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로 레코바
1. 소개
우루과이 출신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포워드를 소화할 수 있었고 전성기는 인테르에서 보냈다. [1]
2. 클럽
고향팀 다누비오에서 데뷔한 그는 1996년 명문팀 나시오날과 계약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나시오날에서 맹활약을 하며 1997년 강력한 공격진 수집에 열을 올리던 인터밀란으로 이적한다.
레코바는 당시 이미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호나우두와 함께 데뷔전을 치뤘는데, 데뷔전에서 경기종료 10분전 30m가 넘는 거리에서 홀로 2골을 터트리며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룬다. 당시 '''호나우두의 데뷔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데뷔전 이후 시즌동안 적응기를 거치느라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으로 인해 베네치아로 임대를 가게 되었지만 그 곳에서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 친정팀인 인터밀란을 상대로 1골 1어시스트를 [2]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고 이에 시즌이 끝나고 인터밀란은 그를 복귀시킨다.
이후 그는 호나우두나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부상으로 빠질 때마다 공백을 훌륭히 메우며 인터밀란의 에이스 중 한명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후 디다와 함께 위조여권 파문으로 인해 자격정지 처분을 받게 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정지기간이 지나고 복귀한 이후 다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 공격의 핵심역할을 수행하였고 인터밀란은 그를 잡기 위해 당시 세계최고 수준의 연봉을 제시해 재계약을 맺었다.
허나 2003년부터 그는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테크닉과 킥은 여전히 월드클래스였지만, 20대 후반부터 피지컬적인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체력 훈련마저 게을리하기 시작하면서 기량이 빠르게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이후 잦은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전성기만큼 활약하지 못했지만 출전할 때마다 여전한 킥력과 천재성을 보여주며 팀의 2004/2005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2005/2006 리그, 코파 이탈리아 더블, 2006/2007 시즌 리그 우승에 일조한다.
하지만 노쇠화와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더이상 빅클럽 플레이어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2007년 토리노로 임대를 가게 되었고 이후 파니오니오스로 이적한 뒤 다누비오 FC를 거쳐 나시오날로 이적하게 되었다. 나시오날로 이적한 레코바는 2015년까지 활약한 후에 2016년 3월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나시오날에서 함께 뛴 후배 마티아스 베시노가 인테르로 가자 그에게 전화를 하고 조언을 해 주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한다. 실제로 베시노의 인테르행에도 어릴 적 보았던 레코바의 놀라운 퍼포먼스가 큰 영향을 끼쳤다.
3. 국가대표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레코바는 호주와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본선에 올려놓지만 본선 조별리그에서 세네갈의 돌풍으로 인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 2002년 때처럼 호주와 만나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호주에게 패해 탈락하게 된다.
2007년 코파 아메리카를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3]
4. 플레이스타일
데뷔 초 '남미의 지단'이라 불릴만큼 화려한 드리블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테크니션이었으며, 무엇보다 역대 최고의 왼발 스페셜리스트로 꼽힐정도로 왼발 킥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이 킥력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프리킥,중거리슛, 코너킥은 레코바 최고의 무기였다
화려한 드리블, 강하고 정확한 킥, 날카로운 패스뿐만 아니라 민첩한 스피드와 천재적인 센스까지, 모든 면에서 월드클래스의 면모를 보여줬던 전성기의 모습에 당시 축구인들에게 '''마라도나의 '그것'에 가장 근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라고 평가받으며 희대의 재능으로 손꼽혔었지만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오언 하그리브스급의 유리몸이라 그 천재성을 온전히 다 보여주지못한 비운의 선수로 꼽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이 레코바한테 왼발을 준 대신 심장을 주지 않았다.'''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타고난 체력이 굉장히 약했고, 잦은 부상 이전에도 체력 문제로 기복이 심했으며 여러 번의 부상 이후에는 더 악화되었다.
5. 여담
- 당시 축구팬들에게 동양적인 외모로 인해 '엘 치노 (중국인)' (El Chino)라고 불리기도 했었다.[4]
[1] 우루과이 내에서 인테르의 인기가 높아지게 만든 선수이다. 실제로 후배들인 디에고 고딘과 마티아스 베시노의 이적에 그가 큰 영향을 줬다.[2] 공식적으로 어시스트는 기록되지 않았다[3] 이후에는 에딘손 카바니, 루이스 수아레스의 등장과 함께 디에고 포를란이 전방과 플레이메이커를 오가며 우루과이의 부흥을 이끌어냈다.[4] 이탈리아와 같이 인종차별이 심한 유럽 국가에서는 동양인처럼 생겼으면 무조건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말해주고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라고 해도 그러니 당사자는 불쾌하다. 저렇게 사람을 부르는 유럽인들은 악의가 없었다고 해도 당사자는 불쾌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니거, 한국에서 흑형과 비슷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