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친토 파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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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레프트백이다.
니우통 산투스와 더불어 현대 풀백의 조상이자,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프트백으로도 손꼽힌다.[1] 풀백의 오버래핑을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축구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에 일조했다.[2]
60년대 인터 밀란의 전성기를 이끈 핵심 멤버였으며,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11년 동안 주장으로 활약하며 유로 1968 우승 및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인테르의 부회장, 회장을 차례대로 역임하였다.
현재 인터 밀란의 영구결번인 3번과 4번 중 3번의 주인이다.[3]
2. 상세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이자 1960년대 세계 최고의 풀백이었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전설적인 레프트백이며, 인테르에서만 629경기에 출전해서 '''75골'''을 넣었다.[4]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20년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아주리에게 주장으로서 최초의 앙리들로네를 선물했으며, 인테르에서도 주장으로서 유러피언컵[5] 2연패를 이끌었다. 이러한 가시시적인 성과로 수페르가의 비극 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현대 이탈리아 축구에서 최초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 선수다. 물론 수페르가의 비극 후에 8년간 주장을 역임한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같은 선수도 있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인해 성과가 미미했다, 반면에 파게티는 이탈리아 축구가 다시금 강호로 떠오르던 시기에 무려 11년간 주장을 역임하면서 유로 우승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며 이탈리아 주장 완장에 카리스마를 부여하였고, 이는 디노 조프, 마르코 타르델리, 가에타노 시레아, 안토니오 카브리니, 주세페 베르고미,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잔루이지 부폰, 지금의 조르조 키엘리니로 내려온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파케티는 이탈리아 베르가모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지역팀에서 축구를 시작한다. 그의 강력한 슈팅과 큰 키와 피지컬은 공격수로 딱이었다. 때문에 그는 유소년팀에서 공격수로 활약한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수비력을 발견하게 되고 수비수로 전향한다. 아마도 그의 공격형 풀백은 공격수 출신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1960-61 시즌을 프로 데뷔해 인테르에서 뛰게 된다.
산드로 마촐라가 입단한 시즌에 인테르에는 엘레니오 에레라감독이 인테르로 부임했다. 1960-61시즌과 1961-62시즌 모두 인테르는 리그에서 3위, 2위를 기록하며 무관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냈다. 아쉬운 성적을 냈다. 파케티는 이 때까지 주전이 아니었다. 어쨌든 에레라는 이 두 시즌 동안 화끈한 공격 축구라는 컨셉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계속 된 무관에 당시 안젤로 모라티 구단주는 다음시즌까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경질시키겠다고 말한다. 에레라는 머리를 굴려 그 전 밀란의 로코 감독이 만든 카테나치오를 변형해내 혁명적인 전술을 만들어냈다. 왼쪽 수비수 파케티에게는 수비보다는 공격의 역할을 맡기며 윙백으로 뛰었으며 4백과 5백을 오가는 수비라인, 오른쪽의 빈 공간을 커버하기 위해 라이트윙 자이르에게는 '토르난테'라는 귀환자라는 뜻의 롤을 부여하며 강력한 수비가담을 요구했다. 또 주장이었던 피치는 이탈리안 리베로로 최후방에서 수비라인을 잘 조율해냈다. 이 전술로 인테르는 '그란데 인테르'라고 불리며 1960년대의 세리에 A를 넘어 유럽을 호령하게 된다.
그의 강력한 공격력은 먹힐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의 풀백의 역할은 정말 측면만 막는 수비수였다. 그런데 이런 파케티의 움직임은 유럽과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어쨌든 카테나치오를 쓰며 인테르는 승승장구했고 62-63시즌, 스쿠데토를 들어올리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인테르는 다음 63-64시즌에는 유로피언컵 결승까지 진출한다. 결승상대는 당대 최고의 클럽 레알 마드리드 CF였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황혼을 불태울시기였다. 그러나 산드로 마촐라의 맹활약으로 팀은 3-1로 승리한다. 이것은 팀의 첫 빅 이어였다. 다음 시즌에는 다시 리그 우승을 들어올렸고 또 이 시즌에도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하는데 상대는 에우제비우와 마리우 콜루나의 SL 벤피카. 그래도 경기는 인테르의 1-0 승리로 끝나며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한다. 또 그 해 파케티는 에우제비우의 뒤를 이어 발롱도르 2위에도 오른다. 1965-66 시즌에는 세번째 스쿠데토를 다시 들어올렸고 1966-67 시즌에는 다시 유로피언컵 결승에 오르지만 지미 존스톤의 셀틱에게 패배한다. 에레라는 이 때를 마지막으로 인테르를 떠나고, 파케티는 이 때부터 피치의 주장 완장을 이어받고 계속 활약한다. 이 후 코파 이탈리아,세리에 A 우승, 유러피언컵 준우승 등 에레라 없이도 호성적을 냈고 본인은 커리어를 모두 인테르에서만 보내며 1978년 현역은퇴를 선언한다.
3.2. 국가대표 경력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부진에 이탈리아 팬들은 기대를 잃어갔지만 자국에서 열린 UEFA 유로 1968에서 이탈리아는 부활을 알린다. 세리에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카테나치오를 국대에서도 잘 적용해 수비축구를 펼친 그들은 유로 본선에 진출한다. 파케티는 주장완장을 차고 수비를 이끌었고, 4강전에서 이탈리아는 소련을 만났다. 경기는 0-0 무승부, 이탈리아로서는 최고의 스코어였다. 당시는 승부차기가 없어서 동전던지기로 승부를 냈는데 소련의 주장인 셰스테르뇨프가 잘못 말해서 이탈리아가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드라간 자이치의 유고슬라비아를 만났지만 루이지 리바와 아나스타시의 골로 앙리 들로네를 들어올린다. 파케티는 대회 내내 맹활약하며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그리고 2년 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그러나 이탈리아 국대는 고민이 컸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산드로 마촐라와 잔니 리베라라는 두명의 플레이메이커가 있었고 이들을 공존시킬 방법을 찾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전반전 마촐라 출전,후반전 리베라 출전이었다. 거기다 1970 월드컵은 교체 제도가 처음 도입된 대회였다. 1차 조별예선에서 이탈리아는 이스라엘, 우루과이, 스웨덴과 함께 같은 조가 되었는데 이 조의 모든팀이 수비 전술을 펼치며 이탈리아가 단 1골을 넣고 1승 2무로 8강에 진출한다. 8강 상대는 개최국 멕시코였고 4-1로 박살내고 4강에 진출다. 그리고 4강에서는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과 다시는 나오지 않을 만한 명경기를 펼친다. 이탈리아는 일찍이 선제골을 넣지만 경기 종료 5분전 카를하인츠 슈넬링어의 동점골로 연장전으로 흐른다. 연장전 5분 서독의 뮐러가 역전골. 3분 뒤 이탈리아 부르니치의 재동점골. 6분 뒤 루이지 리바의 재역전골, 연장전반 종료. 연장후반 5분 게르트 뮐러의 재동점골, 하지만 곧바로 1분 뒤 잔니 리베라의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골. 9분 뒤 경기종료. 보다시피 연장전 30분 동안 무려 다섯 골이, 그것도 역전-재동점-재역전-재재동점-추가골로 이어지는 명승부였다. 그렇게 오른 결승의 상대는 브라질.
세계 최고의 창과 방패가 맞붙는 경기였는데 브라질과의 경기 역시 승리는 더욱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통산 3번째 우승을 하는 국가가 줄리메컵을 영구히 가져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브라질의 4대1 대승이었다.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는 브라질의 스위칭을 이용한 공격축구와 양쪽 풀백의 오버랩 등 유기적인 공격적 움직임에 무너지고 만다. 카테나치오는 제한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브라질에게 계속 기회를 내주게 되는데 이 때 리베라는 지난 4강 연장까지 뛰었던 것을 감안해 후보로 시작하고 마촐라가 주전으로 나왔는데, 마촐라는 너무나도 부진했고, 결국 4:1로 패해 준우승에 그친다. 파케티는 그래도 활약하며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이후 1974 서독 월드컵이 끝난 후 1977년에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4. 플레이 스타일
풀백의 오버래핑이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선보인 선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유소년팀에서 공격수로 활약한 적이 있다보니, 그의 공격형 풀백은 어쩌면 그가 공격수 출신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에레라 감독은 파케티에게 수비보다는 공격의 역할을 맡기며 윙백으로 뛰게 됐는데, 이런 풀백의 공격적인 움직임은 많은 팀들에게 먹힐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의 풀백은 말그대로 측면을 막는 것만 하는 수비수였기 때문에,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다. 참고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백인 프란츠 베켄바워가 파케티의 플레이를 보고 '센터백도 저런 오버래핑을 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피치 위에서 몸소 실현한 바가 있다.[6]
파케티의 키는 무려 190cm에 다다른다. 당시로써는 엄청난 키로 그 키를 이용한 제공권을 지배하는데도 아주 능했다. 또 그 피지컬을 이용한 수비로 상대를 무너트리는것도 아주 잘했고 스피드도 굉장히 빨랐다.[7] 태클능력도 정확해서 공격수와의 1:1 대결에서도 쉽게 지지 않았다. 이런 거대한 몸에도 깔끔한 수비를 펼쳤는데 그 말디니의 선수시절 퇴장이 2번이고, 사네티가 선수시절 퇴장이 1번인데 파케티는 아예 없다. 파케티는 성격이 차가우면서도 카리스마있으며 팀의 수비를 이끄는 리더십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스타일의 꽃이라면 역시 잘 알고있듯이 공격일것이다. 타이밍만 난다면 볼을 잡고 빠르게 치고 올라가 상대 측면에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구사했다. 또 페널티 박스 앞까지 들어가 골로 직접 연결시키기도 했다. 킥 능력이 아주 좋아 롱패스도 뛰어났지만 슈팅능력은 대포알과 같았는데 중거리슛을 잘하지는 않았어도 가까운 거리에서 차면 골키퍼가 손도 못대게 빨려 들어갔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 발롱도르 2위: 1965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7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68
- FIFA 100: 2004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FIFA 회장상: 2006
- 골든풋: 2006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5
-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2019
6. 여담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들 중에서도 최장 기간 동안 주장직을 역임했다. (11년)
- 은퇴 후에는 인테르의 기술 고문 등 프런트로 일했으며 2004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2006년 췌장암으로 죽을 때까지 역임했다.
- 그의 사후, 등번호였던 3번은 인테르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는데 형제 구단이며 라이벌 구단인 AC 밀란의 등번호 3번 역시 레전드 파올로 말디니의 은퇴 이후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같은 레프트 백 출신이며 프로구단 원클럽맨이다.[8]
[1] 물론 대부분의 매체에서 역대 베스트11을 뽑을 때는 레프트백 자리는 파올로 말디니를 고정적으로 박고 가는 것이 대부분이나,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파케티를 말디니보다 더 위로 평가하기도 한다고 한다.[2] 대표적인 예가 '공격하는 수비수'로 그와 비슷한 시대에 활약했던 프란츠 베켄바워가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공격하는 센터백'이라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다.[3] 파케티의 사후인 2006년에 지정되었다.[4] 리그 경기에서만 476경기에 '''59골''',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백으로 평가받는 파올로 말디니가 리그 647경기에 출전해서 29골을 넣고, 골 넣는 수비수로 유명한 로랑 블랑 역시 602경기에 출전해서 125골을 넣은 것을 감안하면, 당시 수비수로서 최고의 득점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5]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신[6]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는 엄청난 전설이 되었다. 이것이 독일식 리베로의 생성 과정이다.[7] 100m를 11초에 주파했다 카더라.[8] 다만 말디니는 유스팀까지 AC 밀란이지만 파케티는 유스팀이 인테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