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애닝
[clearfix]
1. 개요
메리 애닝은 영국의 화석 수집가이자 고생물학자이다.
2. 생애
잉글랜드 남부 도싯 주의 라임 리지스에 있는 영국 해협을 마주한 절벽에서 이크티오사우루스 등 쥐라기 해양 생물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애닝의 발견은 당시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고생물과 지질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의 오빠 조지프가 이크티오사우루스의 두개골[1] 을 발견하였고 메리는 1년뒤 나머지 골격을 찾아 수집가에게 약 23파운드에 판매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그녀는 불과 십대초반이었다. 해당 화석은 5년뒤 대영박물관이 45파운드에 사들였다.
그녀는 이 외에도 최초로 어룡의 골격을 발견하고 정립하였으며, 거의 완벽한 두 개의 수장룡 골격도 발견하였다. 독일로 가서 진행한 조사에서는 익룡 화석과 중요한 어류 화석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당시 위석으로 잘못 알려져 있던 분석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애닝은 또한 오징어와 같이 먹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두족류인 벨렘나이트 화석을 발견하였고, 지질학자인 헨리 드라베시는 최초의 고생물 복원도인 《두리아 안티퀴오르》(Duria Antiquior, 도싯의 고생물)를 그리면서 애닝의 화석 수집품을 기초로 삼았다. 드라베시는 그림 판매 수익을 애닝과 나누었다.
애닝은 블루 라이어스 절벽에서 화석을 채집하였다. 특히 겨울철 절벽에서 사태가 나면 새롭게 화석이 드러났는데, 애닝은 화석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수집하였다. 1833년에는 절벽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애견 트레이를 덮쳤고 애닝 스스로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5년 후에는 그녀가 평생 저축한 200파운드 정도의 금액을 어느 사람에게 투자했지만 그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파산하는등 불운이 겹쳤었다. 다행히 그녀와 연이 있던 고생물학자이자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윌리엄 버클랜드(Wiliam Buckland)[2] 가 그녀가 재정적으로 안정을 찾을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애닝이 지질학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달라고 영국 정부를 설득하였고, 덕분에 그녀는 연간 25파운드의 왕실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후 1846년, 런던지질학회는 애닝이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회원들이 갹출하여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애닝은 투병 끝에 1847년 3월 9일 47세의 나이로 죽어, 세인트 마이클 성공회 교회 묘지에 묻혔다. 지질학회의 기금은 애닝의 공로를 기념하여 새로 개장한 도싯 카운티 박물관의 설립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3. 차별
가구를 만들던 목수였던 아버지가 11살 때 사망한 이후 애닝은 가난한 가족들과 함께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또한 메리의 부모님은 국교회[3] 신자가 아니라 회중교회[4] 신자였다. 국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차별이 있던 당시 영국에서 자연스레 메리도 비(非)국교회 신자였던 것이다.[5] 애닝은 이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계를 걱정하며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영국은 1828년 비국교도의 차별을 철폐하는 심사법을 제정했으나 사회에서는 아직도 차별이 만연했던 것이었다.
대부분 국교회에 소속된 젠틀맨들로만 구성되었던 19세기 영국 과학계는, 비(非)국교회 신자이며 여성인 애닝을 그들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애닝은 화석 수집가로서 영국 뿐 아니라, 유럽대륙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음에도 이런 이유로 런던 지질학회에 가입할 수 없었고, 그녀가 이룬 업적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6]
그녀가 남긴 한 편지에서 당시 그녀가 당했던 차별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메리 애닝이 생전에 과학 저술에서 언급된 것은 단 한 차례였는데, 그것도 애닝이 발견한 사실을 실은 게 아니라, 1839년 《저널 오브 내츄럴 히스토리》가 자신들이 출간한 논문에 의문을 제기한 애닝의 주장을 실은 것이었다.세상은 제게 너무나 불친절합니다. 저는 그 때문에 모두에게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여져지고 있어요.
4. 기타
애닝이 사망한 후 그녀의 굴곡진 생애는 급작스레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찰스 디킨스는 1865년 문학 잡지 《그 해 내내》(All The Year Round)에 기고한 글에서 "목수의 딸은 스스로 명성을 쌓았고 그 명성에 걸맞았다"고 추도하였다. 1908년 테리 설리번은 "그녀는 해변가의 조개껍질을 팔았지."(She sells seashells on the seashore)라는 잰말 놀이를 내놓았다. 2010년 왕립학회는 애닝의 사망 163년만에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녀를 꼽았다.
본래 종교는 기독교 및 회중교회 소속이었으나 후에 성공회로 바꿨다.
1850년 지질학회가 애닝을 기념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세인트 마이클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스테인드글래스 밑에는 "이 창문은 1847년 3월 9일 죽은 이 교구의 메리 애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런던 지질학회 여러 회원의 대리자로서 지질 과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을 뿐만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신실한 삶을 살았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ABE 전집의 '바닷가 보물'이라는 책이 매리 애닝의 소녀 시절 이크티오사우루스의 발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만화로 알아보는! Fate/Grand Order에 등장하는 랜서(만화로 알아보는! FGO)의 정체가 메리 애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특히 그녀가 맨 처음 발견한 두 화석인 이크티오사우루스와 플레시오사우루스를 무기로 사용, 고유능력 중 화석부인의 대발견, 강아지 있음 등 때문에 매리 애닝 설이 더욱 힘을 얻었다.
2020년작 영화 암모나이트가 그녀의 장년기 삶을 다루고 있다. 케이트 윈슬렛이 그녀를 연기했다.
[1] 참고로 현재는 템노돈토사우루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2] 그의 아들이 루이 14세의 심장을 요리해서 먹은 유명한 괴식가 프랭크 버클랜드다.[3] 현재 성공회의 전신(前身)[4] 현재 침례교회의 전신(前身)[5] 종교가 달라도 큰 문제 없이 관용하며 사는 현재의 눈으로는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교파에 의해 차별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당시 유럽은 자신이 소속된 교파가 민족이나 국적만큼이나 자기 정체성에 깊이 관여되던 시대였다. 물론 차별을 한다는 자체는 당연히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당시는 교파가 다르다는 것이 그런 요인이 되는 시대였다.[6] 이후 메리 애닝은 국교회(성공회)로 교파를 옮겼으며, 사망하기 몇달 전에야 런던지질학회에 가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