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칼리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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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소련의 정치가이자 혁명가다. 블라디미르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혁명 당시 주요 세력과 함께 러시아 혁명에 이바지했다.
2. 초기 생애
1875년 11월 19일, 러시아 제국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칼리닌은 1889년, 지방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농장에서 잠깐 일했다. 그리고 189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철강 노동자, 집사 일을 했고 트빌리시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할 때는 스탈린의 장인[2] 인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를 만난 적이 있다. 1906년에는 에스토니아 출신 유대인인 예카테리나 로베르크와 결혼했다.
3. 정치 활동 및 후기 생애
칼리닌은 창당 해인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스탈린을 알게 된 것은 알릴루예프 가족을 통해서였다. 러시아 혁명 당시 칼리닌은 볼셰비키 당원 겸 중앙 금속노조의 조합원이었다. 나중에는 조지아의 티플리스[3] , 에스토니아의 리발[4] ,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고, 1906년 4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제4차 당대회에서 대의원을 지냈으며, 1912년 프라하에서 열린 볼셰비키 당회의 대의원으로서 통치 중앙 위원회의 대체 위원으로 선출되어 러시아 내부로 파견되었다.
1917년 4월, 칼리닌은 다른 많은 볼셰비키와 마찬가지로 멘셰비키와 협력하여 임시 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원을 주장했으며 그 해 여름 내내 알렉산더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무장 봉기를 계속 반대했으며, 가을에는 페트로그라드 시의 두마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칼리닌은 11월 7일 볼셰비키 혁명과 그 이후 그가 관리했던 시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칼리닌은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위원회에 가입해 정권이 합법화시킨 당 일간지 프라브다가 조직되는 것을 도왔다.
1919년에서 1938년까지 명목상 국가원수인 중앙집행위원회 주석[5] 을 맡고[6]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역시 명목상 국가원수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맡았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에 가입했다. 그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후보 정치국원이었으며, 1925년에 정치국원으로 승격하여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딱히 사람들에게 인지도는 없다. 국가원수였다고는 하나 실권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겸직한 스탈린이 쥐고 있었던 탓에 칼리닌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사실 칼리닌 본인이 주석직에 오른 것은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권위가 있는 지도자이자 '진짜로' 국가원수 노릇을 하던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가 1919년 3월 급사한 후 황급히 대체할 수가 있는 공산당원 정치인을 찾는 과정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칼리닌를 뽑는 간선제 주석선거에서 찬성표는 7표, 반대표가 4표, 기권표가 2표였다. 스베르들로프가 주석일 때 중앙집행위원회(이때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고(권력의 중추인 '소비에트'의 정점이기 때문에) 레닌이[7] 주장한 사회혁명당 당원들의 사형을 거부하고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사면령을 내리고 정당 활동을 허가할 정도였다.
1919년 3월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가 사망하자, 칼리닌은 그를 소련 국가원수인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총재로 교체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은퇴할 때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1920년, 칼리닌은 러시아 대표단의 일환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공산당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한 뒤 소련 내에서 극심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던 중 스탈린과 파벌 동맹을 맺었다. 또한 그 해에 제5차 세계대회에 레닌과 코민테른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칼리닌은 1946년에 은퇴했고 같은 해 6월 3일 모스크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칼리닌은 주요 국장으로 추대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원래 칼리닌도 노련한 공산당 정치가자 스탈린의 동지 중 하나였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이 기반을 다잡던 시기에 점점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이 너무 가혹하다고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칼리닌은 스탈린을 대놓고 적대시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적들이 많았고 권력이 불안했던 시기의 이런 행동은 결코 용서되지 못했고, 아내가 잡혀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살려달라고 편지를 보내도, 아무 것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아내가 대놓고 스탈린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던지라[8] 권력이 있었어도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만무하다.[9]
이후 스탈린과는 거의 사디스트적인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스탈린은 칼리닌의 건강과 불편함이 있는지 애써 챙겨주면서도 그에게 위협을 가하여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을 즐겨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애정은 있었는지 칼리닌의 장례식에서 기자들이 계속 자신을 찍으려 하자 스탈린은 칼리닌의 관을 가리키며 칼리닌을 찍으라고 화를 내었다고 한다.
4. 여담
- 거의 유일한 농민 출신의 혁명가였으며 이로 인해 공산당 내부에서 유달리 총애를 받으며 활동했다.
- 표도르 칼리닌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 오래 전부터 볼셰비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 니키타 흐루쇼프는 칼리닌에 대해 "칼리닌이 레닌 밑에서 어떤 실제적인 일을 수행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에서 그는 모든 법령 중 명목상의 서명자였지만 실제로는 정부 사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위원회의 일원이었지만, 위원회 일원들은 그의 의견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당황했다. 한 사람은 단순히 칼리닌이 불쌍하다고 느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 現 러시아 트베리 주 카신스키 군[2] 후처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아버지이다.[3] 현재의 트빌리시.[4] 현재의 탈린.[5] Президент. 주석이라는 명칭이 공산국가 대상으로는 흔하며 위원장, 의장, 대통령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6] 명목상 중앙집행위원회는 집단지도체제 기관이었으며 각 SSR의 지도자들이 공동주석으로 선출되었는데 딱히 의미는 없었다.[7] 레닌은 1917년부터 1924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의 인민위원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장을 겸직했다. [8] 러시아 소비에트의 대법원에서 소련 공산당이 파견한 참심원으로 근무하다가 라브렌티 베리야가 다스리는 내무인민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유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것이라고 한다.[9] 1945년에 승전을 기념하는 특별사면을 논의했던 칼리닌은 친족들을 총동원해 탄원서를 스탈린에게 보내게 했다. 1946년에 칼리닌이 퇴임한 직후에 사망하고, 한참 뒤에 아내가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