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비 은팔찌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은팔찌'''
武寧王妃 銀製釧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동)
'''분류'''
유물 / 생활공예 / 금속공예 / 장신구
'''수량/면적'''
1쌍
'''지정연도'''
1974년 7월 9일
'''제작시기'''
백제시대
[image]
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국보 제160호


1. 개요


武寧王妃 銀製釧. 무령왕비 은팔찌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 무령왕릉에서 1971년 여러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무령왕비의 팔찌 2점으로 한 쌍을 이룬다.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현대 고고학사에서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로 꼽히는 사례인데, 발굴 당시 개판 엉망진창이었던 현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본 은팔찌들을 비롯하여 백제의 귀중한 유물들이 대체로 온전한 상태로 상당수 출토됐다.[1] 발굴 당시, 본 팔찌 한 쌍은 목제 관 안에 안치된 무령왕비의 시신 곁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령왕비 은팔찌 한 쌍은 1974년 국보 제16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무령왕비 은팔찌는 무령왕릉을 발굴했을 때 목관 안에 안치된 무령왕비 시신의 왼팔 부근에 두 점 모두 있었다고 하며, 본 은팔찌 한 쌍 이외에도 금팔찌 한 쌍도 함께 발견되었지만 이 것들은 국보로 지정되진 않았다. 큰 은팔찌의 지름은 8cm, 작은 은팔찌의 지름은 6cm이며 모두 두께는 1cm 정도이다.
본 은팔찌들은 제작 수준이 상당히 높고 장식은 화려하며 세련됐다. 두 점 모두 팔찌의 겉표면에 두 마리의 이 새겨져 있는데, 팔찌의 두께가 고작 1cm 정도 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용의 형상은 입체적이다. 이 용들은 은으로 먼저 링을 만든 뒤 작은 망치나 정과 같은 도구로 표면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아주 정교하진 않지만 용의 머리와 등, 다리, 꼬리, 발과 같은 전체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용의 비늘도 일일이 표현했으며 심지어 발톱도 만들어놨다. 팔찌의 내면과 외면의 경계에는 톱니 무늬를 촘촘하게 새겼다.
팔찌 내부의 살과 맞닿는 부분은 평평하게 해놨는데, 여기에는 해서체 한자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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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은팔찌. 팔찌 내부의 명문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庚子年二月多利作 大夫人分 二百卅主耳[2]

경자년이월다리작 대부인분 이백삽주이

무령왕비 은팔찌 명문[3]

명문의 내용을 해석하자면 '경자년 이월에 다리가 (은) 230 주이(또는 주)를 들여 대부인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4] 여기서 말하는 경자년이월(庚子年二月)은 무령왕과 왕비의 생몰년대를 고려하면 서기 520년 2월이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확인되는 무령왕비의 사망년은 병오년으로 서기로 환산하면 526년인데, 병오년과 가장 가까운 경자년은 520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팔찌는 왕비가 죽기 6년전에 만든 것으로 무령왕비가 실제 착용했던 장신구로 볼 수 있다.[5] 다리(多利)는 다리작(多利作)이라는 문구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팔찌를 만든 장인 또는 장인 집단의 호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인분(大夫人分)은 대부인용이라는 것인데, 고대 한반도에서 부인이라는 말은 왕족 또는 귀족층의 결혼한 여자를 뜻하는 명칭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부인은 왕비를 지칭하는 백제의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백삽주이(二百卅主耳)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팔찌를 만들 때 은 230주이가 들어갔다는 말로 추정한다.[6] 특히 주이(主耳)란 말의 정체가 불분명한데, 대체로 백제의 무게 단위 또는 수량 단위로 본다.[7]
본 팔찌처럼 표면에 용을 조각한 형태의 팔찌는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예로는 경주시 노서동 215번지 고분[8]에서 출토된 경주 노서동 금팔찌가 있다. 또한 역시 노서동 215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경주 노서동 은팔찌도 있는데, 이 팔찌들은 조형 형태가 비슷하거나 재질이 같다는 점에서 무령왕비 은팔찌와 비교할만하다. 노서동 금팔찌와 은팔찌도 본 은팔찌 한 쌍의 제작 연대와 비슷한 시기인 6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형 형태나 그 수준은 무령왕비 은팔찌가 대체로 한 수 위라고 평가 받는 편이다.[9][10]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무령왕비 은팔찌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백제 왕족의 장례용 물품이며, 명문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해 제작 연대와 제작자 그리고 무령왕비가 살아 생전에 사용했던 왕족의 장신구였음이 확인되고,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실전된 백제의 어휘에 대한 자료를 단편적이나마 제공한다는 점에서 본 은팔찌 한 쌍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는 양호하고 출토지가 명확하며, 은팔찌 그 자체의 제작 수준과 미적인 감각도 뛰어나 백제의 금속 공예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기에 유물로서의 가치도 대단히 높은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무령왕비 은팔찌 한 쌍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지 3년 뒤인 1974년 7월 9일 국보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160호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팔찌의 외관을 깜싸고 있는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명문에 의하면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 등이 기록되어 가치가 높다.

용의 조각이 웅건하면서 만든시기와 작가, 중량까지 기록된 삼국시대의 유일한 팔찌로서 고대 금속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 무령왕릉에서 국보 제154호 무령왕 금제 관식, 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제 관식, 국보 제156호 무령왕 금귀걸이, 국보 제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 제158호 무령왕비 금목걸이, 국보 제159호 무령왕 금제 뒤꽂이, 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은팔찌''', 국보 제161호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지석, 국보 제164호 무령왕비 베개, 국보 제165호 무령왕 발받침 등이 함께 출토됐다.[2] 卅이 아니라 州로 보는 견해도 있다.[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무령왕릉출토은천명[4] 해석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무령왕비 은팔찌[5] 참조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자, 한국어 위키백과 - 병오[6] (삽)은 삼십을 뜻한다.[7] 인터넷 상에서 확인 가능한 대부분의 참고 문헌들의 경우, 명문의 글자를 二百州主耳(이백주주이)라고 밝히고서는 막상 해석을 할 때는 二百卅主耳(이백삽주이)에 맞춰서 이백삼십주이(또는 이백삼십주)로 해석을 하고 있다.[8] 문화재청이나 두산백과에서는 '215'''호''' 고분'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 노서동 고분은 경주고분 일련번호로 128호∼141호인 13기의 봉토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엄밀히 말하면 215'''호'''는 없다. 현 노서동 21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215란 번호가 붙었으므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경주노서리고분군 항목처럼 여기서는 '215'''번지''' 고분'으로 표기하였다.[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무령왕비 은팔찌[10] 물론 무령왕비 은팔찌에 비하자면 경주 노서동 금팔찌와 은팔찌가 한 수 아래라는 것이지, 유물들 그 자체로만 평가하자면 이들 역시 대단히 기량이 뛰어난 신라의 명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