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1. 단어
1 .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
2. 유쾌하고 활발함.
2. 신라 승려
(?~?)
신라 문무왕 시대의 승려.
선덕여왕 시대에 중국 당나라를 여행하다가 귀국하여 진언종의 별파인 신인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궁에서 문두루 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일종의 밀교 의식을 배워왔고, 천존의 천거로 이를 이용해 670년과 671년 나당전쟁에서 술법으로 풍랑을 일으켜 두 차례나 당의 함대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천존의 천거로 문무왕에게 불려 간 명랑은 낭산 남쪽의 신유림이라는 곳에 절을 지어서 도량을 세우면 된다고 아뢰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정주(貞州)[1] 에서 '''무수한 당의 수군이 신라 국경 가까운 바닷가까지 돌아다니고 있다'''는 보고를 보내왔고, 절을 지을 겨를이 없자 명랑은 비단을 모아서 임시로 천막처럼 절을 지어서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고 열두 명의 고승들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설해, 신라군이 당병과 교전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서 당군의 배가 모조리 침몰되었다고 한다. 이후 명랑이 임시로 절을 짓고 문두루비법을 행했던 곳에 정식으로 절을 지은 것이 사천왕사였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671년 1월 신라가 당주(幢主) 부과(夫果)에게 백제(웅진도독부) 변방의 벼를 짓밟게 해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고[2] 웅진도독부를 구원하러 온 말갈인 군대가[3] 설구성(舌口城)을 포위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려는 것을 신라군이 병사를 내어 격파하고 3백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당의 수군을 막기 위해 대아찬 진공 등을 보내 옹포(甕浦)[4] 를 지키게 했다. 6월 석성 전투에서도 신라군은 당나라 군사[5] 5,300명의 목을 베고 백제계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고[6] 장군 죽지를 보내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는 등 당군의 군량미를 소모하는 전략을 계속했다. 당의 총관 설인귀와 신라의 문무왕이 서로를 비난하는 내용의 국서를 주고 받은 것이 이후의 일로, 설인귀에게 편지를 보낸 직후 신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한다. 신라군이 당군을 몰아내고 옛 백제 영토를 많이 점령했다는 뜻이다. 10월에는 황해를 건너오던 당의 수송선 70여척을 쳐부수고 당의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1백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삼국유사에 실린 명랑의 일화는 이때와 같은 시기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670년과 671년에 신라를 공격하려 했던 당의 수군 장수의 이름이 각기 설방과 조헌으로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은 중국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당시 태풍에 카미카제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실제로 폭풍으로 좌초한 일화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는 게, 현령곽군묘지명(縣令郭君墓誌銘)[7] 에 따르면 곽행절(郭行節)이 '''671년 나당전쟁에 참전했다가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익사했다'''고 되어있어 실제로 폭풍이 불었던 것 같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처럼 실제로 폭풍으로 좌초한 일화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다.
3. 포켓몬스터의 성격
특공이 0.9배로 하락하는 대신, 스피드가 1.1배로 상승하는 성격, 스피드가 중요한 물리형 어태커들이 애용하는 성격이다.
[1]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지역.[2] 삼국사기 취도 열전. 이 전투의 승패는 기록에 없지만 부과가 용감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싸워 전사했다는 것으로 봐선 신라군이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3] 아마도 당측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당나라의 본토 군대를 보내기 전에 미리 요동 지역의 말갈군을 해로를 통해 보낸 것으로 보인다(이상훈).[4]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양성읍 청북면에 있었던 독개나루로 조선 시대까지 조세 운반 창구로 쓰였다.[5] 황해 바다를 건너온 설인귀의 계림도행군 군사로 추정된다.[6] 당의 1개 행군이 1만~1만 2,500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당군은 이 전투로 큰 피해를 입고 방어는 몰라도 공세는 더 이상 힘든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7] 중국 낙양의 낙양고대예술관에 소장된 금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