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명나라)

 


麻貴
1543년 ~ 1607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 본래 회족 출신이었으나 전향하여 명에게 충성을 바쳤다.

2. 생애


당대 사람들에게 명나라 북방 지방의 명장 가문인 이성량의 철령 이씨 가문과 더불어 동이서마라고 불렸고,[1] 이후에는 서북 제일의 명장이라 불렸으며 보바이의 난과 임진왜란에 종군하여 모두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북방의 이민족들(대개는 몽골족)에 의한 크고 작은 소요 사태들 또한 모두 평정하였다.
만력 3대정 중 첫 번째이자 내몽골에서 벌어진 보바이의 난에서는 보바이를 지원하던 몽골을 무찔러 보바이를 지원을 하는 것을 막았으며 몽골과 보바이가 연합하려 하자 직접 '''몽고 부락에 쳐들어가 근거지를 불태운다.'''[2]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만력제에게 비왜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명의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파병되었다. '''조선에서 정말 열심히 싸운 대표적인 명의 장수'''로 사천성 전투직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사로병진책이 개시되자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연합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나, 아쉽게도 적의 원군이 도착하며 성을 점령하지 못한다. 조명 연합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경상 등지에서 왜군을 압박하다가 1598년 왜군이 철수하자 명으로 귀환하였다. 분명 장수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고 열심히 전쟁에 임하였을 뿐 아니라, 인품도 훌륭하여 조선 땅에서 트러블을 일으킨 적도 없는 명장이지만, 어째 좀 묻히는 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 권율, 정기룡, 한명련을 조선 최고의 장수로 뽑았다.[3]
이후 요동 반도 지역에서 근무하였고 1607년 병사하였다.

3. 기타


아들인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麻巖)은 조부와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에 후금(後金)과의 싸움인 심하 전투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였다.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남경통판겸 조병독량사로 산동성 등주의 군량을 배를 타고 순찰 감독하다가 1627년(조선 인조 5년) 9월에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만에 황해도 풍천에 이르렀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상곡 마씨의 조상이 되었다.
[1] "마씨는 장수로서의 재능이 많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철령 이씨와 더불어 동이서마라 하였다(麻氏多將才. 人以方鐵嶺李氏, 曰 東李西麻)."라고 명사 마귀 열전에서는 말한다.[2] 당시 장량보까지 진격한 이여송의 군대가 적과 승부를 예측할수 없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밀고 밀리던 와중에, 몇백기 남짓의 기병을 이끌고 측면을 기습지원하며, 이여송과 연계하여 적을 패퇴시켰다고 한다.[3]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