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후한)

 



'''趙憙
조희
'''
'''시호'''
정후(正侯)
'''작위'''
'''현한'''
용공후(勇功侯)
'''후한'''
관내후(關內侯) → 절향후(節鄕侯)
'''최종직위'''
'''현한'''
중랑장(中郞將)
'''후한'''
태부(太傅)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성씨'''
(趙)
''''''
(憙)
''''''
백양(伯陽)
'''생몰 기간'''
음력:기원전 4년 ~ 80년 5월 20일
양력:기원전 4년 ~ 80년 6월 26일 (향년 84세)
'''고향'''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재임기간'''
'''1차 태위 재임기간'''
51년 5월 ~ 60년 2월
'''2차 태위 재임기간'''
65년 ~ 75년 10월 2일
'''태부 재임기간'''
75년 10월 2일 ~ 80년 5월 20일
1. 개요
2. 형의 복수를 하다
3. 경시제 밑에서 일하다
4. 적미군에게서 도망치다
5. 광무제에게 중용받다
6. 태위에 오르다
7. 후한의 대신(大臣)

[clearfix]

1. 개요


전한현한, 후한 초의 인물, 어려서 형의 복수를 이룰 정도로 지조가 높았다. 자는 백양(伯陽),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출신 시호는 정후(正侯),

2. 형의 복수를 하다


사촌 형이 아들 없이 어떤 사람에게 살해 당하자 당시 15살이였던 조희는 형의 복수를 위해 언제나 무기를 몸에 가지고서 원수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원수가 있는 곳을 알았지만, 원수는 병이나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조희는 다른 사람이 아플 때 복수 하는 것은 군자가 할 도리가 아니라며 잠시 복수를 접어두고, 원수에게 "병이 낫거든 나를 피해 멀리가라"라고 조언(?)까지 하고 가였다.
원수는 병이 나은 후 자신의 몸을 묶고 조희를 찾아왔고, 조희는 만나지 않다가 결국 원수를 죽여 복수를 이루었다.

3. 경시제 밑에서 일하다


23년 경시제가 즉위하자 무음대성 이씨(舞陰大姓 李氏)가 성을 점거하면서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경시제는 주천장군 이보(李寶)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고, 이씨는 완현(宛縣)에 조희라는 자가 신의가 있어 그 자가 항복을 청하러 온다면 바로 투항한다고 하였다.
경시제는 그 말을 듣고, 조희를 불러오니 조희는 자신의 나이가 아직 20살이 되지 않았다고 거짓 소개를 하였다. 경시제는 그 말을 듣고 "송아지야 어찌 무거운 짐을 지고서 먼길을 가느냐"라 하며 웃었고, 조희를 낭중(郎中)으로 삼고 편장군의 직무를 맡게하였다.
그후 조희는 무음, 영천, 여남에 이르기를 이씨를 포함해 다른 자들 까지도 항복을 시키러 움직이고 반항하는 자들은 공격하며 한바퀴 돌아 완현으로 돌아왔다. 경시제는 그런 조희를 보고서 "너는 내 천리마이니 더욱 열심히 일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신뢰하였다.
왕망의 장수 왕심(王尋)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경시제는 조희를 오위편장군(五威偏將軍)으로 임명하고 곤양(昆陽)에서 왕심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펼쳐진 곤양대전에서 기적같은 승리와 함께 조희는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분전하였고, 그 공로로 중랑장을 받고 용공후(勇功侯)에 봉해졌다.

4. 적미군에게서 도망치다


25년 경시제적미군에 의해서 죽자 조희는 적미군에게 쫓기면서 달아났다. 달아나면서 절친한 사이였던 한중백(韓仲伯)과 수십명의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을 데리고 가는데 한중백의 아내는 미색이 뛰어나 가다가 붙잡혀서 욕을 볼 수 있으니 한중백은 거리에 두고 떠날려 했지만 조희는 한중백의 아내의 얼굴에 진흙을 발라 태우고 직접 수레를 밀고 다녔다. 지나가다가 시비가 붙을 때면 한중백의 아내가 중태라고 하면서 급히 빠져나왔다.
지나가는 길에 죽은 경시제의 가족들이 보이니 그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로 배를 굶주리고 있었고, 조희는 이를 딱히 여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옷과 돈을 주어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5. 광무제에게 중용받다


등봉(鄧奉)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희는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로써 서신으로 그를 엄하게 꾸짖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등봉과 조희가 반란모의를 함께하였다고 말하자 광무제는 등봉의 반란이 실패하고 조희의 서신을 보자 오히려 조희를 도덕적인 사람이라 하며 놀라워했고, 조희를 중용하기 시작하였다.
광무제는 조희를 간양후상(簡陽侯相)으로 임명하여 강남을 평정시키러 하자 조희는 군대를 이끌지 않고 홀로 말을 이끌고 갔다. 물론 그 곳의 사람들은 조희의 출입을 막았으나 조희는 간양의 거물들에게 후한의 위신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귀순시켰다.
형주목(荊州牧)이였던 주명(奏明)은 조희는 능히 번잡한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인재라고 평하였고, 광무제는 곧 조희를 평림후상(平林侯相)으로 임명하였다. 조희는 군대를 이끌고서 적병을 물리치고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니 능히 현을 평정하였다.
후에 회현(懷縣)의 현령(縣令)이 되자 전임이였던 이자춘(李子春)이 함부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이자춘의 손자 둘이 살인 저질렀단 소식을 들었다. 결국 조희는 이자춘을 추궁과 고문 끝에 이자춘의 손자 둘은 자살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자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니었는지 이자춘을 선처해달라고 조희에게 비는 자들이 수십명의 달했다고 한다. 물론 조희는 모두 거절하였다. 41년에 조효왕 유량(劉良)이 병이나 죽을려 하자 광무제는 그를 방문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러자 유량은 "이자춘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였는데 그는 지금 회현에서 죄를 지어 조희가 그를 사형시키려 하니 그의 목숨을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하였다. 광무제는 "관리는 법을 존중해야하고, 법은 지켜져야 하니 그것은 들어 줄 수 없고, 다른 것을 얘기하라"라 하니 유량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얼마안가 유량이 죽자 광무제는 사면의 방식으로 이자춘을 풀어주어 결국 유량의 유언은 지켜지기는 하였다.
41년 조희는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평원은 도적이 많아 조희는 이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두목들은 죽이고, 가담한 사람들은 그 죄를 하나하나 물을 수 없다며 광무제에게 다른 군으로 보내어서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청주(青州)에 메뚜기 떼가 발생하였으나, 메뚜기 떼가 평원 경내에서 죽으니 백성들은 조희에 덕분이라고 조희를 찬양하였다.

6. 태위에 오르다


50년(건무 26년) 광무제가 친척들을 불러모아서 연회를 여니 여러 부인들이 와서 일전에 적미군들이 장안을 침범했을 때 조희가 자신들을 구해주었다고 말하니 광무제는 크게 조희를 칭찬하니 곧 그를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광무제는 조희에게 "너는 영웅으로 보천(保薦)받고 부인들도 너의 은혜를 감사히 한다."고 하면서 후한 상을 내렸다.
51년 5월에는 태위(太尉)에 오르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52년 남흉노의 선우 혜락시축제가 복종하고 오환족(烏丸族), 선비족(鮮卑族)들이 조공을 바치자 광무제는 조희에게 변방을 관리하라 명을 내렸다. 조희는 유주(幽州), 병주(幷州)의 경계를 확정시키는 중요한 일을 하였다.
54년 조희는 광무제에게 봉선[1]을 권하였고, 56년 광무제는 봉선을 거행하였으며 조희도 참석하였다.
57년 광무제가 사망하자 조희는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명제동해공왕 유강(東海恭王 劉彊)이 같이 합석하는등 무질서한 일이 벌어지자 조희는 부검(扶劍)을 궁궐 계단에 세우고서 엄숙한 얼굴로 높고 낮음을 분명히 말하였다.
번국(藩國)의 관리들이 일반 관리들 처럼 상서를 올리자 조희는 번국(藩王)들을 모두 돌려보내고서 아침과 저녁으로만 입궁하게하였다.

7. 후한의 대신(大臣)


58년 절향후(節鄕侯)가 되었다.
60년 중산상(中山相) 설수(薛脩)[2]의 심문이 사실과 달라 태위직에서 해임되었다. 같은 해 겨울 두융(竇融)의 뒤를 이어 위위(衛尉)가 되었다.
65년 우연(虞延)에 뒤를 이어 태위가 되었으나, 얼마안가 모친상을 당하자 조희는 상복을 입고 상을 치룬다고 말하였지만, 명제는 거절하고 사신을 보내 상복을 벗게하였다
75년 8월 명제가 죽고 장제가 뒤를 잇자 조희는 명제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같은 해 10월 태부(太傅)로 승진하고 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임하였다. 조희의 아들 7명은 모두 낭관(郎官)이 되고, 장남인 조대(趙代)는 황문시랑(黃門常侍)이 되었다.
80년 조희가 병이 위중해지자 장제는 친히 방문하였다. 5월 20일 조희가 죽었다. 향년 84세 시호는 정(正)이다.

[1]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게 하는 제사로 주나라 때부터 하였지만,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끊기다 진시황이 부활시켜서 하는 의식으로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여 실의에 빠져 죽은것으로 유명하다.[2] 중산간왕 유언(中山簡王 劉焉)의 국상(國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