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1. 개요
2. 사건 발생
3. 사건 경과
4. 공개수사
5. 범인의 체포와 사건의 진상
6. 결말
7. 기타
8. 둘러보기


1. 개요


李潤相 誘拐殺人事件
1980년 11월 13일 당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경서중학교[1] 1학년이었던 이윤상이 유괴되어 다음날 살해된 사건. 그러나 돈을 뜯어내기 위한 협박은 이윤상이 살해된 뒤에도 그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리 만든 녹음을 동원해 계속되었다. 당시 범인이 체포되기 전까지는 이윤상의 행방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건으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81년 11월 30일에 범인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다름아닌 피해자가 다니던 학교 체육교사인 주영형이었으며, 그와 불륜관계에 있던 여고생 두 명이 종범(從犯)이었다. 따라서 '주영형 사건' 혹은 '주교사 사건'으로도 불린다. 범인의 신분 때문에, 그리고 범인과 종범인 여고생들이 사제간에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 이 사건이 스승의 자리를 지키자는 명목으로 전국의 중학교들이 단축수업을 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또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 보내면 너도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며, 결국 이 경고는 실행되었다. 그리고 거짓말탐지기를 범죄수사에 최초로 활용한 첫 사례이다.

2. 사건 발생


당시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거주하며 경서중에 재학하던 이윤상은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는 1980년 11월 13일 오후 4시경, 학교 체육교사인 주영형과 상담을 하러 간다고 외출한 뒤 유괴되었다. 그리고 그 날 밤 8시~12시 사이에 이윤상의 집에 범인으로부터 4차례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 걸려온 전화는 남자 목소리였는데, '''"당신 아들을 수원에 감금했다. 우리는 전과자들로 4명이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는데 돈이 필요하다. 현금 4천만원[2]을 준비하라.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 아들을 죽이겠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밤 11시경에는 이윤상의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 때문에 망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윤상이는 수원에 감금되어있다. 현금 4천만원을 준비하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이에 이윤상의 아버지는 '''"불경기에 4천만원은 준비할 수 없고 2천만원은 준비할 수 있다."'''고 답했고, '''"내일 12시에 전화하겠으니 그 때 시키는 대로 해라"'''라는 내용으로 협박하였다.

3. 사건 경과


다음 날인 11월 14일, 이윤상의 아버지가 경찰에 유괴사실을 신고하였다. 경찰은 신고 접수 직후, 이윤상의 집 전화에 녹음장치를 부착하고 형사 2명을 잠복, 전화를 감청케 하였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윤상군은 유괴 다음날인 이 날 살해당했다고 한다.
16일 오후 6시 40분 경, 범인들이 이윤상의 미리 녹음된 목소리('이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를 들려주었다. 범인들은 위에 전술된 내용대로 4천만원을 요구했고, 2천만원을 준비한 뒤 이윤상의 누나가 약속장소로 나갔으나 범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범인들은 4월 6일까지 6차례의 협박편지와 62회의 협박전화를 했다. 첫번째를 제외하고는 협박전화는 모두 여자 목소리였으며, 편지의 필적은 1, 2, 5번째 편지는 또박또박 쓴 여자 필적이었으나 3~4번째는 거친 남자의 필적임으로 볼 때 경찰에서는 여자가 낀 3~4인조의 계획적 범행으로 추정했다.
범인들은 5번째 편지(2월 2일)에서 이윤상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4. 공개수사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한 것을 범인에 알리지 않기 위해 비공개로 진행하였으나 협박이 장기화되면서 1981년 2월 26일, 경찰은 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였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으며, 전두환 대통령도 특별 대국민담화를 열어 그 유명한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 보내면 너도 죽는다."''' 발언을 하고 제5공화국 출범일(3월 3일)까지 범인이 자수할 경우 관용을 베풀겠다 했으나 끝내 범인은 그 날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범인들은 이윤상을 실제로는 이미 살해한 상태에서 거짓말을 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살려 보낼 수도 없었다. 사건이 장기화되자, 경찰에서는 최면술사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5. 범인의 체포와 사건의 진상


범인 주영형(가운데)과 공범 여고생 2명(양 옆)의 사진.
범인은 1953년생 광주출신인 주영형(朱永炯,28)이다. 서울대학교 ROTC 출신(학군 14기)의 예비역 중위[3]#인데다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교육대학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대단한 엘리트에 차분한 인상과 호감가는 외모를 가져서 평소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경찰이 처음에 그에게 의심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용의선상에서 제외한 것은 그의 교사라는 신분뿐만 아니라 학벌과 외모에 현혹당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당초 경찰은 이윤상을 사건 당일 불러낸 주영형에게 당연히 혐의를 두었으나, 아직 흉악범죄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 사회 분위기상 학교 선생님이 그런 악질 범죄를 벌일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던데다가 그가 사전에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경찰은 그가 제시한 알리바이를 믿게 되었다 여기에 뉴스 인터뷰에도 응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직접 수사본부에 찾아가기도 했다. 영구미제로 끝날 위기에 놓였던 사건은 1981년 11월, 주영형이 여중 재직 시절 교외지도를 빌미삼아 여학생 20여 명을 성폭행한 사실을 경찰이 밝혀내면서 수사가 활기를 띠었다. 또한 사건 당일, 이윤상이 '선생님이 어머니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라고 말했다는 모친의 진술이 실마리가 되었다. 한편 주영형을 거짓말탐지기로 조사한 결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4] 마침내 11월 29일, 경찰은 주영형의 자백을 받아냈다.
범행동기는 범인이 평소 '''도박으로 빚 1천만원'''[5]을 지고 빚 독촉을 받게 되자, 비교적 가정이 유복한 이윤상을 유괴하여 금품을 뜯어내려 했던 것인데, 이 과정에서 범인은 자신이 과거 여중 재직 시절부터 불륜관계에 있었던 범행 당시 여고생 A양과 B양을 가담시켰다.[6] 처음에는 이윤상의 누나를 유괴하기 위해서 A양을 통해 접근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신 이윤상을 유괴한 것이었다.
진술한 바에 따르면, 주영형은 유괴 다음날인 11월 14일 오후 6시경, 범행 아지트인 영등포구의 모 아파트에서 이윤상이 '누나를 유괴하려 한 것도 선생님이에요?'하며 고함치자 명주실 노끈으로 손발을 결박하고 반창고로 입을 틀어막은 뒤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곧바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가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 보니 이윤상은 그동안 이미 질식사해 있었다는 것이다.[7] 이후 11월 30일경 그는 A양의 협조를 얻어서 시체를 여행용 큰 가방에 넣은 다음에 이것을 PVC물통에 옮긴 뒤 번호 미상의 용달 트럭을 부른 뒤 북한강변에 암매장했다.
이 사실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주영형은 자신이 이윤상을 직접 교살했다고 자백했지만 곧 번복했다. 시대적으로 1980년대 당시는 무죄 추정의 원칙 따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고문이 횡행했으므으로 그도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라고 하는데 죽이기 전에 협박에 이용할 목소리 등을 녹음하는 등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여 오히려 이게 거짓말 아니냐는 말이 있다. 애시당초 비닐봉투 등 살해 목적의 도구가 준비되어있었고 무엇보다 납치범이 면식범인 경우 자신의 범죄 은폐를 위해 피해자를 죽이는 일이 일반적이다. 어쨌거나 이후 진술한 자백에서도 살인 혐의 자체는 결국 인정되었다.
A양은 유인과 감금, 살해에는 가담하지 않고, 주영형의 요구에 따라 협박전화와 금품요구, 시체유기에 협조하였으며, B양은 협박편지 작성에 가담하였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주영형은 경찰의 수사가 너무 괴로워[8] 자살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써 수사에 혼선을 주고, 아울러 범행에 가담한 A양[9]과 B양과의 동반자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A양에겐 가장 먼저 자살하라고 꼬드겨 증거를 없애려 시도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A양은 수면제 4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또한 B양에게도 청산가리를 쥐어주면서 '나를 사랑하면 나를 위해 죽어라.'라고 자살을 종용했고 B양은 정말로 죽기 위해 자살할 날짜를 잡아놓고 기다렸지만 날짜가 되기 전 같은 해 11월 30일에 전부 검거되면서 이루지 못했다.

6. 결말


재판 결과 주영형은 유괴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나머지 두 여학생에게는 협박편지 작성 가담 등의 범행 일부 동조 혐의만 적용되었다. 그 뒤 범인 주영형은 1~3심을 거쳐 1982년 11월 23일 사형이 확정되었으며[10], 공범 A양에게는 1심에서 징역 10년. 2심에서는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형이 선고되었고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한편 B양은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이후 항소를 포기하여 역시 형이 확정되었다.
두 여학생은 형량을 받아들였으나 주영형은 사형을 면하려고 재심을 여러 번 청구했다. 그러나 기각되었고, 1983년 7월 9일 결국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사형 집행 전 개신교에 귀의했는데,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자신의 눈과 콩팥을 사회에 기증한다고 말했다. 그의 장기는 대학생 등 4명에게 기증되었다. 결국 전두환의 말이 이루어진 셈이다.
사건 이후 1991년 3월 경향신문 근황기사 등을 종합한 바에 의하면, 이윤상 군의 어머니 김해경은 남편과 함께 1982년에 '윤상장학회'를 만들어 지체장애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한편 수기집 <비정이어라>를 냈지만, 췌장암에 걸려 투병하며 1985년 2월 14일 천주교로 귀의했고, 3월 12일에 아들 곁으로 갔다. 아버지 이정식씨는 이듬해 15살 연하의 여성과 재혼하여 86년과 88년에 아들을 얻었으나 여전히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편 A양은 1985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고, B양은 1984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A양은 몇달 뒤 회사원과 결혼해 서울 근교 지역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며 B양은 안양에서 살다가 강남 룸쌀롱에 진출했다고.....

7. 기타


  • 사실 주영형이 ROTC였던 덕에 그의 ROTC 선배 중 하나가 현역 군인으로 남아있어서 그가 후배인 주영형을 위해 전두환에게 힘을 써 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영형이가 정치범이라면 모르겠는데 형사범, 그것도 유괴살인범인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들킨 정도나 사람을 때린 정도야 얼마든지 도와주겠지만 유괴살인은 도와준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도움을 거절했고 그렇게 주영형의 사형은 집행되었다. 사실 전두환조차 윤상군을 죽이면 범인을 죽여버리겠다고 공개 선언했으니 이런 걸 함부로 쉴드치다간 본인까지 위험해질 판국이기도 했다. 게다가 군 출신이 득세하던 5공 시절이라 해도 범인의 군 선배면 기껏해야 영관급 장교인데 이걸로 정부에 감형을 하네마네 요구할 처지 자체가 안된다. 심지어 육사 출신 하나회가 요직을 꽉 틀어쥐고 있는 통에 비주류인 ROTC면 어림도 없다.
  • 주영형의 친구가 한 증언에 의하면 주영형은 키 178cm, 몸무게 78kg의 체격으로 당대에는 엄청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11]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서 필기시험과 체력검정, 면접, 신체검사까지 합격해놓고 입학하지 않았다. 당시 육사는 서울대를 갈 수 있을 정도의 학력과 대단한 신체조건이 갖춰져야만 갈 수 있는, 극소수의 타고난 엘리트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ROTC 4학년 후보생 시절 주영형은 후배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12]관련 기사
  • 사형장에서 남긴 육성테이프에서 그는 '자신을 파멸시킨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맛을 들인 카드놀이였다'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유괴 동기가 도박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은 주영형이 살인의 고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감금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사망한 것, 즉 유괴살인이 아닌 감금치사라고 주장하였다. 검사가 기소한 죄목인 당시 특가법 제5조의2 제2항 제2호[13]에서는 약취 또는 유인한 미성년자를 살해한 때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었던 반면, 당시 형법상 감금치사상은 상해죄와 비교하여 중한 형으로 처단하도록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금치사로 인정되면 적어도 사형은 피할 수 있기 때문[14]. 그래서 주영형의 행위를 감금치사로 볼지, 유괴살인으로 볼지가 쟁점이 되었으나, 1심 법원부터 대법원까지 모든 법원에서 유괴살인으로 인정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4년 후인 1995년 강태민 유괴 살인 사건의 피고인 전용재가 비슷한 주장을 해 극형을 면하려 했으나, 주영형 사건의 판례 덕에 전용재도 살인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 가. 피고인이 미성년자를 유인하여 포박 감금한 후 단지 그 상태를 유지하였을 뿐인데도 피감금자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면 피고인의 죄책은 감금치 사죄에 해당한다 하겠으나, 나아가서 그 감금상태가 계속된 어느 시점에서 피고인에게 살해의 범의가 생계 피감금자에 대한 위험발생을 방지함이없이 포박감금상태에 있던 피감금자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사망케 하였다면 피고인의 부작위는 살인죄의 구성요건적 행위를 충족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므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구성한다.
>
> 나. 피해자를 아파트에 유인하여 양 손목과 발목을 노끈으로 묶고 입에 반창고를 두 겹으로 붙인 다음 양손목을 묶은 노끈은 창틀에 박힌 시멘트 못에, 양발목을 묶은 노끈은 방문손잡이에 각각 잡아매고 얼굴에 모포를 씌워 감금한 후 수차 아파트를 출입하다가 마지막 들어갔을 때 피해자가 이미 탈진 상태에 이르러 박카스를 마시지 못하고 그냥 흘려버릴 정도였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얼굴에 모포를 덮어씌워 놓고 그냥 나오면서 피해자를 그대로 두면 죽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피고인이 위와 같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피해자를 병원에 옮기지 않고 사경에 이른 피해자를 그대로 방치한 소위는 피해자가 사망하는 결과에 이르더라도 용인할 수 밖에 없다는 내심의 의사 즉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
> 대법원 1982. 11. 23. 선고 82도2024 판결 판결요지
  • 한국에서 거짓말탐지기가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들 중 하나다. 당시 검사를 맡았던 담당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형사들도 확실하게 꼬리를 잡게 되자 거짓말탐지기를 신뢰하기 시작했다고. #
  • 상당히 쇼킹했던 사건인지라 소설이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와 소설 벌레 이야기,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밀양이 이 사건에 영감을 받았다.
  • 그로부터 10년 후 가수 윤상이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가수데뷔를 할때 자신의 이름때문에 사람들이 이 사건이 생각날까봐 성인 를 빼고 윤상으로 데뷔했다고 밝혔다.[15]
  • 대한뉴스에서 사건 관련 보도를 하기도 했다#[16]
  • 범인이 학교 교사였던 관계로 교원의 윤리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크게 대두되었고 다음해 대한교육연합회(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실추된 교권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육자 스스로의 윤리적 자각을 바탕으로 한 교원윤리헌장을 제정키로 했다. 이에 수정과 논의를 거쳐가며 교원윤리헌장을 완성했고 그것이 현재의 사도헌장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 이윤상군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우등생이여서 전교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8. 둘러보기



[1] 과거 1970년에 모산 수학여행 참사를 냈던 그 마포구의 경서중학교 맞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고, 역사가 꽤 오래된 학교이다. [2] 소비자물가지수의 화폐가치계산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약 1억 9천만원에 달하는 금액[3] 군대 있을 때 최전방에서 철책부대 소대장을 했다.[4]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는 직접증거가 아닌 간접증거로서 사용되며 유무죄를 판가름할 수 있는 직접증거와는 달리 참고자료로 사용되는 것이다.[5] 2019년 시점에서도 죽어라 일하고, 생활비를 아껴야지 겨우 모이는 돈이다. 저때 천만원이면 두말할 나위도 없는 거액이다. '''당시에는 은마아파트의 분양가와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2000만원이던 시절'''이었고 2020년 현재 은마아파트의 거래가는 20억 원에 달하며 당대의 승용차인 현대 포니가 100만원 했다. 참고로 이 시절에는 자가용 소유한것만으로도 나름대로 부유층에 들었다고 자부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대학 동기와 재미삼아 한 것이었다.[6] 여담으로 주영형은 이미 전에 근무하던 C 여중에서 여제자들과 간통을 하다 걸려서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났다는 말이 있다. 참고로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7] 이후 법원에서 인정한 사실에 따르면, 15일 아침 7시 30분까지 이윤상 군은 '''살아있었다'''. 이때 주영형은 이 군을 병원으로 옮길고 자수할지, 그대로 두어 이 군이 죽으면 시체를 처리하고 범행을 계속할지 등을 고민하다가 그대로 학교에 가버렸고, 결국 같은 날 오후 2시경 주영형이 돌아왔을 때는 이 군은 죽어있었다. 이때문에 이후 재판에서 주영형의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어,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된다.[8] 당시는 수사 과정에서 직간접적 고문을 많이 했으므로 괴롭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이춘재 외의 무고한 사람들이 단지 용의선상에 오른 것만으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9] A양은 당초 4월 5일 협박편지를 부친 뒤 신고하려 했으나, 주영형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했다.[10] 대법원 1982. 11. 23 선고 82도2024 판결. 이 대법원 판결은 "감금행위 도중 살인의 고의가 생겨 살인한 경우 (감금치사가 아니라)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구성한다"라는 내용으로 형법 교과서에 오르게 된다.[11] 구속 직후 사진을 보면 그리 빼어나지는 않다. 다만 1년간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1980년대 특성상 직간접적 고문도 많이 당했을테고 결국 구속된 상태에서 찍힌 사진이니 초췌해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을지도..[12] ROTC 제대 후 체육교사로 재직한 이후에도 자신이 근무했던 중학교에서 평소 학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둘의 복합적인 성향이 범행의 길로 빠지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3] 현행법으로는 2013년 전문개정된 형법 제291조(약취, 유인, 매매, 이송 등 살인·치사)가 적용된다. 당시에는 형법상 약취, 유인 살인·치사죄가 없이 특가법만이 정하고 있었고, 형법 제291조는 결혼을 위한 약취, 유인의 처벌조항이었다.[14] 유괴 후 재물을 요구한 행위에 대하여 당시 특가법 제5조 제2항 제1호에서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금치사가 인정되더라도 무기징역의 가능성은 남게 된다.[15] 다만 윤상은 본명은 같지만 1968년생이며 사건이 일어난 곳과는 달리 서대문구 출신이다.[16] 1981년 3월 14일 제작. '서민과 함께하는 대통령' 편의 첫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