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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靺鞨 7부(자세한 위치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림)
1. 만주 지역의 퉁구스 계통 종족
1.1. 개요
과거 만주 동부 지역과 연해주 일부, 한반도 북부 일대에 거주했던, 계통상 현재 만주족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퉁구스 계통의 어로, 수렵채집+유목 생활을 한 종족.[1]
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의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으며, 남북조시대 후위 때는 물길, 그리고 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었다. 이 말갈이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 때부터 여진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외부의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대 발음은 중고한어 기준으로 '모트기트', '마트카트'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의 '기트' 혹은 '카트'는 튀르크계 언어로 '돌'을 뜻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갈족 문서를 참고할 것.
말갈이란 스스로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당이나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중심의 시각으로 고구려 변방인들을 멸시해서 이민족으로 부른 종족명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 측의 신당서에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이 구절을 가장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대조영 가문이 말갈족 출신이라는 의미지만 다른 의미로 해석해보려는 시도 중 하나인 것이다.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주로 수도중심으로 고구려의 평양 사람의 입장에서 동쪽 변방 시골사람들을 이민족처럼 말갈로 불렀다는 견해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말갈은 촌놈과 같은 뜻이었다고 보면 된다. 현재 우리가 시골 사람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촌놈이라 부르는 걸 고구려 시대엔 말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대조영이 속말말갈이란 것도 그가 고구려 속말부[2] 출신 촌놈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속말말갈로 불리는 이들도 고구려인이었고 훗날 발해인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말갈 7부 중 하나인 속말부는 강한 병사가 수천 명이고, 날랜 무사도 많아, 매번 고구려를 노략질하였다고 전하며, 궐계부의 만돌[3] 을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의 소부 8부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수나라로 귀순한 사례가 있다. 결정적으로 물길-말갈의 독자적인 외교가 기록에 남아있는 이상 말갈을 촌놈과 이음동의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또한 만일 말갈이 고구려의 촌놈이라고 보자면 중국 정사서의 외국전에서 고구려전의 일부 내용으로서 말갈이 등장해야 하는데, 고구려전과 말갈전(혹은 물길전 등)이 따로따로 등장한다. 즉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말갈을 완전히 다른 세력으로 보았던 것. 만일 말갈이 고구려 촌놈이라면 그렇게 기록했을리가 만무하다. 이러한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말갈족들과 고구려의 예맥족은 기본적으로 이질적인 민족이지만 고구려가 제국을 형성해 말갈을 복속시키면서 고구려에 동화시킨 말갈족과 동화에 실패한 말갈족들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4]
말갈의 용법을 종합해보면, 전통적인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하는 족명, 초기 백제를 침공했던 집단의 명칭[5] ,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회피하기 위한 멸칭 등이 있다.
거의 퉁구스족들이 많았지만 극소수로는 니브흐[6] 처럼 고아시아계 또는 비 퉁구스계 민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퉁구스인 말갈에게 동화된 부족들도 있었다.
1.2. 말갈족의 역사
최초 사료에 등장하는 이름은 '숙신'이다. 식신 혹은 직신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는데, 이후 전한시대 때는 읍루로 불리다가 수당시기에는 말갈로 불렸다. 말갈족은 7개의 유력한 부족이 있었는데, 우선 주로 지린성 일대에서 거주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 있다. 이들은 생활 방식이 고구려 및 부여와 비슷한데, 애초에 거주하는 지역 자체가 고구려와 부여처럼 반농반목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백산말갈이나 속말말갈은 환경 자체가 예맥인들과 똑같기에 종족은 유지하되,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심지어 속말부는 아예 주도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기까지 했다. 이는 이후 흑수말갈의 후신인 완안부가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금나라라는 새로운 여진족의 제국을 세운 것과는 매우 비교되는 사례로서, 이미 이 두 부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갈인'인 동시에 '고구려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사료에 나오는 발해의 말갈 부락들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들은 대부분 서쪽의 길림성 지방 출신인 속말말갈인들과 토착 고구려인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남쪽의 신라와 고려로 유민이 유입될 때 예맥계와 함께 유입되었다가 이후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7]
'''흑수말갈'''을 비롯한 기타 퉁구스계 말갈족들은 흑룡강성,혹은 연해주 일대에서 거주하던 민족으로 위의 두 말갈 부족과는 매우 이질적인 부족이었다. 흑룡강 일대는 환경 자체가 남쪽의 길림성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척박한 지역이었므로 매우 거칠고 유목민족의 특성을 강하게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에게 정복되거나 복속되었을지언정 끝까지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다. 고구려 때도 반 복속상태로 있었고, 발해 때도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견제를 했지만 발해 선왕시기에 결국 모두 제압당하고 복속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허무하게 멸망하면서, 발해 유민들을 몰아내거나 흡수시켜서 점차 만주의 주인이 되어 여진족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1.3. 말갈에서 여진족으로
발해의 멸망 후 여진족으로 명칭이 바뀌어서 거란에 복속한 숙(熟)여진과 그렇지 않은 생(生)여진으로 구분되어 지냈다.[8][9] 그러나 거란의 요나라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대해 완전한 지배를 이룩하진 못했고,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 영가, 우야소 등의 추장이 등장하여 부족 단위를 국가 형태로 통합해가면서 주변국과 긴장 구도를 이루었다.
이에 윤관과 척준경 등이 별무반을 중심으로 이들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확보하기도 하였으나, 1115년 정월 완안아골타 아래 규합하여 금나라를 일구어낸 후 신속하게 요를 갈아마시고 화북 지방까지 차지하였다. 그 뒤로는 고려도 이자겸의 주도하에 이들의 조공 체계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동안 잘 나갔지만 어느 날 '''웬 인간병기들이 몰려와서''' 망했어요(...). 이후 분열되어 원나라 붕괴 후엔 조선과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부족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금나라가 된 말갈 7부는 몽골에게 거의 모두 죽고, 7개의 말갈 부족은 소멸하고 그저 지명으로만 남게 된다.
1.4. 후금, 청나라를 거쳐 만주족으로
조선과 명나라 두 나라의 힘이 약해진 16세기 말~17세기 초가 되자 여진족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을 자칭하며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후 청나라를 세워 만주족으로 종족의 이름을 바꾼다. 이후 중국 대륙의 내전을 틈타 명나라 잔존 세력을 몰아내고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한족에 대한 개방 정책을 펴면서 서서히 고유 문화를 잃어갔고, 청이 멸망하고 만주에 대한 주도권도 많이 빼앗긴 현대에 와서는 종족(만주족)과 언어(만주어)의 존망을 논해야 할 단계에 처해 있다.
만주족 외에는 러시아 극동의 소수민족인 우데게족(Удэгейцы)과 나나이족(Нанайцы)이 이들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다. EBS의 '발해여말갈'이란 다큐멘터리에선 나나이족 인물이 등장해 발해와 말갈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발해시조 고왕(대조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도 한다.
1.5. 한국과의 관계
고구려와 발해의 인구 상당수를 차지하는 민족으로, 북한산성 전투의 말갈인 지휘관 생해(生偕)처럼 기록에 남아있는 자도 있으나 그 외에도 역사상 기록된 여러 '고구려인'들 중 종족 출신이 명시되지 않은 인물들 중에서 일부는 말갈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남진과 더불어 함께 나타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주에 살던 말갈족을 고구려가 징병해서 남진에 동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하게 예인(동예)을 백제와의 싸움에 동원하기도 했다(독성산성 전투). 심지어 의자왕 때도 여-제의 신라 공동 공격에 말갈이 가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고구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구려 멸망 후 일부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흘러들어가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나당전쟁 종료 직후인 677년 11월 신라 사신 김청평이 7명의 숙신 사람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온 기록이 나오는데, 시기와 정세상 고구려 치하에 있다가 멸망 후 고구려인들을 따라서 신라로 귀순한 보덕국 소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일신라의 수도권을 방어하는 부대인 9서당에 대한 기록을 보면 9서당 중 흑금서당 부대는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한 사례에서, 고구려인 인구를 흡수한 통일신라의 인구구성 중 일부는 말갈인이 차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신라, 그리고 영역을 이어받은 고려왕조 영토 내부(특히 중ㆍ남부)에 퉁구스계 집단이 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어, 오래 못가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심지어 아예 고구려화된 말갈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복원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논쟁이 많은데, 사실 대조영이나 발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외국 학자들은 고구려화된 말갈인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꽤 많은 편이다.[10] 반면에 아무르강과 연해주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을 비롯한 상당수 다른 말갈 부족들은 복속과 이탈을 계속 반복한 것으로 보아 끝끝내 동화되지는 않은 듯하다. 즉, 말갈족들은 의식적으로 고구려인에 일부 동화된 말갈 부족(속말부, 백산부)들과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 동화되지 않은 말갈(흑수부, 철리부, 월희부 등) 부족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과 달리 한반도 중부의 말갈은 진짜 말갈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위말갈 참조.
1.6. 기록에 등장하는 말갈 부족 목록
1.7. 말갈족 인물
2. 한반도 말갈(위말갈 혹은 가짜말갈)
[1] 말갈이라 불렸을 때까지는 유목(혹은 반유목)도 했으며, 여진이라 불릴 때에는 유목을 반쯤 끊었지만 목축과 유량 생활을 하기도 하는 부족들도 있었다.[2] 송화강 북쪽 지류인 속말수 일대에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일대를 말한다.[3] 만돌이 죽자 그 동생 돌지계가 연맹을 이끌었다.[4] 원래 제국의 형성과 복속, 지배 및 동화정책 등이 이런 양상을 보인다.[5] 이들은 가짜 말갈, 즉 위말갈로서 실제로는 예계 집단이라는 견해가 정약용으로부터 처음 제기됐다. 그러나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한다는 견해도 있다. 권오중(전 영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는자신의 저서인 《낙랑 역사의 전개와 백제》에서 낙랑군이 말갈을 조종해서 백제를 공격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놓았다.[6] 니브흐어 참고.[7] 삼국사기 무관지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683년에 말갈인으로만 구성된 부대인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만들기도 했으며, 훗날 조선시대에 백정으로 바꿔 부르게 되는 고려시대의 양수척 중 상당수는 남하해 유입된 말갈/여진인의 후예로 보고 있다.[8] 이 시기에 고려와 거란의 대립 틈에 끼여 그야말로 영역의 대부분이 갈려나가는 큰 참화를 입었다. 강동6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수의 여진 유민들이 발생했다. 오죽하면 여진족들이 거란에 자신들을 침략하는 고려를 공격해달라 청원했을 정도.[9] 그리고 한반도 내의 말갈 세력 중 일부는 왕건이 보낸 유금필에 의해 복속되어 일리천 전투 때 만 명에 가까운 기병 부대를 이끌고 공을 세우기도 했다.[10] 예를 들자면 대영제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영국으로 귀화하게 된 영국령 인도 출신의 인도계 영국인에 비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