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위

 


'''전연 제3대 황제
幽帝 | 유제'''
'''묘호'''
없음
'''시호'''
유황제(幽皇帝)[1] / 헌무황제(獻武皇帝)[2]
'''연호'''
건희(建熙, 360년 1월 ~ 370년 11월)
''''''
모용(慕容)
''''''
위(暐)
''''''
경무(景茂)
'''부모 관계'''
부황: 모용준 / 모후: 단씨
'''생몰 기간'''
350년 ~ 384년 음12월(35세)[3]
'''재위 기간'''
360년 음1월 ~ 370년 음11월(11년)[4]
1. 개요
2. 일생
3.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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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제3대 군주. 휘는 위(暐), 자는 경무(景茂), 시호는 유(幽)이다.
모용준의 3남으로, 어려서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모용각의 섭정을 받아 전연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용각이 죽고 뒤이어 집권한 숙조부 모용평의 부패로 전연은 점점 쇠약해졌고, 마침내 전진부견왕맹을 앞세워 전연을 침공하자 모용위는 전진에 항복하여 전연은 멸망하였다. 전진에서 신흥후로 책봉된 모용위는 이후 비수대전의 패배로 전진이 몰락하자 내부에서 복국을 도모하였으나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2. 일생


처음에는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졌다가, 이내 형들이 요절하여 태자가 되었다. 모용준이 사망하자 360년에 고작11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모용준은 죽으면서 동생 모용각(慕容恪), 숙부 모용평(慕容評), 그리고 원로 공신 모여근(慕輿根)에게 유언을 내려 후사를 부탁했는데, 따라서 이 셋은 각기 삼공의 자리를 나누어 맡고 어린 모용위를 보좌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모용각이 태재(太宰)로 섭정을 맡아서 전권을 대리하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모여근은 모용각과 모용위 사이를 이간질하고, 종국에는 둘 다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용위는 오히려 모여근의 음모를 간파하고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진작부터 모여근의 역심을 알고 있었던 모용각이 자초지종을 까발리면서 모여근은 온 가족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일로 전연의 조정에는 한동한 공포 정국이 조성되었지만, 모용각이 앞장서서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자 이것도 해소되었다.
이후 모용각의 섭정하에 전연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자 모용외의 아들 모용평이 태재(태부)가 되었는데, 그는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 해서 전연은 점점 쇠약해진다. 결국 전진(前秦)의 부견왕맹을 앞세워 전연을 침공하자, 전연은 멸망하고 모용위는 부견에게 항복하였다. 고구려로 망명한 태재 모용평은 복수의 그날 만을 노리고 있던 고국원왕에게 그대로 묶여 전진으로 다시 압송된다.
모용위는 부견의 휘하에서 신흥후에 임명되었다. 비수대전에서는 후방에 있었으나 이후 모용수가 거병하여 전연을 재건한 후연을 세우자 장안에서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가 같은 선비족인 서연의 모용충(慕容沖)[5]의 공격에 부견을 뒷치기 하려다가 들켜. 부견에게 목숨을 잃었다.
부견이 모용수에게는 마치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듯 관대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장면. 하지만 사실 부견도 "내가 그대를 대우한 것이 어떠했기에 이런 뜻을 품었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의 가신인 모용숙이 "가문과 나라의 일이 중한데 어찌 의기(意氣 : 은혜)를 논하겠소!"라고 대꾸하자 격분한 부견에게 끔살. #.
이때의 학살극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모용수의 서손인 모용성 밖에는 없었다. 그의 동생 모용홍이 세운 서연에선 유황제로 추증하고, 약 14년 뒤 숙부 모용덕이 세운 남연에선 헌무황제로 추증하였다.

3. 둘러보기(계보)


'''전연의 역대 황제'''
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

'''3대 유황제 모용위'''

서연 초대 제북왕 모용홍
후연 초대 성무제 모용수




[1] 서연의 모용홍이 추증한 시호.[2] 남연의 모용덕이 추증한 시호.[3]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향년을 적용.[4]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재위 기간을 적용.[5] 후에 서연의 2대 왕이 된다. 수세에 몰려 모용홍의 휘하에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