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고구려)
'''鎭'''
(332~408년)
고구려의 인물. 덕흥리 고분의 묘주로, 하필 묵서명에 판독이 안되는 부분 중 복성인 그의 성씨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서 이름만 판독이 가능한다.
생애로 보면 고국원왕 대에 태어나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다.
그의 무덤은 덕흥리 벽화 무덤라 불린다.1976년 12월 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1] 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고구려 무덤이 대개 그렇듯이 이 무덤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과 유골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곡괭이와 삽 등이 널려 있었고 인골 네 구가 흩어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도굴꾼들이 팀을 나눴다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 내부에서 부장품을 가지고 건네주는 팀, 무덤 외부에서 부장품을 받는 팀으로 나눴을텐데 아마 외부에 있던 도굴꾼들이 부장품만 챙기고 무덤을 닫아버려서 무덤 안에 있던 네 명은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부장된 모양이다.[2]
덕흥리 고분 벽화의 앞칸 북벽 입구 왼편에 그려진 진의 초상화.
408년[3] 에 건립된 이 무덤은 2실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종 벽화와 함께 14행 154자를 종서로 쓴 묘지명(墓誌銘)이 존재한다. 여기에 그려진 벽화는 안악 3호분과 더불어 중국인이 쓴 중국 사서서 말고는 기록이 별로 없는 고구려 역사를 살필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다. 2004년 고구려 고분군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진에게는 당연히 성씨가 있었고 한족의 성씨와 다른 복성임이 확인되나 지워져 무슨 성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 모용씨일 가능성은 낮다. 이름이 같음을 들어 남연의 모용진이 고구려의 진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된 적은 있지만 둘의 행적은 확연히 다르므로 모용씨일 가능성은 낮다.
진은 다른 중국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 1976년 북한 평안남도의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에 의하면 □□군 신도현 도향 □감리에서 태어나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의 관직을 역임했다. 건위장군으로 관료에 데뷔하여 유주자사로 마감한것. 77세[5] 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영락 18년(408년) 12월 25일에 안장되었다. 묘의 규모로 보나 묘지명에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라는 기록으로 보건대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추정된다.
진에 관련해서는 크게 두가지 논쟁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출신국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가 최종적으로 역임한 관직인 '''유주자사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일단 유주라는 곳이 베이징의 옛 지명인데 고구려가 과연 베이징을 정복하고 그 일대를 다스린 것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모본왕, 태조왕때 이미 베이징, 톈진 지역인 상곡, 어양, 태원을 공격하고 정벌했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광개토대왕때 유주에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6] 관직 마지막에 유주 자사를 지낼때 유주 자사 관할하에 있는 고구려 13태수들이 정무 보고를 하고 있는 벽화가 있으며 고구려의 제후왕의 기록까지 있다.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의 위치는 무덤벽면에 사신들 우측에 쓰여 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13) “(판독 불능)”
진의 출신국 논쟁에 대해서는 고구려인라는 주장과 중국(전연)이라는 주장과 대립하고 있다. 진이 중국 출신이라고 내세우는 근거는 거의 한가지 뿐인데 그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중국에 존재하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7] 신도현이라는 지명이 고구려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확언할 수 없다. 또한 중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다른 인물들은 대개 중국측에 기록이 존재하는데 진은 그렇지 않다. 진이 덕흥리 고분과 같은 대규모의 릉과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혜택을 누릴만한 중국의 핵심인물이였다면 당연히 중국측 기록에 있을텐데?라고 하지만 북조 사서 특히 북위서의 경우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번 후세에 편집되어 편찬되었고 중국 위상을 위해 중국인이 그것도 한자로 쓴 사서의 경우 누락됐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그래서 증거가 확실치 않은 사서보다는 실증 위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한국, 북한 학계에서는 진이 당연히 고구려인이고 유주자사도 실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설인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유주를 지배하지 못했고, 진도 중국인 망명자이며 진이 칭한 유주자사는 진이 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해 오면서 자칭한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뻥카들은 허봉제라고 불리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사는 흔히 보이는 책봉제도의 일환으로 보는 경향에서 제시된 주장이다.
어느 쪽 주장이든 당시 기록과 어긋나고 교차검증도 힘들다는 점에서 따르지 않고 유예해두는 편이 좋다.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 등장하는 담덕의 책략가 '하무지'는 바로 덕흥리 고분벽화의 진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이다. 작중에서 하무지는 후연 출신으로 담덕의 책사로 활동하는데 광개토태왕(담덕)이 그에게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의 고향인 유주에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에서 후연의 유주를 점령해 고구려 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만 후연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하고 죽기 직전 담덕이 있는 곳이 비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하며 죽어서도 폐하(담덕)을 모시려면 자신도 고구려 땅에 묻혀야겠다고 말하며 죽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책사이자 고구려의 충신으로 등장한다. 광개토대왕을 다루는 매체 대부분이 그 굇수격인 광개토대제의 등장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퍼왔고 광개토대제마저도 시원치 않은 작품임을 생각해보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유일하게 제정신인 우리나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진이라는 인물이 진으로 추정되는데 진이 부여 출신의 유민이라는 소수설을 채택한 것이다.
김진명이 그의 작품에서 진의 현무첩이라는 소재로 소설을 전개해나간 적이 있다. 그가 집필중인 '고구려'라는 소설에서 광개토대왕 시기를 다룬다는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에 진이 등장할 확률이 있다.
(332~408년)
1. 개요
고구려의 인물. 덕흥리 고분의 묘주로, 하필 묵서명에 판독이 안되는 부분 중 복성인 그의 성씨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서 이름만 판독이 가능한다.
생애로 보면 고국원왕 대에 태어나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다.
2. 덕흥리 고분
그의 무덤은 덕흥리 벽화 무덤라 불린다.1976년 12월 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1] 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고구려 무덤이 대개 그렇듯이 이 무덤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과 유골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곡괭이와 삽 등이 널려 있었고 인골 네 구가 흩어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도굴꾼들이 팀을 나눴다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 내부에서 부장품을 가지고 건네주는 팀, 무덤 외부에서 부장품을 받는 팀으로 나눴을텐데 아마 외부에 있던 도굴꾼들이 부장품만 챙기고 무덤을 닫아버려서 무덤 안에 있던 네 명은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부장된 모양이다.[2]
덕흥리 고분 벽화의 앞칸 북벽 입구 왼편에 그려진 진의 초상화.
408년[3] 에 건립된 이 무덤은 2실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종 벽화와 함께 14행 154자를 종서로 쓴 묘지명(墓誌銘)이 존재한다. 여기에 그려진 벽화는 안악 3호분과 더불어 중국인이 쓴 중국 사서서 말고는 기록이 별로 없는 고구려 역사를 살필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다. 2004년 고구려 고분군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3. 생애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이었다. 진(鎭)은 77세로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戊申年; 408년)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니 무왕(武王)이 시간을 선택했다. 날짜와 시간을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덕흥리 벽화 무덤 묵서명''' 출처
- 이것이 그의 생애에 대하여 전해지는 기록의 전부이다.(...) 이마저도 형식적인 수사로 채워저 있어 구체적인 삶은 알기 힘들지만[4] 덕흥리 벽화 무덤의 규모와 그가 거친 관직으로 보건대 고구려 지도층 중에서도 정상급 인물이였을것 같다.고구려가 임명한 제후왕이였다.
진에게는 당연히 성씨가 있었고 한족의 성씨와 다른 복성임이 확인되나 지워져 무슨 성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 모용씨일 가능성은 낮다. 이름이 같음을 들어 남연의 모용진이 고구려의 진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된 적은 있지만 둘의 행적은 확연히 다르므로 모용씨일 가능성은 낮다.
진은 다른 중국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 1976년 북한 평안남도의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에 의하면 □□군 신도현 도향 □감리에서 태어나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의 관직을 역임했다. 건위장군으로 관료에 데뷔하여 유주자사로 마감한것. 77세[5] 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영락 18년(408년) 12월 25일에 안장되었다. 묘의 규모로 보나 묘지명에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라는 기록으로 보건대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추정된다.
4. 그의 정체는?
진에 관련해서는 크게 두가지 논쟁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출신국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가 최종적으로 역임한 관직인 '''유주자사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일단 유주라는 곳이 베이징의 옛 지명인데 고구려가 과연 베이징을 정복하고 그 일대를 다스린 것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모본왕, 태조왕때 이미 베이징, 톈진 지역인 상곡, 어양, 태원을 공격하고 정벌했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광개토대왕때 유주에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6] 관직 마지막에 유주 자사를 지낼때 유주 자사 관할하에 있는 고구려 13태수들이 정무 보고를 하고 있는 벽화가 있으며 고구려의 제후왕의 기록까지 있다.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의 위치는 무덤벽면에 사신들 우측에 쓰여 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13) “(판독 불능)”
진의 출신국 논쟁에 대해서는 고구려인라는 주장과 중국(전연)이라는 주장과 대립하고 있다. 진이 중국 출신이라고 내세우는 근거는 거의 한가지 뿐인데 그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중국에 존재하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7] 신도현이라는 지명이 고구려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확언할 수 없다. 또한 중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다른 인물들은 대개 중국측에 기록이 존재하는데 진은 그렇지 않다. 진이 덕흥리 고분과 같은 대규모의 릉과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혜택을 누릴만한 중국의 핵심인물이였다면 당연히 중국측 기록에 있을텐데?라고 하지만 북조 사서 특히 북위서의 경우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번 후세에 편집되어 편찬되었고 중국 위상을 위해 중국인이 그것도 한자로 쓴 사서의 경우 누락됐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그래서 증거가 확실치 않은 사서보다는 실증 위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한국, 북한 학계에서는 진이 당연히 고구려인이고 유주자사도 실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설인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유주를 지배하지 못했고, 진도 중국인 망명자이며 진이 칭한 유주자사는 진이 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해 오면서 자칭한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뻥카들은 허봉제라고 불리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사는 흔히 보이는 책봉제도의 일환으로 보는 경향에서 제시된 주장이다.
어느 쪽 주장이든 당시 기록과 어긋나고 교차검증도 힘들다는 점에서 따르지 않고 유예해두는 편이 좋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 등장하는 담덕의 책략가 '하무지'는 바로 덕흥리 고분벽화의 진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이다. 작중에서 하무지는 후연 출신으로 담덕의 책사로 활동하는데 광개토태왕(담덕)이 그에게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의 고향인 유주에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에서 후연의 유주를 점령해 고구려 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만 후연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하고 죽기 직전 담덕이 있는 곳이 비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하며 죽어서도 폐하(담덕)을 모시려면 자신도 고구려 땅에 묻혀야겠다고 말하며 죽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책사이자 고구려의 충신으로 등장한다. 광개토대왕을 다루는 매체 대부분이 그 굇수격인 광개토대제의 등장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퍼왔고 광개토대제마저도 시원치 않은 작품임을 생각해보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유일하게 제정신인 우리나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진이라는 인물이 진으로 추정되는데 진이 부여 출신의 유민이라는 소수설을 채택한 것이다.
김진명이 그의 작품에서 진의 현무첩이라는 소재로 소설을 전개해나간 적이 있다. 그가 집필중인 '고구려'라는 소설에서 광개토대왕 시기를 다룬다는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에 진이 등장할 확률이 있다.
[1] 현재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동.[2] 실제로 중국 장안에 있는 당나라 영태공주(당중종의 7녀로 이름은 이선혜)묘나 이집트에서 발견된 중왕국 피라미드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3] 광개토왕 18년.[4] 대신 출신지, 생몰년, 경력이 완벽하게 적혀있다. 대부분의 한국 고대 인물들이 기록의 부재로 출신지, 생몰년, 경력을 알수 없는 경우와 같이 비슷하다.하지만 적혀있는 출신지에 비해 최초 국적이나 성씨를 알수 없으니 이것또한 괴랄한 아이러니이다. 이상하게도 다른 기록은 완벽하게 멀쩡한데 최초 국적을 가늠할수 있는 군의 이름과 복성인 성씨만 지워저있다.[5] 고대인의 평균 수명이 40세정도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장수한것. 그가 고구려인이라면 젊어서는 고국원왕대의 쇠락을 지켜보고 늙어서는 광개토대왕대의 영광을 지켜본 것이다.[6] 2000년대 초 역사스페셜에서는 베이징 인근의 고구려 유적과 지명에 대한 방송을 한 적이 있으나 학계의 관심 밖에 있고 현재 동북공정 때문에 조사를 하려해도 막혀있다.[7] 그것도 '기주'의 치소가 바로 장락군 신도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