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성

 


'''남제 초대 황제'''
'''太祖 高皇帝 | 태조 고황제'''
'''묘호'''
'''태조(太祖) '''
'''시호'''
고황제(高皇帝)
'''연호'''
건원(建元, 479년 4월 ~ 482년)
''''''
소(蕭)
''''''
도성(道成)
''''''
소백(紹伯)
'''부황'''
선황제(宣皇帝)
'''모후'''
효황후(孝皇后)
'''생몰 기간'''
427년 ~ 482년 4월 11일
'''재위 기간'''
479년 5월 29일 ~ 482년 4월 11일
'''능호'''
태안릉(泰安陵)
1. 소개
2. 출신
3. 생애
3.1. 잇따른 전공
3.2. 위기를 기회로
3.3. 황제가 되다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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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남제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재위 기간 동안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고제 소도성은 소승지(蕭承之)[1]와 진도정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유송 원가 4년(427년)에 태어났다. 자는 소백(紹伯)이며 아명은 투장이다.

2. 출신


조상은 동해 난릉현 사람으로 그의 고조부 소정이 영가의 난 당시에 강을 건너 남란릉 동서리로 이주했다. 전한의 명재상 소하의 24대손이라고 자칭했으나, 사실 본인이 유언을 남길 때 자기를 포의소족, 즉 '''평민''' 출신이었다고 인정했다. 일단 남제서에서는 소하의 24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적국 북위의 역사서였던 <위서>(북위서)에서는 '''섬오랑캐'''[2] 도성이라고 폄하되어 있다.[3]
사실 전통적으로는 북조의 역사서들이 더러운 책이라고 욕을 많이 먹은게 사실이라 주로 남조 쪽 역사서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기에 북위서에서 소도성을 욕한다고 소도성이 소하의 일족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유송의 건국자 송무제 유유가 조상인 초원왕 유교의 도읍이었던 서주 팽성에서 조상 대대로 유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남쪽으로 이주한 케이스인 반면, 제 태조 소도성의 경우 조상이라고 칭하는 소하가 이미 한나라 시기부터 자손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서 한나라에서도 간신히 소하의 후손을 찾아 후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라 '남북조 시대에 소하의 후손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 최대 약점이다.

3. 생애



3.1. 잇따른 전공


소도성은 이처럼 무장 가문이었지만 13살 때 유학자 뇌차종(雷次宗) 문하에서 유학을 배워 예기와 춘추좌씨전을 익혔다. 원가 17년(440년), 송나라 사도 팽성왕 유의강이 강주자사로 강등당하여 예장을 지킬 때 부친 소승지가 군사를 이끌고 휘하에 배속되면서 공부를 그만두고 부친을 따라다녔다.
원가 23년(446년), 옹주자사 소사화 밑에서 좌군중병 참군의 일을 담당했고, 송 명제 유욱(宋明帝 劉彧)이 즉위하자 우군 장군이 되었다.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칙명을 받고 하루에 적의 보루 12개를 함락시키고 ,태시 3년(467년) 8월에 남서주에 가서 정사를 처리했다. 여기서 소도성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음에 주둔하면서 뛰어난 인재를 양성했는데 빈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다음 해 7월에는 남연주자사가 되어 광릉을 수비했다.
소도성은 키가 7척 5촌[4]이고 영특하며 남다른 생김새가 민간에서는 천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송 명제 유욱은 그를 의심하여서 태시 6년(470년)에 황문시랑, 월기교위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소환했는데, 그를 수도에서 감시하면서 제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소도성은 망설이다가 관군참군 순백옥이 기병 10기를 북위의 국경으로 파견하여 긴장 국면을 조성하게 하자고 건의해서 실행했더니 과연 북위에서는 수백 명의 기병을 보내 대비했다. 소도성은 이를 보고하여 제자리를 보존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회음에서 소도성이 반란을 꾀한다는 참언을 올렸다. 이에 송 명제 유욱은 (銀)단지에 을 담아 회릉태수 오희에게 주어 내리도록 했다. 소도성은 두려워서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희가 내막을 알려주어 그 술을 마심으로써 의심이 풀리게 되었다.
태시 7년(471년) 7월, 송 명제 유욱은 또 소도성을 조정으로 소환했는데 좌우에서는 황족들과 대신들이 살육되고 있는 점을 들어 말렸으나, 소도성은 망설이다가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니 빨리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건강에 이르니 송 명제 유욱은 소도성을 산기상시, 좌자좌위솔에 임명했다.
태예 원년(472년) 4월, 우위장군, 위위가 되었고 상서령 원찬과 함께 기밀을 담당했다. 위위에서 시중으로 옮긴 후에는 석두수군사를 통솔했다. 후폐제 유욱(後廢帝 劉昱)이 즉위하고, 계양왕 유휴범(桂陽王 劉休範)이 심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비를 못해 쩔쩔매던 조정 대신 용감하게 중임을 맡았다. 소도성은 둔기교위 황회와 월기교위 장경아를 시켜 거짓 투항을 시키게 하고, 내부에서도 확고한 대비를 했다. 장경아는 유휴범과 술을 마시다가 그가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가 되자 그의 칼을 꺼내 찔러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원휘 2년(474년) 6월에는 중령군 및 남연주자사가 되어 건강을 수비하고 원찬, 호군 저연, 복야 유병과 함께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사귀'''(四貴, 네 명의 귀인)라고 불렸다.

3.2. 위기를 기회로


원휘 4년(476년) 6월, 후폐제 유욱의 사촌 형제였던 남서주자사 건평왕 유경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7월 초에 소도성이 난을 평정했다.[5] 이처럼 반란을 계속 평정하자 더 교만해지고 방종해져서 사람을 함부로 살육하던 후폐제 유욱은 소도성의 명성을 꺼려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다. 후폐제 유욱은 나무로 소도성의 형상을 조각하게 하고 직접 활로 쏘았으며 좌우에게도 쏘게 하여 명중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렸다. 이 사이에 소도성은 친위군의 실권을 손에 넣었다.
원희 5년(477년) 6월 한여름에 소도성이 친위군 병영에서 대낮에 웃통을 벗고 누워자고 있는데 후폐제 유욱이 들어와서 '''활로 그의 배를 쏘려고 했다.''' 소도성은 깨어나 겁을 먹고 목숨을 빌었는데 소도성의 몸이 비대하여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왔으므로 과녁을 그린 다음 배꼽을 쏘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에서 지금 쏘면 소도성이 죽어 다시 쏠 수가 없다고(...) 말려 로 만든 화살로 대신 맞혔다.
이에 소도성은 두려움에 빠져 월기 교위 왕경칙에게 황제의 측근인 양옥부, 양만년 등 15명과 약조를 맺고, 기회를 엿보며 암살을 명했다. 때마침 적절하게 7월 7일 칠석날, 절에서 훔친 를 술과 같이 먹고, 한밤중에 궁궐로 돌아온 후폐제 유욱이 양옥부에게 '''네가 해가 뜰 때까지 은하수를 건너는 견우직녀를 찾으면 보고하고 못찾으면 넌 죽을 것이야'''라고 으름장을 놓은 후에 잠들었다. 그런데 사실 후폐제 유욱의 으름장은 양옥부 등이 배반할 것을 짐작해서 으름장을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쨌든 그가 잠들자 양옥부는 후폐제 유욱이 심혈을 다해 제작한 살인 도구를 꺼내[6] 목을 잘라 죽였고, 왕경칙에게 그 수급을 바쳤다. 왕경칙은 후폐제 유욱의 머리를 들고 소도성의 집에 찾아가서 후폐제 유욱을 죽였다고 알렸지만 소도성은 믿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왕경칙은 소도성을 설득하지 못하고, 연못에 머리를 버리고 돌아갔고, 소도성은 슬그머니 나와 연못에서 머리를 꺼내 를 물로 씻었더니 과연 후폐제 유욱의 머리였다.
소도성은 기회를 잡기 위해 즉시 친위군을 소집하여 궁궐로 들어가 점령하고 차후의 일을 의논했다. 왕경칙은 '''"천하는 이미 소씨의 천하다.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으름장을 놓고는 얼른 제위에 오르라고 했지만[7] 뇌차종에게 유학을 배웠기에 선양의 아름다운 방식(...)을 잘 알고 있던 소도성은 일단 후폐제 유욱의 동생 안성왕 유준을 황제에 세우니 그가 순제였다.
소도성은 사공(3공의 고위직으로 국정 중대사나 공사 등을 맡음), 녹상서사(내조의 실직으로 비서실장 급. 조조 이후 권신들은 이 직을 차지해 황제와 내부 측근의 유착을 차단한다), 표기대장군(고위 장군으로 군권 관할)이 되어 군국을 총관장하고 대권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에 원찬과 유병은 불만을 품고 12월 말에 거사를 하기로 했지만 탐지되어 먼저 원찬과 유병을 없앴다.
소도성은 형주 자사 심유지가 난을 일으킬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대비했다. 심유지는 자신의 재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딴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미리 알고 있던 소도성은 장경아를 윈휘 3년(475년) 3월에 옹주 자사로 임명하고 심유지를 경계하게 했다. 처음에는 심유지가 경계를 했으나, 장경아의 일처리가 워낙 주도면밀해서 심유지가 성심으로 대하고 그를 믿어 주었다.
윈휘 5년(477년), 심유지가 난을 일으키자 장경아는 비밀리에 건강에 있던 소도성에게 보고했다. 결국 12월에 심유지가 영성을 공격했지만 소도성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승명 2년(478년) 정월에 심유지는 화용계로 달아나 역림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3.3. 황제가 되다


심유지의 난을 평정한 소도성은 반란을 꾀한 영주 자사 황회를 죽이고 명제 유욱의 총신이었던 원전부와 양운장을 외지로 보낸 다음 군국대권을 모두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명 3년(479년) 3월에는 상국이 되어 10군을 봉지로 얻고 양공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심복 최조사가 '참서(도참)에 제나라는 금도리인으로 다른 나라를 멸했다라고 되 있으니 공은 제나라에 책봉되는게 천명에 타당합니다'라고 해서 제공(齊公)이 되었다. 4월에는 제왕(齊王)으로 승진하여 10군을 더 봉지로 받았고, 결국 그 달에 순제 유준이 선양하여 소도성은 건강 남교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제, 수도를 건강으로 정하니, 후대 역사가들은 이 나라 이름을 남제(南齊)로 부른다.
소도성은 초대 황제답게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말이 적고 희로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박식하고 문장을 잘짓고 초서예서에 능하며 바둑을 좋아했다. 즉위 후에는 유학자 유환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 효무제 유준 이후의 폭정을 개혁하며, 조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해서, 관리와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5월에는 여음왕으로 강등되었던 순제 유준을 죽이고 송나라 유씨 황족을 모두 멸했으며 제나라 황족을 대신 봉했다.[8]
소도성은 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귀중품을 지니지 않고 구리로 장식된 궁궐의 기물과 난간을 모두 쇠로 바꾸었다. 그리고 매번 자신에게 10년 동안만 천하를 다스리게 하면 황금을 흙과 같은 값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결국 건원 4년(482년) 3월, 재위 3년 만에 56세의 나이로 건강 임광전에서 병사하고 4월에 태안릉에 안장되었으며 장남 소색이 즉위했다. 소도성은 죽기 전에 '짐은 하관 상인이자 포의소족(미천한 신분)으로 황제에 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소. 이렇게 어렵게 일으킨 창업이니 그대(황족)들과 경(대신)들은 힘써 이 나라를 지켜주기 바라오. 그리고 송나라를 귀감삼아 황족들끼리 내분을 절대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오.'라며 화목하게 지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남제의 황족 다툼은 유송과 더불어 중국사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하드코어였다. 특히 명제 소란의 황족 대량 도살은 유송의 경우보다 더 지독한 경우에 속한다.

4. 둘러보기(계보)






'''남제의 역대 황제'''
유송 8대 순황제 유준

'''초대 태조 고황제 소도성'''

2대 세조 무황제 소색
[1] 태원 9년(384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사백(嗣伯)이고 동진 남개릉군 개릉현(蓋陵縣) 출신이다. 원가 7년(430년)에 문제 유의륭의 명령으로 우장군 도언지와 함께 북위를 정벌하는 북벌에 참여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원가 10년(433년) 한중태수로 부임하고 조정에 돌아와 둔기교위와 청주자사에 임명되었다. 후에는 남태산 태수와 우군 장군이 되었지만, 원가 24년(447년)에 죽고, 훗날 아들 소도성이 황제에 오르자 선황제로 추존되고 묘는 만안릉으로 격상되었다.[2] 유송의 건국자 유유도 섬오랑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원문에는 '도이島夷'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그대로 섬오랑캐라는 뜻이며 북위에서는 남조 황제들을 모두 섬오랑캐라고 깠다. 도이島夷란 당대에는 양자강 및 그 이남 지역 주민을 비하하던 말로, 당송 이후에는 동남아시아와 남양 제도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반면 남조 사람들은 북조 사람들을 삭로索虜, 또는 삭두로索頭虜라고 폄칭했는데 머리털을 끈으로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다. 아무튼 이걸 환빠들이 제입맛대로 해석하여 유유, 소도성=대륙백제=오오 한민족 오오 식으로 엮는다.[3] 물론 헛소리이며 그냥 섬오랑캐라는 것은 정통을 북위로 본 위서의 저자 위수가 유유와 소도성을 까기 위해서 적은 춘추필법이다. <위서>에서는 남제뿐만 아니라 유송의 황제를 섬오랑캐라고 까면서 함부로 기록했다. 그래서 위서는 더럽고 공정하지 않은 역사서라고 까인다. 사실 남제의 역사서 <남제서>에서도 북위를 '魏虜(위로)', 즉 북쪽(위나라) 오랑캐라고 불렀다. [4] 약 172.5cm로 촉나라 유비신라 실성왕도 7척 5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7척 5촌이라는 키가 제왕의 덕을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로 쓰인 신체적 특징이다. [5] 유경소의 난은 유송 충성파 모두가 참여하였다. 유욱의 폭정을 본다면 "이걸 진압하는 소도성도 미친 놈이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6] 후폐제 유욱은 총명해서 모자 재단하는 것을 한 번만 보면 직접 만들 수 있었고 처음 연주하는 악기도 스스로 연습하면 능히 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능력을 살인 도구 제작에 썼고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구에 일일이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 쓰던 도구가 자신을 죽이는 데 사용될 줄 누가 알았으랴?[7] 사실은 왕경칙 본인이 황제 시해범이 되고 싶지 않아서 살려고 그랬고 무엇보다 공신이 될 기회였으니...[8] 이렇게 송나라 황족은 전폐제 유자업 시대에 북위로 망명한 문제 유의륭의 9남 의양왕 유창을 제외하면 모두 멸족되었다. 유창은 북위 황제의 사위가 되어 대를 이어나갔다. 자세한 것은 유자업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