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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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원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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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대상 대상'''
오재미
(1994년)

'''
(1995년)'''

신동엽
(2002년)[28]

'''연기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29]
배일집
김보화
(1987년)

'''서세원'''[30]
김혜영
'''(1988년)'''

배연정
이규혁
(1989년)

'''TV부문 코미디연기상'''
이용식
이성미
(1987년)


김정식
배연정
'''(1988년)'''

김미화
김한국
최병서
(1989년)






'''이름'''
서세원 (徐世源)
'''출생'''
1956년 3월 18일 (68세)
충청북도 청주시
'''본관'''
달성 서씨[1]
'''신체'''
180cm, 69kg, O형
'''가족'''
아버지 서우석(1997년 별세)[2], 2남 2녀 중 막내
[3], 서동주, 아들 서동천
혼외 딸 서○○
'''학력'''
대륜고등학교 (졸업)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 / 학사)
'''종교'''
개신교[4]
'''데뷔'''
1979년 TBC 라디오
'''수상'''
1999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희극연기상
1. 개요
2. 생애
4. 가족
4.1. 전처 - 서정희
4.2. 딸 - 서동주
4.3. 아들 - 서동천
4.4. 혼외 딸 - 서○○
5. 경력
6. 수상 내역
7. 영화
8. 방송 / 광고
9. 도서
10.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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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방송인, 영화 제작자, 목사'''였으나,''' 2014년 부로 세 분야에서 모두 제명되었다.

2. 생애


1956년 3월 18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아버지 서우석(1920~1997,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과 어머니 정태순(1920~1988,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 슬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TBC 라디오를 통해 데뷔한 후 대부분의 활동은 MBC에서 했으며 MBC에서 활동하는 동안 영일레븐, 청춘만만세, 청춘행진곡,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서세원은 1980년대 중반까지 동시대의 라이벌들인 김형곤, 주병진보다[5][6] '''인기면에서 언제나 우위에 있었다.'''[7]
'''청춘보감'''이라는 코너에서 서세원 최고의 유행어인 '''산넘고 물건너 바다건너셔'''[8]가 탄생했고 주병진이 본격적으로 뜨기 전 당대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던 예능 프로그램도 서세원이 진행하는 영 일레븐이었다. 그 후 KBS 2TV에서 최양락이 네로 25시로 너무나 잘 나가자 MBC에서는 최양락의 대항마로 서세원을 다시 내세웠을 정도였다.[9] KBS는 콩트 중심의 상황극, MBC는 유행어를 민다는 방향성을 보였었다.
또한 인기 연예인을 초빙해서 개그를 하는 <서세원의 스타데이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훗날 대한민국 토크쇼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10] 이후 서세원은 서세원의 스타 데이트를 진행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 토크쇼 진행자로 변신, 2000년대 초반까지 KBS 2TV의 간판 프로그램인 '서세원쇼'로 흥행하게 된다. 주 코너는 '토크박스'로 출연 연예인들이 서로 센 이야기들을 해서 서세원이 등수를 매기는 방식. 다만, 이 프로그램의 컨셉[11]은 한국 방송의 고질적인 병폐인 일본 방송 베끼기다. 일본의 장수 인기 토크 프로그램 고키겡요(ライオンのごきげんよう, 1991년부터 방송)의 코너 '주사위 토크'를 그대로 따라했다. #
그 외에 코미디 세상만사,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등의 KBS 코미디 프로그램[12]과 라디오 '가요산책'[13], '공포체험 돌아보지마', 1998년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14]의 진행자로 방송계의 폭발적인 위세를 누리며 데뷔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까지 김국진, 이경규 등의 탑레벨 개그맨 다음가는 1군~1.5군 정도의 위치는 꾸준히 지키고 있었다.[15] 신인 때부터 인기를 끄는 스타로 시작하여 정통 콩트 코미디가 유행할 때는 콩트로, 연예오락(지금의 예능)이 유행할 때는 그 진행자로, 시대흐름이 바뀌어 오는 것에 따라 발맞추어 모두 성공했던 최강 커리어의 희극인이었다. 그야말로 전성기가 아닌 적이 없을 정도.

3. 사건사고 및 논란




4. 가족



4.1. 전처 - 서정희




4.2. 딸 - 서동주




4.3. 아들 - 서동천


[image]
아들인 서동천(예명 미로)은 1985년생(39세)이다. 과거 나우누리 등 PC통신망에서 '랑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으며, 푸하라는 유머 웹사이트에서 '프로 유머작가'라는 직함으로 자기 가족에 대한 글을 유머러스하게 연재하기도 했다. 여성동아 기사에는 이 시기의 사진과 일부 글들이 남아있다.[16] 글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으며, 지금 기준으로도 재미가 있지는 않은 편이다. 자기 가족을 상당히 소박하면서도 단란한 이미지로 묘사하였는데, 당시 서세원은 KBS 최고 출연료를 자랑하면서 빌딩 몇 채를 소유한 상황이었으며, 아내에게는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그 뒤 연예인으로 데뷔했다. 사실 서세원의 아이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도 방송을 타곤 했었는데,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대과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비평이 이어졌다. 이후 서동천에서 서종우로 개명했지만, 네이버에선 서종우라 검색하면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꼭 서동천이라고 검색해야 인물 정보가 나온다.
2007년에 '미로밴드'라는 이름으로 밴드를 결성했는데, 실력이 매우 형편없었던지라 결성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활동이 중단되었다. 특히 SBS <음악공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불렀던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 은 유튜브에서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고 결국 한국 내에서 기사화까지 되었다. 심지어 당시 관객들의 말에 의하면 '''하도 삑사리가 나서 몇 번 재촬영한 것'''[17]이라나. 이에 대해서 해당 당사자는 "'''밴드는 가수와 다르고 가창력은 별개의 문제다'''" 라고 했던 글이 발견되면서 이건 뭐... 사실상 언론에서 듣보잡 취급한 것이 오히려 나았을 정도였다. 결국 2집 앨범을 끝으로 연예계 생활은 종료. 2013년 8월 결혼했을 때에는 '과거의 활동 '''새삼''' 주목'이라고 취급 받았을 정도였다.
어머니 서정희의 폭행 피해 사실에 대해 서동주와 다르게 "부모님 두 분의 일이라 아들인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과거 방송에서 초등학생 때 "아빠가 주먹으로 나를 때렸다"는 등의 발언, 이혼 소송에서 "필요하면 엄마를 위해서 증인으로서 얘기를 하겠다"는 발언, 누나와 함께 법원에 모친보호요청을 한 것을 볼 때, 역시 가정폭력아동학대의 피해자였던 것 같다.

4.4. 혼외 딸 - 서○○


그의 나이 59세에 한 명문 음대 출신의 내연녀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2015년생(9세)으로 서동주보다 '''32살 아래''', 서동천보다 '''30살 아래'''다.

5. 경력


  • 2001 서세원프로덕션 대표이사 사장
  • 2001 국제어린인후원단체 플랜코리아 친선대사
  • 2002 에스에스원 시네마 대표이사 사장
  • 2005 ~ 2006.10 닛시엔터테인먼트그룹 대표이사
  • 2011 솔라그라티아 교회 담임목사

6. 수상 내역


  • 1979 TBC 라디오 개그콘테스트 5위
  • 1983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특별상
  • 1987 MBC 연기대상 코미디부문 우수상
  • 1988 백상예술대상 남자TV 예능상
  • 1988 제24회 백상예술대상 남자TV예능상
  • 1998 MBC MBC연기대상 코미디 부문
  • 1998 MBC 신인상
  • 1995 KBS코미디대상 대상
  • 1997 문화체육부장관표창(선행연예인)
  • 1997 제24회 한국방송대상 개인부문 남자코미디언상
  • 1998 SBS 연기대상 MC상
  • 1998 제10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코미디부문 출연자상
  • 1999 제6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희극연기상
  • 1999 제6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TV진행상

7. 영화


  • 2013 다큐멘터리 부부
  • 2013 서세원 남희석의 여러 가지 연구소
  • 2010 젓가락
  • 2004 도마 안중근
  • 2002 긴급조치 19호
  • 2002 4발가락
  • 2001 조폭 마누라
  • 1995 슈퍼선데이
  • 1994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
  • 1986 납자루떼
  • 1982 바보들의 청춘 '82
  • 1981 이런 여자 없나요
  • 1981 연분홍 치마
  • 1981 나리집
  • 1980 머저리들의 긴겨울

8. 방송 / 광고


  • 동화약품 까스활명수
  • 1996 공익광고협의회 서세원 부부

9. 도서


  • 1998 구두쇠가 이긴다
  • 1996 서세원 컴퓨터와 바람났네
  • 1992 싸움꾼

10. 그 외


  • 1991년 말 SBS 개국과 함께 이적했으며, 다음 해 10월 7일부터 고질병인 허리디스크 때문에 한동안 방송 활동을 쉬었다가 같은 달 26일부터 SBS 측과 1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1993년 5월 1일 KBS 토요대행진의 MC를 맡은 데 이어 1993년 5월 24일 시작된 MBC 전격 팡팡쇼 MC를 맡았다. 결국 그해 7월 10일 MBC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같은 해 9월 1일 서울인사지법으로부터 전속계약 종료(1993년 10월 26일)까지 SBS가 허용하지 않는 타방송사 출연이 금지되었다. 이후 토요대행진의 MC는 유재석 / 양원경의 2MC 체제로 전환했다가 1993년 10월 16일 방송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며, '전격 팡팡쇼' 역시 1993년 9월 13일 자부터 정원관이 후임으로 들어왔으나 얼마 안 되어서 가을개편을(10월 11일) 거치며 막을 내려야 했다. 서세원은 '전격 팡팡쇼'에서 중도하차한 후 1995년 4월 18일 시작한 교양 프로그램 TV 시간여행을 탤런트 김희선과 공동 진행했지만 SBS와의 전속계약이 끝나지 않았던 개그우먼 정선희를 출연시킨 것이 문제가 된 것뿐 아니라 보조 MC 김희선의 "역할이 거의 없다"는 지적을 받아 1995년 가을개편으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고 정선희는 1995년 10월 SBS를 떠나 KBS로 둥지를 옮겨야 했다. 이후 서세원은 2000년 4월 30일이 되어서야 KBS 2TV 새 프로그램 행복남녀 메인 MC를 맡기 위해 빠진 이경규의 후임으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를 맡아 MBC 복귀를 했지만[18] 당시 4개 프로그램의 겹치기 출연에 따른 시청률 부진 탓인지 같은 해 5월 18일 방송분을 끝으로 빠졌고 이 프로그램이 MBC에서의 마지막 진행 프로그램이 되었다.
  • 자기 이름을 걸고 하던 서세원쇼가 종영된 이유는 게스트로 나온 김남일의 부모님을 조롱한 논란에 안이하게 대처하다 게스트들의 단체 보이콧을 받고 제작이 불투명해져 종영된 것이라고. 하지만 저것은 표면적인 이유고, 실질적으로 종영된 사유는 연예계 비리 사건으로 서세원 본인이 촬영을 펑크내고 홍콩으로 도피하여 서세원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던 KBS가 결국 종영시킨 것이다.[19]
  • 1997년, 박완규가 보컬이었던 부활이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스튜디오에 들어오자 다짜고짜 박완규에게 멋진 척하지 말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 지금은 국민MC들 중의 하나인 유재석은 신예 개그맨이었던 시절부터 서세원과 가까웠고[20], 서세원 본인도 서세원쇼 등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유재석을 많이 띄워주었다.[21] 그 전까지 무명이었던 유재석이 서세원쇼에서 고정 게스트로 나와 친구 찍새와의 에피소드를 맛깔나게 풀면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것은 유명한 일. 코미디 세상만사 시절에도 유재석을 중간꽁트 주인공으로 넣는 걸 출연자와 연출 담당자들 회의선에서 최종컨펌한 게 출연자 중 입김이 가장 높은 서세원과 김미화.[22] 때문에 서세원이 유재석에게 여러모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하는 글도 있다. 물론 둘의 인성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유재석은 신인 때였던 1990년대부터 대중들, 개그맨 동기나 후배들에게 깐족거리는 비호감 이미지를 얻었던 것에 비해 은근히 선배 개그맨들에게는 예쁨과 호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심형래영화에 출연할 때도 심형래가 주인공(20살인 초등학교 3학년 역할)인 자신의 짝꿍 반장 역할을 유재석에게 시켜줬을 정도면 사실 꽤 대단한 총애다.[23] [24]

서세원쇼 토크박스 시절의 유재석.
  • 양원경전처결혼하려고 기자를 매수하여, 거짓 스캔들을 꾸며서 아내 인생을 작살냈다. 그 다음에 결혼했다고 방송에 나와 자랑했는데, 이 아이디어를 내 준 사람이 바로 서세원이라 한다. 그 뒤에 양원경은 2011년에 이혼당했다.
  • 강병규이병헌을 고소한 이병헌 전 애인 배후세력이라는 루머를 까발렸다. 그 후부터 강병규와 이병헌은 서로 앙숙이 되었다.
  • 2006년, 닛시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있었는데 이때 박효신 등 소속 가수와 맺었던 계약이 틀어지면서 민사소송을 당해서 결국 계약 보증금 약 9억 원을 배상했다.
  • 2009년에 주가 조작 및 회사 자금 횡령으로 인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를 받고 행정안전부가 주가 조작, 횡령, 도박 의혹, 폭행, 강간 등을 일으킨 서세원에게 KBS·EBS·SBS 영구출연정지 처분을 내렸다. # 집행유예가 끝나는 2012년에 KBS·EBS·SBS가 행정안전부에게 출연정지 해제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KBS 미디어에선 이런 이유로 인해 서세원쇼에 대한 영상 판매가 되지 않는다. #
  • 사실 서세원이 목사가 된 것도, 서정희가 이 남자를 반드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서세원이 연예인, 그것도 코미디언 출신이라서 설교를 굉장히 재미있게 하여 교회를 번창시키는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만했다고. 하지만 막상 서세원에게 목사 일을 시켜 보니 교회도 제대로 못 굴렸고, 무엇보다도 그 고약한 인간성이 역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결국 교회도 문 닫고 대한장로교협회에서도 제명당하고 끝났다. 애초에 코믹한 이미지도 코미디언 시절의 방송용 이미지일 뿐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 딸 서동주 명의로 큰 돈을 빌려서, 자기가 운영하는 회사 여직원을 딸과 닮게 성형수술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서동주가 반발하자 서세원은 머리끝까지 화나서 딸을 무척 혼냈다고 한다. # 이쯤 되면 그야말로 뼛속까지 인간 말종. 다만 2020년에 딸 서동주가 낸 회고록 "샌프란시스코 이방인"에 따르면 "대출을 받아서 여직원을 딸처럼 성형수술한" 게 아니고, "여직원을 딸로 위장시켜 대출사기를 친 것"이다. 양자는 엄연히 성격이 다른 일이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서세원이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 아들 미로와 딸 서동주는 법원에 모친보호요청을 하면서 서세원은 현재 서정희에게 반경 1km 이내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다. 게다가 이걸 신청한 사람들은 아내가 아닌 자녀들이니, 이쯤 되면 이미 자녀들도 그를 내다버렸다. 부부 사이가 나빠도 자녀들과 잘 지내면 상황에 따라 동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는 자녀들도 내다버렸으니 아주 작은 동정도 쓸데없다.[25][26] 이에 대해 그는 "표현의 자유라 해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며 날뛴다. 이 추태를 어디까지 보여주려고 이럴까? 누구나 알다시피 그는 이미 아버지로서도, 남자로서의 자격도 잃은 상황이다. 이런 인간에게 물들지 않은 자식들이 대단할 뿐.
  • 2013년 6월에 채널A의 서세원 남희석의 여러 가지 연구소 진행자로 방송에 복귀했으나 1개월, 즉 4회 만에 시청률 부진으로 종영되었다. 다만 4회 만에 종영된 이유는 애초에 4회분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획돼서 그렇다고... 링크.
  • 2013년 6월 28일에 올라온 동영상에서 간통죄를 폐지해야 되는가에 대한 주제에서 찬성의 입장을 표했다. 찬성이든 반대이든 상관없이 다른 이들의 입장 또한 존중받아야 하나 혼인 중 다른 여자를 만나고 외박하는 등 그 동안의 내로남불스런 행적들을 보면... 어쨌든 위 영상에서 간통을 하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양심에 맡겨야 된다고 말했다. 본인은 도덕적 양심이 없다고 인증한 셈이다. 2분 11초 쯤에 "간통죄는 폐지되기는 아직 이르다며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라는 발언에 "아~" 하고 이해하는 듯의 뉘앙스를 취했다. 그런 자가 왜 자신의 아내에게 폭행을...
  • 2015년 5월 14일, 법원은 서세원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기사
  • 2015년 9월 7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과 홍콩으로 여행을 갔다. 이게 서세원이 이혼하기 전의 일인지 이혼한 후의 일인지는 밝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나온 서세원의 반박도 들어보자. 2016년 2월 5일, 거짓말임이 들통남. 2015년 말, 딸을 출산[27]했다고 한다.

  • 2019년 12월, 새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캄보디아로 이주한 것이 확인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5년 전부터 캄보디아 도시건설 사업에 참여했으며 문화관광부 장관의 제안으로 방송사를 세우기로 했다는 것.
  • 특이하게도 입꼬리가 오른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다. 젊은 시절 사진부터 요즘 사진까지 전부 다 그런 걸 보면 중풍 등의 질환으로 인해 입이 치우치게 된 건 아닌 듯.

[1] 23세손 源(원) 항렬.[2] 1999년 아버지를 추억하는 글이 실린 책이 출간된 적이 있는데, 서세원이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참조.[3] 2015년 8월 21일에 이혼했다.[4] 현재도 믿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5] 데뷔가 비슷했던 대신 서세원보다는 동생들이다. 다만 1980년대 중반 부터 상황이 달라지는데 김형곤이 유머 일번지의 레전드 코너들인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등의 시사풍자 콩트를 통해 전성기 심형래의 대항마 수준으로 올라섰고 주병진은 콩트 스케치쇼였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버라이어티 예능으로 포맷을 바꾸면서 메인 MC 자리를 도맡으며 원톱으로 군림하게 된다.[6] 서세원도 그 인기 자체는 죽지 않아서 인기 토크쇼인 서세원쇼를 진행하는 등 199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활약했으나 몇년 있지 않아서 흑역사가 줄줄이 터지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7] 물론 1980년대 중반부터의 압도적인 원탑은 후배인 심형래였다. 심형래 직전까지 서세원이 정상급 코미디언들 사이에서도 최고였던 것은 틀림없다. 다만 원탑은 아니었다. 이분이 계셨기에...[8] 콩트 속에서 악덕 상인이나 사기꾼 역할의 서생원이란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기에 마지막엔 징벌을 당한다. 이때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이 어린 양들을 이끌고…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셔 뗏목을 타다가 뒤집어져셔 모터보트 갈아타는데 모터보트 기름 떨어져셔 그냥 막 헤엄치면셔셔셔 셔셔러셔셔셔'''" 처음엔 목사 말투로 하다가 회를 거듭할 수록 바리에이션으로 노래를 부른다든지, "Over the mountain cross the river cross the sea"의 식으로 막영어로 개사한다든지 했다. 박명수가 1990년대 신인 때 이승철 흉내만 내는 게 식상하다는 평을 듣자, 서세원을 닮은 걸로 한번 주목받아 보려고 잠깐 이 유행어로 성대모사 개그를 썼던 적이 있었다. 물론 결국 다시 이승철 흉내로 돌아왔지만, 그 이후에도 종종 써서 현재에 이르러서도 한번씩 방송에서 (분장 등을 했을 때 민망하면) 산넘고 물건너 바다건너셔를 할 때가 있다. 무한도전 시절에도 유재석이 분장한 박명수에게 '서세원 선배님 닮았다'고 하면 입을 내밀고, '안녕하십니까아 서세원입니다아아'로 시작해서 자동옵션으로 이 유행어를 몇번 했다. 사실 개그맨 김영철도 신인시절에 윤복희, 하춘화, 보아같은 여자연예인 뿐만 아니라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서세원 성대모사도 1년간 했었고, 심지어 토크박스에 나가서도 해서 서세원이 "(나를) 닮은 게 맞는거 같긴 하지만 왠지 니(김영철)가 (내 성대모사) 하는게 싫어"라고 말했을만큼 잘 표현했었는데, 이내 서세원이 여러 사건에 연루된 후로는 안 하고 있다. 외모는 흡사하고 연기력도 좋았으나 김영철 목소리가 체격에 비해 여성스러운 부분이 있던 것도 덜 어울리게 된 영향이 있다. 데뷔 초기 3명의 개그맨 박준형, 김영철, 김현기가 함께 활동하던 시절, 김영철의 레퍼토리는 항상 4대 성대모사(윤복희, 하춘화, 서세원, 보아)였다.[9] 네로 25시의 기믹을 '''살짝 베껴서''' 지하실의 멜로디라는 코너로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는 당시 반국가단체로 간주되었던 전대협의 명칭을 패러디한 전'''도'''협(전국도둑협회)의 회장으로 등장해서 네로 25시에서 최양락이 보여준 개그와 비슷한 기믹의 개그를 보여줬다.[10] 대한민국 TV 토크쇼는 초기에는 진지한 대담에 가까웠는데 1979년에 방영된 '화요일에 만납시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 가 대표적이다. 이것이 코미디언이 진행하는 농담 섞인 형태로 변한 것으로 대표되는 것은 1989년 3월부터 방송된 한국계 미국인 코미디언 '쟈니 윤 쇼' 였는데 시기적으로 서세원의 스타데이트와 유사하다.[11] 주사위를 던져서 토크 주제를 정하는 것[12] 서세원은 MBC 출신이지만 1990년대 SBS의 개국과 맞물려 본인을 포함한 중견급 코미디언들의 대이동을 거친 끝에 심형래, 임하룡 등이 떠난 KBS 코미디계에서 리더 격으로 자리잡았다.[13] "오늘은 왠지" 등의 유행어를 만들었다.[14] 이건 일본의 거물 개그맨 아카시야 산마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포맷을 표절한 것이었다. 서세원쇼에서 뻐드렁니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것, 웃을 때 바닥을 뒹굴며 과하게 리액션을 취하는 것 등도 산마가 원조.[15] 사실 한참 후배인 김국진은 둘째치고, 동세대 후배인 이경규만 해도 서세원의 전성기인 1980년대에는 단역 개그맨에 불과했다. 당시 원탑 발라드 가수였던 이문세가 그나마 라디오에서 이경규의 재능을 좋게 봐서 자기 프로그램에서 막간 유머를 장기간 하게 밀어줬던 게 그나마 어려운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줬던 정도였고 개그맨으로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도 서세원이 꽂아준 코너에서 주요 조연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이경규 전성기에 서세원이 크게 딸린 적도 없었다. 이경규의 일밤 시절에도 서세원 역시 본인 진행 프로그램들로 나름 큰 인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심형래가 영화 제작 문제로 빠진 21세기에, 서세원이 후술된 막장짓거리들을 안 했더라면 현재까지도 이경규보다 예능계에서 더 압도적인 권위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16] 그 외에도 '나우누리 랑랑'으로 검색하면 주옥 같은 글들이 꽤 많이 보인다.[17] 한 번 재촬영을 한 것은 맞지만, 기타줄이 끊어져서 재촬영을 했고 삑사리 때문은 아니었다.[18] 이 때 맡은 코너 이름이 유머당이었는데 첫 화만에 억지개그라는 평을 듣고 코너가 종영됐다.[19] 물론 그 사건이 없었다 해도 이미 평판을 잃은 상태라 프로그램을 쭉 유지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20] 1993년 토요대행진에서 서세원의 후임 MC로 진행을 맡았으며, 다음 해인 1994년에는 심형래가 찍은 영화 영구 시리즈인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 에 두 사람이 함께 나왔던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21] 토크박스 1위를 자주 주었고, 녹화 전에 유재석에게 개인기를 미리 연습하라고 시켜서 어쩌다가 토크가 재미없는 날에는 개인기를 시켜 방송분량 늘릴 기회를 주곤 했었다. 참고로 스포츠에서 말고 재미를 주는 장기라는 의미로의 개인기라는 단어는 서세원쇼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22] 박수홍의 말로는 당시 본인이 진행하던 SBS 방송 코너에 유재석을 본인이 넣어주려고 피디들에게 홍보하던 중에, 뜬금없이 KBS 코미디 세상만사에 갑자기 유재석이 들어가는 바람에 못 넣어줬다고 한다.[23] 당시 다른 젊은 개그맨들은 심형래 영화에서 다 얼굴도 보일랑말랑하는 비중의 단역이었을 뿐, 일반적 비중의 조연마저도 못했다. 일반적인 조연은 엄용수김학래처럼 심형래와 비슷한 또래의 베테랑 개그맨이나 정극 배우들(김수미 등)이 맡았다. 그야말로 특급 총애.[24] 사실 유재석이 데뷔하던 시기 당대 최고 여성 희극인이었던 김미화도 유재석을 예뻐해서 콩트에 꽂아준 적도 있었다.[25] 물론 이 경우는 서정희의 주장 내용 중에 강간에 가까운 일을 겪고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확실한 상호합의가 없다면 꼭 자녀와 잘 지내는 것만으로 부부 사이의 문제를 동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예를 들면 아내와 이혼했지만 자기 딸과는 매우 가까운 헐크 호건.)[26] 도널드 트럼프는 말실수와 기행 때문에 말이 많지만, 장녀인 이반카 트럼프는 아버지를 잘 변호하고, 참모로서 제대로 움직인다. 더군다나 이반카는 아버지가 몸담은 공화당을 찍어준다.[27] 큰딸인 서동주보다 32년 연하, 아들 서동천보다 30년 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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