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모 모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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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굴지의 정유 회사인 사라스의 회장이자 이탈리아 세리에 A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구단주와 명예 구단주 직책을 역임한 인물.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이지만 막상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을 제패했던 기억이 많지 않은 인테르가 유럽을 뒤흔들며 가장 빛났던 영광의 순간인 1960년대 '그란데 인테르' 당시 구단주였던 안젤로 모라티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사라스를 물려 받았고 1995년 에르네스토 펠레그리니에게서 인테르를 인수해 구단주로 취임했다.[2] 인테르 유니폼 하면 떠오르는 메인 스폰서 피렐리를 끌어온 것도 이 때였다. 피렐리는 인테르에서 모라티 우호 지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이후 팀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오랫동안 정상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지속적으로 투자했다.[3] 그리고 유벤투스가 칼치오폴리 여파로 세리에 B로 강등되면서 한동안 부침을 겪던 사이 인테르는 그토록 염원하던 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세리에 A 5연패(2005-06[4] , 2006-07, 2007-08, 2008-09, 2009-10)와 3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2005, 2006, 2010). 3번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2005년, 2006년, 2008년)을 따내고, 2009-10 시즌 이탈리아 클럽 사상 최초의 트레블까지 달성하며 그간의 투자를 보상받았다.
하지만 트레블 직후 주제 무리뉴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면서 후임 감독 선임, 선수단 개편 모두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며 성적을 급격히 꼬라박고(2-6-'''9''') 재정적인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 와서 2013년 여름부터 에릭 토히르라는 인도네시아 사업가에게[5] 인테르 지분의 70%와 구단주 자리를 넘기고 모라티는 경영진의 일원으로 남아있기로 협상을 하던 중 2013년 10월 16일자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300m 파운드에 합의를 봤다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토히르가 인테르 지분의 70%를 갖고, 모라티는 명예회장 자격으로 토히르를 서포트하는 형태.
그리고 2016년 6월 6일부로 남은 지분을 모두 청산하고 인테르를 떠나게 되었다. 쑤닝 그룹과 에릭 토히르 간의 지분 조정 과정에서 내려진 결정으로 모라티와 그의 가족들은 선대였던 안젤로 모라티 이래 오랫동안 관여해왔던 구단을 떠나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일 기자회견에서 인테르의 현 구단주인 쑤닝의 장진둥 회장과 직전 구단주 에릭 토히르 모두 마시모 모라티에게 헌사를 보내면서, 모라티 일가는 명예로운 퇴장을 이루게 되었고 모라티 일가의 이름은 인테르 역사에 중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2. 구단주로서의 모라티
지나친 공격수 수집증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선수들의 양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선수 한명 한명에 대한 애정이 [6] 각별하고 레알 마드리드의 페레스처럼 필요 이상으로 선수단 운영에 개입해 감독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 없고 감독에게 철저한 지지와 신뢰를 보여주며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은 여건이 되는 한 군말없이 데려다 주기 때문에 같은 동네 베를루스코니 구단주에 비해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7]
아니 아랍 석유재벌들과 함께 '''팬들이 가장 원하는 구단주이다.'''[8] 유독 강성 돌아이 구단주가 많은 이탈리아인지라 그의 이러한 대인배적 풍모는 더욱 빛나 보인다.
2011년 칼치오폴리 재판 당시 스포츠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보이는 구단 명단에 인테르가 포함된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공소 시효가 만료된 시점이어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스포츠 조항 위반은 루치아노 모지가 주장한 것처럼 모라티 및 파케티도 승부조작을 했다는 그런 사안이 아니었다. 관련 스포츠 조항 위반 사항은 파케티 전 구단주가 심판진과 통화를 했었다는 내용인데, 이는 루치아노 모지가 승부조작을 위해 이미 매수해둔 심판을 피해서, '조작되지 않은' 경기를 치루기 위한 내용이었고, 담당 검사장은 이때 당시 모지에게 당신 통화내역 말고는 문제될 것이 없다며 조소를 날리기도 했다. 오히려 실제 파케티 전 구단주가 칼치오폴리 이전부터 세리에 A를 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자성을 촉구하는 글을 작성한 여러 기록이 담긴 일기장이 사건 당시 증거품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칼치오폴리 당시 FIGC 회장이었던 귀도 로시가 인테르 전임 중역이었고 칼치오폴리 판결 이후 도청을 주도했던 텔레콤 이탈리아 회장으로 취임했다는 정황 증거에 따른 음모론이 생겨났는데, 칼치오폴리에 연결한 것은 악성 유벤투스 울트라들의 악의 섞인 헛소문 유포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당시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문란한 사생활을 감독하기 위해 텔레콤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그의 전화를 도청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으며, 비에리 역시 2006년 텔레콤 이탈리아 도청 스캔들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오자 인테르와 텔레콤 이탈리아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하기도 했다.
3. 기타
환경 운동가인 에밀리아 보시와 결혼하였으며, 5명의 자녀를 낳았다. 2009년 9월 10일에는 미국 친선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개그맨 서세원을 닮아 모세원이라는 별명이 있다.
AC 밀란의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는 달리 정치와는 크게 관련이 없으나,[9] 형수인 레티치아 모라티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이탈리아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밀라노 시장을 지낸 바 있다.[10]
4. 관련 문서
[1] 모라티가 CEO로 있는 사라스의 회장이었다.[2] 여담으로 구단주 부임 후 첫 영입이 '''하비에르 사네티'''였다.[3] 2004년에 성적 부진으로 잠시 구단주 자리를 자친토 파케티에 넘겨주고 1선에서 물러났다가 2006년 파케티의 사망으로 복귀했다.[4] 유벤투스가 칼치오폴리로 스쿠데토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얻은 트로피로, 유벤투스 구단은 이에 대한 반환 청구를 FIGC가 기각한 것에 대해 FIGC의 상위 기관인 CONI에 제소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5] 인도네시아의 미디어 사업가로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인도네시아 농구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DC 유나이티드의 구단주이다. 또한 필라델피아 76ers의 경영진에 속해 있기도 하다.[6] 사실 아드리아누가 두드라져서 그렇지, 이 케이스에 가장 적절히 들어맞는 건 알바로 레코바였다.[7] 모라티가 해외 축구팬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에 로베르토 만치니 부임 이후 인테르의 성적이 좋아 잠잠한 거지 원래는 감독 경질에 가차없었다. 모라티가 구단을 인수한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간 인테르는 감독이 12번 바뀌었다. 특히 1999년 한해에 인테르를 맡았던 감독은 4명이나 된다. 로만이나 페레즈처럼 감독 일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유형은 아니지만 진득하게 기다려 주는 사람도 아니라서 못한다 싶으면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트레블 후 3시즌 동안 감독이 6번 바뀌었고, 그 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것이 4명이다.[8] 어차피 아랍발 석유 부자가 아닐 뿐 석유 부자란 건 마찬가지다. 거대 자본가가 축구 클럽에 자본을 쏟아 부어 클럽을 강성하게 만드는 케이스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시모 모라티의 아버지 안젤로 모라티가 있기도 하고.[9] 정치 성향은 중도좌파 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장관을 지낸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레치티아 모라티는 베를루스코니의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었는데, 그 때문인지 마시모 모라티는 2011년 밀라노 시장 선거에서 형수의 상대 후보인 줄리아노 피사피아를 지지하기도 했다. 형수는 연임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