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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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後燕)의 제3대 군주. 휘는 성(盛), 자는 도운(道運), 시호는 소무황제(昭武皇帝)이다.
모용보의 서장자로,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민첩하며 모략을 꾸미는 데 능하다는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북위가 성장함에 따라 후연의 판도는 요서로 축소되고 정치적으로도 내분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는데, 모용성은 정권을 찬탈한 난한을 타도하여 모용씨의 몰락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공포 정치로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공포 정치는 신하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고, 모용성은 단기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2. 생애
385년, 서연의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고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가 반기를 들자, 전진의 부견은 장안 내에 있는 모용 가문 사람들의 대부분을 몰살했다. 이 때 모용성은 성을 탈출해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당숙이 되는 모용충(慕容沖)이 다스리는 서연으로 도주했다. 1년 뒤 서연을 나와 후연으로 향한다. 387년, 후연에 도착한 그는 장락왕(長樂王)으로 임명되었다.
398년, 단속골의 난이 일어나자 후연의 황제가 된 아버지 모용보와 함께 각지를 떠돌았는데, 아버지가 정서 난한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반대하다가 설득시키지 못하자 자신의 세력과 함께 이탈하였다. 얼마 후 난한이 자신의 아버지인 모용보의 목숨을 빼앗자, 모용성은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고 충성하는 척을 한다. 마침 난한은 모용성의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난한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모용성은 난한의 형들과 난한의 사이를 계속 이간질시켰고, 은밀히 모용기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한다. 결국 모용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난한의 형 난제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진다. 난한의 아들 난목이 난제의 반란을 진압하자 모용성은 그의 목숨을 빼앗았고, 군대를 시켜 난한과 그 일족을 싸그리 죽이고는 정권을 잡는다.[3]
그 후 모용성은 난한에 의해 요동공이 된 숙부 모용희를 다시 하간공으로 되돌리고[4] 시중·거기장군·중령군·사예교위로 삼았다.
모용성은 398년 10월에 비로소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399년에 스스로 지위를 낮춰 서인천왕(庶人天王)이란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한다. 그러나 말만 황제가 아닐 뿐, 급속도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권력 강화는 큰 후유증을 낳게 되니 바로 연이은 숙청극이 벌어졌던 것. 이 때 모용성은 작은 혐의가 있어도 잡아들이거나, 심지어 취조 없이 사건을 판결할 정도로 냉혹하게 숙청해대며 악명을 떨쳤다. 이에 신하들의 반발은 날로 커져서, 급기야 401년에는 전장군 단기의 반란이 터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모용성은 난을 진압하고 있었는데 남아있던 패잔병들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고 이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았다.
3. 평가
서자 출신에도 불구하고 두차례나 목숨을 건지며 끝장날 뻔한 모용씨 가문을 구해내고 난한을 역관광시켜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 만큼 재주 있는 인물이었지만, 결국 공포 정치로 몰락해버린 비운의 군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도중에는 유능했으나 잦은 옥사로 폐위된 광해군에 비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