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비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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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91년 토리노 FC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터프하다 못해 지랄맞은 성질때문에 매년 팀을 갈아 치웠다. 처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1993년 세리에 B 소속 라베나에서 32경기 12골로 주목받으면서였다. 이때부터 세리에 빅클럽에 관심을 받은 비에리는 1996년 유벤투스 FC에 입단해 알란 복시치와 투톱을 짜면서 주목을 받았고 AC 밀란의 주장 프랑코 바레시를 박살내는 등 23경기 8골을 넣어 유벤투스가 스쿠데토를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4골을 터뜨리며 유벤투스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는데, 특히 AFC 아약스와의 4강전에서 2골을 넣어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비에리는 낮은 주급에 불만을 터뜨렸고, 스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1997-98 시즌에 비에리는 대폭발하여 24경기 24골을 기록하여 한시즌만에 피치치를 수상했다.[1][2] 1998-99시즌에 SS 라치오 이적을 통해 세리에 A에 돌아온 비에리는 마르셀로 살라스와 투톱을 짜면서 세리에 A에서 12골을 터뜨렸고,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RCD 마요르카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끌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99년, 5000만 달러라는 이적료를 라치오에게 안겨주고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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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르에서의 데뷔경기였던 베로나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화려한 출발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시즌 후반기에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20경기 출장(13골)에 그쳤다. UEFA 유로 2000에도 참가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기나긴 부상 끝에 2000-01시즌 초반에 그라운드로 복귀해 시즌 중반에 또한번 경미한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별탈없이 27경기에 출장해 18골을 성공시켜 자신의 세리에 A 한시즌 최다출장과 최다골 기록을 세우며 부활을 시위를 당겼다.
아니나다를까, 다가온 2001-02시즌. 부상을 완전히 떨쳐버린 것은 아니지만 어느때보다도 완벽한 컨디션으로 돌아온 비에리는 25경기에 무려 22골을 퍼부어 세리에 A 득점 3위에 올랐다. 적어도 5경기만 더 뛰었더라면 누가보나 득점왕에 올랐을 놀라운 활약이었다. 이 시기 팀동료인 호나우두와 함께 우주를 정복할 투톱으로 평가 받았으나 동시에 부상을 당하면서 꿈으로...
2002-03 시즌에는 24골을 득점하며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인테르를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에 당한 큰부상때문에 커리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2005-06시즌 '''아드리아누'''에게 밀려 AC 밀란으로 이적했으나, 역시 알베르토 질라르디노에게 밀려, 반년만에 AS 모나코행, 모나코에서 부상으로 2006 FIFA 월드컵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2006-07시즌 아탈란타 BC와 계약하면서 주급 100만원+ 옵션으로 1골당 1억보너스 지급이라는 해괴망측한 계약을 체결하지만, 역시나 부진하였다.
2007-08시즌에 또다시 피오렌티나로 이적하여, 부활의 날개짓을 펴는듯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콰밥만훈의 수장인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없었다면 2009년 황금 쓰레기통 상을 수상할 뻔한 실패한 시즌[4] 이었다. 리그에서 6골을 득점하는데 그쳤고, UEFA컵 레인저스 FC와의 준결승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여 탈락의 원흉이 되었다.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
2008-09 시즌 또다시 아탈란타 BC로 이적한지 몇개월 후 방출되어 겨울 이적시장때, 여러 브라질 클럽과 토트넘 홋스퍼 FC의 제의를 모두 물리치고 은퇴한다.
그런데.. 2016년 7월 30일 갑자기 중국 슈퍼리그를 통해 현역 복귀를 선언했다! 네티즌들은 뎀바 바를 생각하며 만류 중이다. 복귀를 선언한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얘기가 되고 있던 구단에서 아무래도 무산시킨 듯 하다.
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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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리는 UEFA U-21 챔피언십에서 2회나 우승을 이끌며 유소년 레벨을 평정,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한 비에리는 칠레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전반 11분에 선제골을 넣었지만 마르셀로 살라스에게 멀티골을 허용하였고, 로베르토 바조가 페널티 킥 동점골을 넣어 2:2 무승부에 그쳤다. 하지만 카메룬전에서 멀티골을 넣어 3:0 승리를 이끌었고[5] , 오스트리아전에서도 골을 넣어 1:2 승리를 이끌며 16강에 진출한다.
노르웨이와의 16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1:0 승리를 이끌었다.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갔고, 비에리는 4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시켰지만 루이지 디 비아조가 실축하는 바람에 결국 패하고 만다.
UEFA 유로 2000에는 부상으로 불참했고, 2년 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참가한다.
에콰도르전에서 멀티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었고, 크로아티아전에서 골을 넣었지만, 결국 1:2로 패하고 만다. 이후 멕시코전에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의 동점골로 1:1로 간신히 비기고 16강에 진출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과 격돌, '''어마어마한 포스를 선보였는데,''' 전반 10분에 김태영의 코뼈를 부러뜨리기도 했다.[6]
이후 전반 18분에 그야말로 황소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최진철, 홍명보, 김태영이란 대한민국 역대 최강급 3백이 쌓은 수비벽을 뚫고 선제골을 성공시켰다.[8] 그 이후에도 '''한국 수비진을 엄청난 피지컬로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몇 번이나 한국 골문을 가를 뻔했고, 김태영은 부상을 이기지 못해서 교체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비에리를 막은 최진철은 경기 종료 후 완전히 탈진해서 링거를 맞아야 했을 정도였다[9] . 홍명보는 차두리와 교체되었기에 마지막까지 비에리를 막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막판에 골문 바로 앞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면서 승리의 기회도 같이 날아갔고, 결국 한국팀이 승리하면서 운동장에 뻗는다.
이때 골문과의 거리가 5m도 안 되는데 공을 하늘로 날렸다는 이유로 오른발이 의족이라는 편견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사실 오른발도 잘 쓴다. 다만 앞서 언급한 16강 경기처럼 워낙 결정적인 순간에 없느니만 못한 물건이 되어버려서 의족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말로 그 찬스가 왼발에 걸렸다면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10]
어쨌든 이 경기에서 비에리는 한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한동안 인터넷에서 최고 일진 축구선수로 비에리를 꼽는 한국인이 많았다.[11] 사실 비에리에 대해 매우 안 좋은 감정이 있을 법한데도, 세계에서 비에리를 유일하게 제대로 평가해주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UEFA 유로 2004에서는 조별리그에서 광탈했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불참했다.[12] 대신 자국의 월드컵 우승을 지켜보는 것에라도 만족해야만 했을 듯 하다.
총평을 내리자면 제대로 활약한 메이저 대회는 적었으나, 두 대회에서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준 공격수. 비에리 이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이만한 임팩트를 보여준 공격수는 현재까지 단언컨데 없다. 루카 토니, 질라르디노, 디 나탈레, 발로텔리 등등 준수한 공격수들은 많았으나 어느 누구도 비에리 만한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당시의 이탈리아 공격수 중에서는 187cm/85kg의 아주 좋은 체격을 갖췄으며, 몸빵을 이용한 피지컬 플레이와 제공권 장악에 능했다. 특히 골대를 찢어버릴 듯한 강한 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스페셜 영상 등을 보면 볼을 그냥 사정없이 찬다. 다만 기본적으로 박스 안에서 극강인 플레이 스타일상 강력한 슛팅력에 비해 박스 밖 중거리 슛팅 시도나 골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역시 공이 주어지면 여러번 터치 없이 속전속결로 강력한 슛팅을 구사한다는 측면에서 비에리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던 슛팅 본좌 바티스투타와 비교되는 부분. 바티스투타 같은 경우는 최전방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종으로 많이 내려오는 동선 때문에 미드필더처럼 중거리 골이 많다. 전성기 때 바티스투타는 활동량이 많기도 했고. 외려 비에리 같은 경우는 종 방향보다는 상대적으로 횡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에 가까웠는데 그래서 위에 링크된 영상처럼 상황에 따라선 뛰어난 크로스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 조건 때문에 단순히 미드필더의 지원을 받아 골만 잘넣는 타깃맨으로 오인되지만, 사실 상당히 다재다능한 스트라이커였다. 1998 월드컵 당시 노르웨이 전에서 디 비아조의 멋진 쓰루 패스를 받아 상대 수비수와의 스피드 경합을 이기고 골을 성공시킨 것이 대표적으로, 순간 가속력이 탁월해 발빠른 스트라이커의 전매특허인 수비 뒷공간 침투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래서 미드필더의 지원이 없으면 버로우할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 장신 포워드들과는 달리 온더볼 상황에서도 단독으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다. 화려한 드리블링을 구사하는 건 아니지만 퍼스트 터치나 치달 같은 기본기는 훌륭해서 절친인 필리포 인자기나 다비드 트레제게, 마리오 고메스 등 온더볼 상황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인 포워드들과 달리 단독 대시도 잘 했다.
전성기 때의 퍼포먼스는 디디에 드록바도 한 수 접고 물러날 정도. 전성기 때의 기록으로 보면 한경기당 약 0.8골로 호나우두를 능가하는 득점력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드록바는 비에리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뛰어난 선수이기에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뛰어난 피지컬을 앞세워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스트라이커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비교 가능하다.
단점으로 꼽힌건 불같은 성질과 떡대에 맞지 않는 유리몸.[14]
또한 기본적으로 득점에 특화된 선수이기 때문에 2010년대 접어들면서 포워드의 역할로 특히 강조되고 있는 2선 미드필더들과의 피드백 같은 연계 플레이가 부족하다는 측면에 있어서 다소 아쉬울 수도 있다. 신체 조건만 보면 포스트 플레이+연계를 잘할 것 같지만 비에리는 공을 전달받으면 본인이 속전속결로 슛팅으로 처리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이런 의미에서 비에리는 드록바 같은 현대형 '센터 포워드'라기 보다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나 앨런 시어러처럼 고전적인 의미의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하지만 의외로 크로스 실력도 출중하다.
그러나 비에리의 주된 활동 시기였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같은 경우는 오늘날처럼 포워드라는 포지션에 많은 역할을 요구하는 패러다임의 시대가 아니었으니 굳이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다. 게다가 당시 세리에 A나 이태리의 전술 스타일도 감안해야 한다. 포워드와의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통해 2선 미드필더들의 득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격 전술보다는 수비를 굳건히 하다 상대방에게 볼 탈취 후 카운터 상황에서 미드필더 플레이를 최소화하고 결졍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에 한번에 찔러주는 스타일이 그 당시 비에리의 활동무대를 지배하던 전술적 패러다임이기에 굳이 비에리만 탓할 일은 아니다. 사실 비에리는 미드필더들과의 유기적 관계성을 전제로 하는 원톱보다는 투톱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4. 평가
비에리는 국제대회에서도 그 존재감이 탁월했다. 1990년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파올로 로시 이후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존재감이 취약해서 항상 로베르토 바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등의 판타지스타들이 주목 받았으며 잔루카 비알리 정도를 제외하면 살바토레 스킬라치, 피에르루이지 카시라기, 주세페 시뇨리, 엔리코 키에사 등의 스트라이커들은 국제 무대 기준으로는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 스트라이커들이 당시 세계 최고의 무대였던 세리에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으므로 단순히 존재감이 없다고 함부로 폄훼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결정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는 동시기에 활약했던 필리포 인자기와 비에리였다. 인자기는 57경기 25골, 비에리는 49경기 23골이다.
다만, 성질이 좋지 않아서 구단 프런트와 갈등이 자주 불거져 매년 팀을 갈아치운 저니맨이고, 거기다 몸관리도 열심히 하지 않아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전성기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인테르 시절 연습도 열심히 안하고 호나우두와 클럽만 찾아 다녔다고...
이색 기록으로는 월드컵에서 9경기 9골을 기록한 것을 들 수 있다. 경기당 1골씩 넣은 것인데, 1998 월드컵 카메룬전 2골, 2002 월드컵 에콰도르전 2골 빼면 멀티골도 없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최고 기록은 안정환, 박지성, 손흥민의 3골이다. 반면 또다른 큰 대회인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에는 2000년엔 부상으로 불참했고, 2004년엔 한골도 넣지 못하고 이탈리아가 조별리그 탈락하는 수모를 지켜봐야 했다. 또한 1990년대에 흔히 말하던 '세리에 7공주' 팀들 중 AS 로마와 파르마 FC를 제외한 모든 팀에서 뛴 진기록을 갖고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SS 라치오 (1998~1999)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98
- UEFA 컵 위너스컵: 1998-99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9~2005)
- 코파 이탈리아: 2004-05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U-21 챔피언십: 1994, 1996
5.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실버슈: 1998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8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1998-99
- 세리에 A 득점왕: 2002-03
- 이탈리아 올해의 축구 선수: 1998-99, 2001-02
- 라리가 득점왕: 1997-98
-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1999
- 구에린도르: 2001-02
- ESM 올해의 팀: 1997-98, 2002-03
- FIFA 100: 2004
- FIFA XI: 1999
- 가제타 스포츠상-레전드: 2018
5.3. 출전 기록
6. 여담
- 특이 경력(?)으로는 축구 선수하기 전에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다고 하나[16] 이건 경력이라고 내세우기도 뭐한 게 몇 개월 취미 수준으로 잠깐 했던 수준이고 당시 인터넷을 통해 돌던 복싱 선수 폼의 사진들은 이전에 복싱 선수 역으로 출연했던 영화의 스틸 컷이었다. 오히려 크리켓을 상당히 오래했다는 게 후문.
- 니콜라 아넬카 이전의 희대의 저니맨으로 1억유로가 넘는 총합이적료를 기록하였다. 이적료를 클럽에 안겨준 금액으로는 아넬카를 오히려 능가한다. 한번 이적에 약 2000만 유로 이상이 기본이였으니.
- 은퇴한 후 친구와 함께 헬스 용품, 전동 공구, 주방 용품 등을 판매하는 BFC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 모든 돈을 투자했다. 그런데 파ㅋ산ㅋ 결국 1600만 유로에 상당하는 빚까지 지게 되었고, 결국 코칭 라이선스를 따기 위한 공부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가 중국에서 현역 복귀를 하였다
- 이탈리아인 아니랄까봐(...)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만난 정인영 아나운서를 마음에 들어해서 따로 스튜디오를 찾아 왔다고 한다. 정인영이 보이지 않자 스태프에게 '키 큰 아나운서가 어디 있느냐. 같이 식사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걸 전해들은 정인영 아나운서는 그 상황이 조금 무서웠다고 한다(...)
- 2019년 9월에 스페인 마르카TV와의 인터뷰에서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가 16강전에서 한국에 패해 탈락한 기억을 말했다.#그는 “우리가 이길 기회가 있었지만 월드컵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한국인이라면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에리는 “토티, 말디니, 나를 향한 한국의 파울은 잡지 않았다. 그 경기가 하나의 스캔들이라는 사실은 거기에 있다”고도 했다. 한국에게도 지고 이후 정인영 아나운서에게 데이트 신청 시도했다가 퇴짜도 맞은게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2002년 월드컵이 17년이나 지난 지금도 안좋게 말하고있다.
[1] 뤼트 판 니스텔로이또한 25골로 한시즌만에 피치치를 차지하였지만, 출장수로 보면 판니스텔로이는 더 많은 경기에 출장했다.[2] 여담으로 이 때 비에리에게 밀려 조커에 머물렀던 선수가 K리그 MVP 출신 라데 보그다노비치. 조커임에도 14경기에서 6골을 넣었는데, 이 때 비에리는 워낙 미친 스탯을 찍던 시절이라 결국 주전으로 못 올라서고 네덜란드로 떠난다.[3] 이 기록은 후에 에르난 크레스포, 잔루이지 부폰,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등에 의해 깨졌다.[4] 1위가 콰레스마, 3위가 이전 2년연속 수상의 아드리아누. 그 사이에 끼어있는 크리스티안 비에리(피오렌티나)를 보는 느낌이란 그야말로 세월무상.[5] 첫번째 골은 고난도 오른발 칩샷으로 넣었다.[6] 웃긴건 비에리는 경기내내 '''단 한 번의 경고도 없었다!'''[7] 유니폼을 잡아당겨 체격이 대강 드러났는데....떡대가 장난이 아니다. 드록바가 한수 밀릴거라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것이 아니다. 왼쪽부터 최진철,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비에리, 김태영, 김남일. [8] 사실 홍명보는 비에리처럼 대놓고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에게 상성상 불리하다. 분데스리가에도 알아주는 피지컬 보유자인 차두리로 교체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9] 최진철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비에리가 힘이 장사더라"며 소감을 밝혔다. 근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부분이냐면, 최진철은 본래 에이스 킬러 역할을 도맡아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 땐 은퇴했다 다시 복귀한 몸으로 아데바요르를 지워놓고 쉬운 상대였다고 평했다. 그런 그가 '''현역 때 비에리를 이렇게 평가했다.'''[10] 그랬다면 비에리는 남행열차를 타고 광주에서 스페인과 8강전을 치뤘을 것이다. [11] #[12] 마르첼로 리피가 비에리를 매우 아껴서 폼이 떨어졌음에도 월드컵 엔트리에 무조건 넣으려 했다는 건 꽤 유명한 일화이다.[13] 축구에서 보통 수비수들은 공격수들과의 경합에서 밀리면 유니폼을 잡아 제지하는 변칙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보다시피 비에리는 유니폼을 잡아도 압도적인 힘과 순간 가속력으로 옷을 잡아채는 수비수를 그대로 끌고 가버리는 장면을 수차례나 보여줬다.[14] 근육이 과도하게 붙으면 하체에 무리가 가서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긴 하다. 비에리를 능가하는 근육떡대 마이카 리차즈나 오구치 오니우가 그런 유형. 비에리는 이 둘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나, 이쪽은 근육 이전에 자기관리를 전혀 안 했던 탓이 크다. 비에리의 뛰어난 피지컬은 선천적으로 기골이 장대했던 측면이 컸지, 자기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몸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15] 1997 프레 월드컵에서 브라질 vs 이탈리아의 경기 모습이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의 공격 양상이 비에리가 보조적 역할을 맡고 델피에로가 득점에 치중하는 식으로 흘러간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지만 더 주목해야 할 건 1998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발목잡았던 허접한 수비력이 이때 이미 전조증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브라질 수비진의 화두는 수비 에이스 아우다이르의 파트너를 찾는 것이었는데, 이 경기에서 아우다이르의 파트너로 나온 셀리오 실바의 삽질이 유독 돋보인다. 첫 골 실점 당시를 보면 비에리의 크로스가 워낙 좋아 실점 자체를 막을 순 없었겠지만 혼자 균형을 잃고 넘어진 셀리오 실바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또 브라질 레전드 수비수라는 아우다이르 역시 노쇠화 때문인지 허점을 자주 노출했다.[16] 근래에 많은 축구선수들이 취미삼아 복싱을 즐기기도 하며, 피지컬 훈련용으로 배우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해리 케인, 폴 포그바, 에덴 아자르 등 수준급의 복싱 실력을 지닌 축구선수들이 많다.
분류
- 1973년 출생
- 볼로냐 출신 인물
-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 공격수
- 토리노 FC/은퇴, 이적
- AC 피사/은퇴, 이적
- 라벤나 FC/은퇴, 이적
- 아탈란타 BC/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은퇴, 이적
- SS 라치오/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AS 모나코/은퇴, 이적
- UC 삼프도리아/은퇴, 이적
- ACF 피오렌티나/은퇴, 이적
-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4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