아래쪽에서는 난투극이 벌어졌다고.# 광팬들 핵심 2명은 체포돼 별도로 구금되었다.#
7.1. 양 팀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 팻 제닝스 : 토트넘 홋스퍼 FC (1964~1977) - 아스날 FC (1977~1985) - 토트넘 홋스퍼 FC (1985~1986)
- 솔 캠벨 : 토트넘 홋스퍼 FC (1992~2001) - 아스날 FC (2001~2006)
- 윌리엄 갈라스[20] : 아스날 FC (2006-2010) - 토트넘 홋스퍼 FC (2010-2013)
- 엠마누엘 아데바요르 : 아스날 FC (2006~2009) - 토트넘 홋스퍼 FC (2012~2015)
- 조나단 딘제이 : 토트넘 u-23 - 아스날 FC(2020~)
8. 참고
- 첼시, 아스날, 토트넘의 런던 더비: 서런던과 북런던. 2000년대 중반 첼시가 부상하면서 생겼다. 첼시에게 더 전통적인 라이벌은 토트넘이었지만 2000년대부터는 아스날, 허나 2010년대 중반부터 아스날이 몰락하고 토트넘이 꾸준히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며 첼시와 토트넘 간 라이벌리는 강해진다.
9. 관련 문서
[1] 사진은 티에리 앙리가 북런던 더비 경기에서 골을 넣고는 토트넘의 관중석에 세레모니를 시전하는 장면이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야유와 욕설이 쏟아지고 각종 물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진을 보면 거꾸로 V자를 하면서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영국에서 통하는 손가락 욕#s-2.2이다. 의미는 널 죽일 수 있다는 뜻. 그리고 훗날 앙리가 아스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면서 이 세레모니 장면은 동상으로 만들어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 세워졌다. [2] 하부리그 제외[3] 피가 튄 사람의 사진도 있으니 클릭을 주의할 것.[4] 현재의 토트넘 지역이 런던에 편입된 것은 1965년이다[5] 당시 신문인 Athletic News에 20팀에서 22팀으로 리그 참가팀을 늘리자는 블랙풀의 제안과 함께 일종의 선거를 통해서 이를 결정할 것이라는 기사가 남아 있다. 또한, 당시에 투표를 통해서 1부리그 잔류팀을 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1897-98 시즌이 끝난 후에, 다음 시즌에 리그 참가팀이 불어나게 되자 플레이오프를 통해서 잔류팀이 결정된 경우도 있었고, 1904-05 시즌이 끝난 이후에는 1919년의 경우와 같이 선거를 통해서 잔류팀을 결정하였다. 당시 데일리 익스프레스 기사에 명백히 남아 있는 일이다.[6] 캠벨이 아무리 세계 최고급 수비수라고 해도 발롱위너인 피구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7] 축구계에 돈 거품이 많이 낀 요즘에는 별로 큰 돈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피구가 이적할 때 들어간 이적료 6200만 유로는 계약 당시 역대 최고액의 이적료였다.[8] 당시 아스날의 수비를 책임지던 토니 아담스, 리 딕슨, 마틴 키언은 전부 30대 중후반의 노장들이었다. 아담스와 딕슨은 실제로 2001-02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에 비해서 캠벨은 그 당시엔 20대여서 한창 전성기였다.[9] 토트넘의 마지막 1부 리그 우승은 1960-61 시즌이다.[10] 사실, 팻 제닝스의 경우에는 토트넘에서 FA컵 우승과 UEFA컵 우승 등 커리어를 다 이루고 난 뒤 아스날로 이적했기 때문에 아직도 레전드로 기억하고 있으며, 은퇴 후에 토트넘에서 골키퍼 코치를 하기도 했다. 반대로, 솔 캠벨의 경우는 감독이 글렌 호들로 바뀌고 새로운 투자자의 등장으로 재도약을 노리는 시점에서 터졌던 사건이었기 때문에 토트넘 팬들의 실망이 컸다.[11] 그런데 사미르 나스리도 성격 개판이라서 아스날 팬들은 이 때의 대립을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 수준으로 취급하고 있다.[12] 아스날 이전 소속팀이 첼시 FC였다. 런던 팀 순례자.[13] 승부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리그의 마지막 경기는 모든 팀이 동시에 치르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에 원래 일정대로 강행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경기를 미루려면 폭탄 테러 협박 정도는 나와야 하고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모든 경기를 미뤄버린다.[14] 이쪽도 같은 런던팀이라... 다만 이쪽은 동런던. 직접적 라이벌은 밀월이다.[15] 실제로 토트넘이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올린 선수들 영상을 보면 빨간색은 찾아볼 수 없다. 선수들이 입은 니트도 남색 계열이다. 다만 손흥민의 빨간색 국대 유니폼은 경우에 따라서 예외로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6] 2008년 칼링컵에선 1-5 대패했다.[17] 유럽 5대 리그 아시아인 최초.[18] 더욱이 20/21 시즌은 코로나 여파로 예년보다 빡빡한 일정 속에 진행됨에 따라, 토트넘은 시즌 개막 초부터 나홀로 박싱데이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토트넘은 어려움 없이 유로파 본선에 올라왔고 조 1위로 32강 토너먼트에 오른다.[19] 알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토트넘 팬과 아스널 팬이 분쟁이 붙자 리버풀 팬이 끼어들었는데, 한 토트넘 팬이 "북런던 일에 끼지 마시죠" 드립을 날리면서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현지인 빙의하는 것이냐며 조롱했는데... 놀랍게도 이 회원이 현지 런던 거주자였던 것.[20] 첼시에서도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