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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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남 공주시 금성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웅진기 백제의 왕과 왕족의 고분군. 1963년에 사적 제 13호로 지정되었다.
2. 대표적인 고분
2.1.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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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도면
자세한 내용은 무령왕릉 문서 참고
2.2. 적석유구
송산리 고분군이 있는 능선의 가장 위에 위치한 적석유구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네모난 모양을 하고있어서 방단적석유구라고도 한다. 목관을 놓았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아놓았다. 내부에서는 백제토기들이 수습되었다.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아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당한 개로왕의 가묘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혹은 무덤이 아니라 제사 유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018년에 들어서 이 적석유구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계속 진행중이다. 참고로 송산리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의 첫번째 발굴이다.
2.3. 송산리 1호분
현재 1호분과 4호분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3년 조사 때는 4호분 또는 5호분으로 명명되었으나 일본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가루베 지온이 재조사하면서 1933년 1호분으로 재명명했다. 조사 전에 이미 봉토가 거의 완전 유실되었고 도굴로 파괴되어 천장과 동벽의 일부가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출토된 부장품은 곡옥 1점, 대도 1점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2.4. 송산리 2호분
현재 동쪽에서 두 번째로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에 3호분으로만 명명되고 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루베 지온이 1933년 조사하면서 2호분으로 재명명했다. 이미 도굴로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1호분과 축조 방식이 비슷하다. 내부에는 강자갈을 깔았는데 도굴로 교란되었고 수습조사에서 일부 유물이 수습되었다. 출토된 부장품은 입구에 토기 5점이 있었으며 철제대 1점, 철제창 파편 1점, 철촉 3점, 관에 사용된 쇠못 다수가 수습되었으며 순금 귀걸이 1쌍과 구슬 2점이 수습되었다.
2.5. 송산리 3호분
현재 서쪽에서 두 번째로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 조사에서는 2호분으로 명명했지만 가루베 지온이 1933년 재조사하면서 3호분으로 재명명했다. 봉토는 유실되었고 조사 전에 이미 도굴 구멍이 있었다. 이 도굴 구멍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라서 이 구멍을 통해 조사했다. 출토된 부장품은 금동제 꾸미개 1점, 금동제 허리띠 파편 2점, 금동제 허리띠금구 1점, 말띠드리개 1점, 화형장식구 1점, 쇠못 100여점, 쇠촉 8점이 수습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루베 지온이 재조사했을 때는 소나무 관 파편 다수, 철제 대도 2점, 은제판 조각 1점이 더 수습되었다.
2.6. 송산리 4호분
현재 가장 서쪽에 있는 무덤으로 1927년 조사에서는 1호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33년 가루베 지온의 재조사 때 4호분으로 재명명되었다. 조사 전에는 봉분의 흔적만 남아 있었지만 도굴에 의해 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부장품으로는 은제 허리띠 장식 2점, 은제 자루끝장식 1점, 순금 장식구 11점, 금동 장식품 잔편 1점, 철도금 장식구 잔편 약간, 은제 장식구 2점, 철창 파편 점, 철촉 43점, 금동 고리 1점, 장식못 124점, 철편 17점, 칠기 잔편 약간, 철제 고리 잔편 약간, 얇은 은박판 잔편 약간, 금동 장식구 잔편 약간, 금동 파편 약간이 1927년 조사에서 수습되었다. 이후 가루베 지온의 재조사 때 쇠못 7점, 금동의 각진 추형식 유물 1점, 나무관 파편 1점이 더 수습되었다.
2.7. 송산리 5호분
동쪽 구릉에서 약간 서쪽 지역, 즉 6호분과 무령왕릉 근처에 있다. 6호분은 서쪽에, 무령왕릉은 후방에 있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1932년 이 지역의 고분 관람을 위한 작은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가루베 지온이 조사했는데 이미 조사 이전에 도굴되었으며 가루베 지온은 이것을 5호분으로 명명했다. 가루베 지온은 5호분의 후방에 있던 무령왕릉을 사신 가운데 현무에 해당하는 인공 산으로 보고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6호분을 완전히 깨끗하게 해치운 것을 볼 때 정말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이고 관대 두 개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묘로 보이며 벽면은 돌로 쌓아 올렸고 천정을 큰 판석으로 마무리하여 서울 방이동 고분군의 형태인 궁륭형 석실과 비슷한 모양새를 띄고있었다. 천장 일부는 도굴로 일부 파괴되어 있었고 출토된 부장품은 순금제 말모양 장식구 1점, 순금제 나뭇잎모양 장신구 8점, 순금제 다이아몬드형 장식구 14점, 순금제 달개장식 1점, 순금제 꽃모양장식 1점, 산호옥 1점, 은못 35점, 금동장식못 50여점, 토기항아리 1점, 쇠못 10여점, 둥근고리 큰칼 파편 1점, 쇠촉 11점, 유리구슬 1점, 동제 장식구 파편 1점이 출토되었다.
비록 도굴되었지만 금제, 은제 장식품들과 나무널에 사용되었던 호화로운 장식용 못들이 다소 수습되어 위상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또 토기항아리에서는 은제 꽃장식 못 6점이 나와 흥미를 끌엇는데 이것은 도굴꾼이 가져 가려고 담았다가 가져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아사히 신문 조각과 양초, 성냥, 호박으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파이프를 물고 신문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을 시켜 도굴을 하게 한 어느 일본인 도굴꾼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무령왕릉 바로 근처라는 점과 무령왕릉의 약간 위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바로 선대 왕이었던 동성왕과 동성왕비의 무덤으로 추측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사실은 알 수 없다.
2.8. 송산리 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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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6호분의 도면
무령왕릉 이전에 발견된 백제 최초의 벽돌무덤이자 벽화무덤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다. 1932년 송산리 고분군 정화작업 현장에서 배수로를 파다가 발견된 6호분은 일찍 발견되는 바람에 가루베 지온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가루베 지온은 천장이 파괴되었고 이미 1호분부터 5호분까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도굴되어 출토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기록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가루베는 마구잡이로 무덤을 도굴하고 빗자루로 깨끗하게 쓴 다음 조선총독부에는 보고서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무덤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비로소 공주의 백제 왕릉의 관리를 신경쓰기 시작하면서,[1]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인 가루베 지온은 더 이상 조사를 빙자한 도굴이 불가능해지자 1940년 강경여고로 전근갈 때까지 송산리 고분군을 관광하러 오는 일본의 높으신 분들과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를 자처했다. 결국 광복 후에는 그동안 수집하고 도굴한 콜렉션을 집이 있던 강경에서 빼돌려 트럭에 싣고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간 다음, 역시 또다른 도굴광인 대구 남선전기 오구라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다.
6호분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존재한다. 그도 그럴 듯이 무령왕릉과 매우 똑같은 벽돌무덤이서서 무령왕과 시대적으로로 가깝고, 관계도 매우 밀접한 인물이 피장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6호분의 피장자로 추측되는 사람은 총 3명이다.
먼저 6호분의 피장자가 동성왕이라는 설이다. 벽돌무덤은 본래 중국 남제의 양식이고 동성왕때 남제와 교역을 시작했으니 이때 벽돌무덤의 양식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6호분은 무령왕릉보다 나중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동성왕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왕비와 같이 합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호분) 따라서 근거와 주장이 희박하다.
두번째로는 6호분의 피장자가 성왕이라는 설이다. 성왕 때에는 벽돌무덤의 양식이 이미 정착(무령왕릉)되었고 6호분 또한 무령왕릉 보다 나중에 축조됐다고 추측되는 것으로 보아 근거는 일부 된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왕은 재위기간 중 사비로 천도를 한 첫 왕이다. 그러므로 성왕의 무덤이 있다면 사비, 즉 지금의 부여군에 장사지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성왕이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현재 성왕릉은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6호분의 피장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동성왕과 성왕도 아니라면 추정되는 사람은 성왕의 모친밖에 없다. 현재 가장 강력한 설이다. 6호분이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 무령왕릉보다 나중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되는 점과 한 명만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 벽면의 사신도가 이 설을 더 뒷받침한다.
무령왕릉이나 6호분이나 전부 성왕 때 지어졌을 것이니 성왕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진왕제 하에서는 부인이 여럿 있지만, 왕이 즉위하면 부인들 중 한 명을 택하여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다. 오래 전에 태자로 책봉되어 왕이 될 준비를 한 사람은 미리 자립위왕에 걸맞은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자립위왕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즉위와 동시에 그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면 된다.[2] 선왕과 선왕비를 같이 합장하고자 한다면, 선왕비가 다음 왕의 친모라면 고민할 필요 없이 아버지 무령왕과 같이 합장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친모가 왕후가 아니라면 누구를 아버지인 무령왕과 같이 합장해야 할까? 일단 공식적인 왕후를 합장함이 법도이다. 하지만 성왕의 친모 역시 왕비에 버금가는 좋은 예우을 받아야 했다. [3] 6호분의 사신도인 현무도가 그려진 벽이 무령왕릉을 향한다는 점으로 보아, (고분의 주인이 정말로 성왕의 친모라면) 친모를 아버지와 따로따로나마 죽어서라도 가깝게 붙여놓으려는 성왕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벽면의 사신도 또한 어머니를 위해 성왕이 특별히 그리라고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4]
2.9. 송산리 7호분
1932년 송산리 고분군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으며 위치는 현재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남쪽 아래에 있었다. 현재는 위치가 사라졌으며 봉토는 유실되었고 내부도 도굴로 심하게 파괴되어 부장품은 거의 없었다. 다만 도굴꾼이 파낸 흙 속에서 극히 소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부장품은 소량의 구슬이 수습되었다. 또 내부에서는 구슬 1점, 은제 꽃모양장식 1점, 은제 구슬 7점, 작은 구슬류 1점, 금동 및 은제 판상장식 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
2.10. 송산리 8호분
현재 1~4호분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했으며 4호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이 무덤은 1933년 조사에서 4호분보다 매우 작아 4호분에 딸린 배총으로 여겨졌다. 출토된 부장품은 나무고나 파편 몇 점, 백제토기 5점, 은제 팔찌 2점, 산호옥 6점, 흑색 구슬 4점, 작은 구슬 1천여 점, 쇠못 몇 점이 수습되었다. 이 중에 구슬 1천여 점은 목걸이들로 보인다.
2.11. 송산리 29호분
1933년 6호분 보수 공사 때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형식은 알려진 게 없다. 출토된 부장품도 거의 알려진 게 없는데 극소수의 구슬류가 출토되었다고만 전한다.
2.12. 파괴 고분
현재 1~4호분 동편 맨 끝에 위치한 고분으로 1927년에 조사되었다. 이미 도굴로 천장이 붕괴되어 내부는 흙으로 가득했고 봉토도 사라져 고분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이 고분은 1호분과 2호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출토된 부장품은 토기 2점, 연옥 269점, 유리구슬 27점, 금동제 띠고리 1점, 금동 방울 1점, 나뭇잎모양 장식 1점, 손칼 1점, 금동제 장식구 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
3. 그 외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공주 일대를 허락없이 임의로 조사[5] 하였던 가루베 지온은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공주고보의 역사교사였다. 송산리 고분군 역시 가루베 지온이 조사하였는데 그는 1969년에 현재 공주고등학교인 공주고보 제자였던 이성철에게 국제우편으로 흑백사진 28장을 보냈다.
무슨 심산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28장 중에는 그가 도굴한 6호분의 현장 사진과 실측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철은 문화재청에서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이를 기증했는데 이상한 것은 1번부터 26번까지 매겨 놓은 사진 중에 10번 사진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정컨대 가장 중요한 무덤 내부의 유물 사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1번 사진에는 희미하게나마 유물로 보이는 물체가 보이고 관대 아래를 찍었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더구나 도굴된 다른 무덤에서는 극히 소량의 부장품이라도 수습된 것으로 보아 6호분에서 잔편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은 그가 도굴하고 깨끗이 치웠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가루베 지온은 1901년 생으로 일본 야마가타현에서 태어나 1925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왠지 공주로 가서 공주고보에서 교사 노릇을 하며 공주와 부여 지역의 백제 유적과 고분을 샅샅이 찾고 다음 연구를 했다. 1970년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없다고 주장했다. 1959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문화재 반환위원들이 일본으로 직접 찾아갔으나, 그런 거 없다고 했고 1970년 명지대학교에 강연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관했다. 가루베 지온은 이 유물들을 연구해서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라는 책을 저술했고 결국 그는 1970년 그대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족들도 끝까지 가져온 게 없다고 주장했고 2006년에서야 유족들이 백제 기와 4점을 돌려주는 데에 그쳤다.
참고로 원래는 봉분이 지금만큼 높지 않았었다.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처럼 변하게 되었다.
4. 같이보기
[1]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서 가장 유적이 많은 평양, 경주 유적지 조사에 관심이 컸고 일본의 이름높은 프로 학자들이 그곳에 투입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공주의 백제 유적지는 방치하고 있었다. 이런 빈틈을 타 아마추어인 가루베 지온의 개인적인 '조사를 빙자한 도굴'이 가능했던 것이다.[2] 무령왕 초기에는 귀족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무령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왕후를 맞았을 확률이 높다.[3] http://www.histopia.net/zbxe/index.php?mid=neo&page=20&document_srl=9259[4] 가루베 지온 때문에 안타깝게도 진짜 고분의 주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의 글이 사실이라면 6호분의 지석에는 성왕이 느꼈던 것이나 당시 왕실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었을 텐데 정말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5] 당시의 일본인 관학자들도 발굴조사를 완전히 임의대로는 할 수 없었고 관련 부서에 서류를 제출해야만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가루베 지온의 행위는 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