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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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南齊)의 제5대 황제.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명황제(明皇帝). 휘는 란(鸞). 자는 경서, 아명은 현도(玄度). 재위 5년 동안은 건무(建武), 마지막 1년 동안에는 영태(永泰)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송나라 원가 29년(452년)에 태어났으며, 시안정왕 소도생(蕭道生)[1] 과 강씨(江氏)[2] 의 차남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소도성의 보살핌을 받았다. 원래 송나라 시대에 회남군, 선성군 태수에 임명되었고 보국장군 시절에는 재능과 엄격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소도성이 즉위하자 서창후(西昌侯), 영주 자사(郢州刺史)가 되었으며 사촌형 소색이 즉위하자 시중, 효기 장군이 되었으며 상서좌복야를 거쳤다. 제 무제 소색은 죽기 전에 그를 시중, 상서령에 봉하고 장손 소소업을 보좌하게 했다.
2.2. 황제를 죽이고 실권을 손에 넣다
소소업이 황음무도해서 겉으로는 여러차례 간언을 했지만 적극적으로는 행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황제의 향락을 방조하였다. 은근히 야심이 있어서 암군이 즉위한 틈을 타 황제 자리를 노린 것이다. 이에 소소업은 간언이 지겨웠는지, 아니면 소란의 야심을 알아챘는지 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의심해서 토벌하려고 했다.
융창 원년(494년) 7월, 소소업이 망설이는 사이 먼저 선수를 쳐서 군대를 이끌고 입궁하여 황제의 측근인 직각장군 조도강, 중서사인 주륭지 등을 죽이고, 수창전에 들어가 소소업을 죽였다. 소란은 소소업의 아우 소소문을 즉위시키고, 대권을 장악하여 표기대장군, 녹상서사, 양주자사, 선성공이 되었다.
2.3. 황제를 죽이고 찬탈하다
소란은 10월 선성왕으로 승진하였고, 이미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친당을 조직했다. 자기 형 소봉의 장남 시안왕 소요광을 남군태수로 봉하고, 그의 아우 소요흔을 연주 자사에 임명했다. 이에 파양왕 소장은 수왕 소자륭과 난을 일으켜 소란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제거되었고 진앙왕 소자무도 난을 일으켰다가 제거되었다. 안륙왕 소가경, 남평왕 소예 등 9명의 종친을 죽이는 골육상잔을 저질렀다.
같은 달에 소소문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11월에는 어의를 시켜 소소문을 시해했다. 12월에 북위(北魏)가 소란이 스스로 즉위하여 인심이 흔들리자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왔다. 그러나 495년 3월, 북위는 수양, 종리에서 패하고 후퇴했다.
2.4. 의심으로 제나라의 명맥을 끊다
제 명제 소란은 능력이 있었고 검소해서 무제 소색과 울림왕 소소업이 백성들에게 수탈한 땅을 돌려주고, 궁궐과 기물을 장식한 금은과 보석을 거두어서 국고에 넣었다. 먹는 음식도 절약했다. 그러나 4년 만에 승하하게 되었고, 그의 승하 후 제나라는 4년 만에 망하게 된다.
나름대로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명제 소란이 제나라의 결정적인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은 바로 의심병이었다. 명제 소란은 즉위 이래로 의심이 더욱 많아져 권력을 독점했으며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보고받고 처리했다. 군현과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는 물론, 심지어 지방에까지 심복(주사)을 보내 소씨 황족과 관리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궁전 깊은 곳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줄였다. "여러 주의 일은 주사에게 듣고, 자사에게는 듣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의 남조 귀족 사회에서 이런 행보는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렇게 황족들에 대한 의심병이 심했던 이유는 명제 소란은 계승법상 순서를 받기 힘든 방계 황족이라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방계로 대를 이었다고 불리는 왕들은 대부분 바로 이전의 직계가 아닐뿐 몇대 전 왕의 후손이었고, 남은 방계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이런 경우 정통성에 큰 문제가 없다.[3] 하지만 소란의 경우 애초에 개국 군주인 소도성의 후손이 아닌 그의 형인 소도생의 후손이기에 정통성에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었다. 건국 군주의 직계 후손이 살아있다면 그들이 대를 잇는게 당연시되었고 그의 후손이 아닌 방계 출신이 차지하는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조선으로 치면 이성계의 자손들이 살아있음에도 이성계의 형제인 이화의 아들이 왕위를 차지한 꼴이다. 건국 군주가 자기 위의 6대 조상까지를 추존하긴 하지만, 실제 정통성은 직접 개국한 공이 있는 군주로부터 생겨나는거지 형식상 추존된 혈통에서부터 생겨나는게 아니다. 남제의 개국 군주는 소도성이고 그 형제 소도생은 그 과정에서 진의 사마사처럼 큰 역할을 한것도 아니라서 소도성의 혈통이 저절로 끊긴 상황이 아니고서야 소도생의 혈통인 소란은 이어받을 명분이 아예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란의 자식들은 대부분 허약했으며, 그 스스로도 몸에 병에 있었다. 그래서 이미 즉위 전에 9명을 죽인 것이었는데, 즉위 후에도 고제 소도성과 무제 소색의 자손이 아직 10여명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황계를 안정시키고 그들의 황권 탈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소요광을 시켜 그들을 모조리 죽이게 했다.
죽이는 방법도 상당히 가식적이었다. 고의적으로 황족들의 죄를 만들어 올리게 하고, 붙잡혀 온 황족들을 보며 안타까운 듯이 울고 불며 대성통곡했다. 그러나 짜고치기 형벌을 담당하는 정위가 그들에게 합당한 처리, 즉 사형을 선고하면 미리 준비해둔 독약으로 사약을 만들어 먹여버렸다. 그렇게 미리 만든(!) 관에 넣어서 매장했는데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미리 관을 만들었다는 점부터 이미 그들을 죽일 의도였다는 것이다. 북위를 격파한 사주 자사 소탄은 명제 소란이 자신을 보며 위선과 가식의 눈물을 흘리는걸 보고 죽음을 각오했으나, 결국 피하지 못하고 멸족을 당했다. 이렇게 죽은 소도성, 소색의 후손이 20여명이었고 소도성 계보는 전원 멸족을 면치 못했다. 자신의 정통성이 낮다고 개국군주 소도성의 후손을 아예 멸족을 시켰으니 누가 이 황실의 정통성을 인정해주겠는가? 황족의 정통성이란 개국군주, 중흥군주의 위업을 인정해서 그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명군의 자질이 없더라도 통치자로 인정해주는 것에서 비롯되기에, 이건 소씨의 국가통치명분 자체를 소란 자기 손으로 완전히 파괴한 자폭행위이다.
'''이렇게 단 한명이 황실 일가를 전부 도살한 예는 소란이 유일하다.'''
앞서 서술했듯이 병중에 황위에 올라 비밀에 부치고 정사를 처리하면서 몰래 백어를 구해 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이라, 백어를 구한다는 것이 외부에 드러났다. 이에 상서 왕안을 의심하여 반역자로 몰아 그를 죽였고, 대사마 겸 회계 태수 왕경칙[4] 은 겉으로는 예로서 대우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의심했다. 왕경칙은 두려워하다 반란을 일으켰는데, 승승장구하여 황태자 소보권이 건강을 지키고, 소란은 파천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기세등등하여 왕경칙은 '단공[5] 이 36계 주위상책(혹은 주위상계)이라고 했으니 너희 부자는 달아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외쳤으나, 결국 실패하고 난은 평정되었다. 이것이 "36계(줄행랑)"라는 말이 널리 퍼진 계기가 되었다.
물론 소란이 뻘짓을 안 한 것도 아니다. 불교와 도교, 특히 귀신을 깊이 믿어 무당이 호수의 물줄기가 수맥이 되어 병이 났다고 하자 그대로 호수를 막기도 했다. 남쪽을 서쪽, 동쪽을 북쪽이라고 부르도록 명하기도 했다.
영태 원년(498년) 7월, 명제 소란은 재위 5년만에 47세의 나이로 경복전에서 숨을 거두고, 8월에 흥안릉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뒤를 둘째 아들 황태자 소보권이 이었다. 죽으면서도 "융창(隆昌-폐위 당한 소소업의 연호)의 고사를 잊지 말거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얼핏 듣기에는 잘하라는 이야기지만 소란이 했던 짓을 생각해보자. 고제 소도성의 계보가 다 멸문되었으니 결국 남은 계보인 자기 아들들도 소보권에게 위협이 되면 다 죽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들 소보권은 과연 그대로 했으며, 그나마 황제 노릇이라도 잘하라는 충고마저 듣지 않고 왕조의 명맥을 끊었다.
후에 고제 소도성 계보의 제나라 황족은 오직 말을 못하는 명제 소란의 장남 사술공 소보의와 다른 아들 파양왕 소보인, 그리고 소보권의 아들로 여겨지는 예장왕 소종[6] 세 명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첫째 소보의는 폐질을 앓는 벙어리였다. 그래서 황위에 위협이 되는 계승 대상으로도 여겨지지 않아 목숨을 연명한 것이다. 비록 서른이 못되어 양나라 천감 8년(509년)에 죽었지만 그나마 병 중에도 천수를 누린 편이었다. 소보인은 북위로 망명했으며, 예장왕 소종 역시 친자논란에 대한 의심을 견디지 못하고 망명했는데 그럼에도 양 무제 소연은 그를 칠삭둥이인 자신의 아들로 여겼다. 소란의 계보 역시 골육상쟁과 양 무제 소연의 즉위로 모두 도륙이 났기 때문이다. 못난 아들 소보권에게 대를 잇게 하기 위해 삼촌 집안을 멸문시킨 결과치고는 참 안습했다. 그리고 소보인과 소종도 북위에 혼란이 일어났을 때에 살아남지 못하여 소란의 자손은 끊겼다.
다만, 소도성의 자손을 모두 멸족시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소도성의 손자인 소자현이 남아 있었으며 그는 제나라의 역사인 남제서를 썼다.
3. 둘러보기(계보)
[1] 고제 소도성의 둘째 형으로 아들이 즉위하자, 경황제(景皇帝)로 추존되고, 묘도 수안릉으로 격상됐다.[2]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3] 방계 컴플렉스를 가졌을거라고 엉터리 루머가 나도는 조선 선조의 경우도 계승법상 정통성에 아무 문제가 없다. 직계보다 약간 아쉬운 정도일뿐.[4] 바로 고제 소도성을 옹립했던 그 왕경칙으로 이때까지 살아 있었다.[5] 송나라 문제 유의륭 때의 명장 단도제.[6] 공식적으로는 소연의 아들로 원래 소보권의 후궁이었던 모친 오씨를 소보권을 죽인 소연이 취했다. 뱃속에서 7개월 만에 태어났는데 소연은 자신의 아들로 여겼지만 주변으로부터는 끝없이 소보권의 유복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현재는 소보권의 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