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브렌티 베리야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이름'''
조지아어: ლავრენტი პავლეს ძე ბერია[1]
메그렐어: ლავრენტი პავლეშ სქი ბერია[2]
러시아어: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한국어: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국적'''
러시아 제국 [image]
러시아 공화국 [image]
소련 [image]
'''출생'''
1899년 3월 29일,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 메르헤울리
'''사망'''
1953년 12월 23일, 소련 모스크바
'''신장'''
172cm
'''직업'''
정치인, 군인
'''정당'''
소련 공산당
'''배우자'''
니나 게게치코리 (1906–1991)
'''자녀'''
세르고 베리야
1. 소개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대숙청과 2차 세계대전
2.3. 냉전, 스탈린의 죽음, 그리고 드리워지는 그림자
2.4. 몰락과 처형
3. 일화
3.1. 베리야의 가족들
4. 등장 매체

[clearfix]

1. 소개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의 소련의 관료.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의 수장으로 '스탈린의 개' 니콜라이 예조프에 이어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시킨 장본인이자 폴란드가 현재까지도 러시아에 이를 가는 카틴 숲의 학살을 계획한 장본인. '''히틀러에게 하인리히 힘러가 있었다면 스탈린에게는 베리야가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베리야는 러시아 제국 수후미 구(오늘날 압하지야)의 메르헤울리(მერხეული)에서 소작농이던 파블레 베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후미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3월에 볼셰비키에 합류한 베리야는 1919년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보안대에서 일했다.
어렸을 때는 일부러 친구의 물건을 훔친 뒤 친구들이 곤란해할 때 자기가 물건을 찾아주면서(!) 명탐정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이때부터 악마 기질이 다분했다.
학교 졸업 이후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설한 비밀경찰 체카에 가입한 베리야는 조지아멘셰비키를 제거하는 작업에 깊숙히 관여했는데 베리야의 임무는 조지아아제르바이잔에서 반동분자의 말살과 제거였다. 그러다가 1922년에 체카의 후신인 GPU 조지아 지부장 대리가 된 베리야는 1926년에 정식으로 지부장이 된 후 처음으로 이오시프 스탈린과 만났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뒤에 스탈린의 눈에 띄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스탈린이 어느 지역 공산당 건물을 지나가면서 정원의 나무가 마음에 안든다고 하자 마침 인근에서 그 소리를 들은 베리야가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의 삽을 빼앗아 들고는 나무로 달려들어 마구 파내기 시작… 그러면서 '''누가 들으라는 듯이,'''

"난 스탈린 동지가 싫어한다면 이 동네의 모든 나무를 다 파내버릴테다!"[3]

라고 외쳐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재밌게 본 스탈린은 베리야가 귀여웠는지 나중에 모스크바로 불러들인다. 또 스탈린의 눈에 잘보인 덕분인지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는다.
이후 베리야는 스탈린과 동맹을 결성한 후 공산당 및 소비에트 정권의 실력자가 되었다. 1924년 8월에 조지아에서 민족주의자들이 공산당에 반대해 폭동을 일으키자 베리야는 최대 10,000명의 사람들을 처형해 반란을 잠재웠다. 베리야는 이 일로 적기훈장을 수여받고 비밀경찰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베리야는 조지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조지아 공산당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한 뒤 193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취임하여 중앙정치계에 발을 내디뎠다. 1935년 베리야는 스탈린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 중 1명이 되어 스탈린을 가까이서 보좌하게 되었다.

2.2. 대숙청과 2차 세계대전


[image]
군 예복을 입은 베리야
모스크바에 입성한 베리야는 소련의 실권자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비밀 경찰''' 지휘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적백내전 당시에도 악명을 떨친 소련의 악명높은 첩보전은 베리야에 의해 더더욱 강해졌으며 사실상 소련의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어 그의 눈밖에 난 이들에겐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탈린은 베리야의 정보를 토대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했고, 그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베리야가 나서 정적들을 실종(?)시키는데 일조했다.
그가 NKVD에서 이룬 업적(?)은 대단했다, 그는 일련의 생산라인처럼 피의자를 잡아들이면 24시간 고문하고 구타하거나 코렁탕을 이용해서 어떤 말이든지 만들어 냈다. 심지어 피해자가 평생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술술 불게 만들었다. '''사디스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베리야는 이런 고문 과정에 자주 참석하여 직접 구타와 가학행위를 즐겼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측근들에게 동참할 것을 강요했고 그들의 치부를 공유하여 절대로 자신을 배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필요가 있는 인물'''들에게는 일명 '죽음의 집'이라 불리는 곳으로 초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우연히' 치명적인 독극물이 묻어있는 지팡이에 긁혀 죽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34년에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에게 암살당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장악을 위해 대숙청을 시작하자 베리야는 이것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기회로 삼았다. 1937년 6월에 베리야는 연설에서 "인민의 의지, 레닌과 스탈린의 당의 의지에 반역하는 자들은 용서없이 분쇄할 것이며 우리들은 이를 적에게 알릴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고 대숙청에 일정 부분 일조했다.
다만 스탈린의 악명높은 대숙청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베리야보다는 전임자 예조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숙청 당시 스탈린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많이 죽였다'''고 생각하고 그 숙청 책임자 예조프를 숙청할 때 앞장서고 자리를 꿰어찬 것도 베리야였다. 웃긴건 예조프도 전임자 겐리흐 야고다를 숙청하고 그 자리를 꿰어찼단 거다.
하지만 대숙청을 주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피를 받을 수 없는 것이 베리야는 예조프를 규탄하면서 공안기관의 가혹행위를 시인했지만, 베리야 휘하에서도 체포와 처형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폴란드발트 3국에서 벌어진 민족주의자의 처형은 그가 저지른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예조프처럼 무식하게 눈에 확 보이도록 엄청나게 죽인 것이 아닐 뿐, 베리야가 죽인 사람 역시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라브렌티 베리야의 화려한 업적 중에는 유대인 학살도 들어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역시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였고 베리야는 그를 대신해서 소련 관료 중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숙청했다. 또한 스탈린과 자신에게 반대하는 인물을 가려내기 위해 소련 내의 모든 우편물을 감시하였다고 하며,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반체제인사들을 모조리 강제수용소로 집어넣어 몇 년동안 강제노역을 시켰는데, 그렇게 강제로 수용된 사람이 무려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2차 대전 중에는 소련군 원수 계급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가 경찰 조직이 군에 흡수되면서 경찰 총수였던 베리야 역시 군 원수로 추대된 이후로 소련 경찰, NKVD나 KGB 인물들은 모두 군 계급과 동일한 계급을 받는다. 베리야는 수용소 죄수를 노동한 노예노동과 전세계에 퍼져있는 스파이망을 동원한 정보수집으로 나름대로 독소전쟁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이나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날짜를 빼돌렸을뿐만 아니라,[4] 나치 독일에서 소련을 위한 스파이망인 레드 오케스트라를 구축했고, 연합국에 대한 첩보활동도 개시하여 처칠, 루즈벨트 외에는 연합군 최고레벨도 그 존재를 잘 모르던 맨하탄 계획까지 그 전모를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극비였던 원자폭탄의 초기 청사진도 빼올 수 있었다.[5]

2.3. 냉전, 스탈린의 죽음, 그리고 드리워지는 그림자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이 더 이상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임시로 합의했던 집단지도 체제가 더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되자 베리야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스탈린이 자신의 최고 측근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2인자인 몰로토프가 스탈린에게 서방 유화론자, 서방에 아부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음모가라고 융단폭격을 당했고 말렌코프도 항공산업을 잘못 이끌었다고 잘리고 주코프도 좌천당하는 와중에 베리야 역시 스탈린에게 두들겨 맞았다. 특히 베리야의 심복인 국가보안부 장관 메르쿨로프가 숙청당한 것이 결정타로 과거 야고다와 예조프가 숙청당할 때의 전례가 답습되는 듯 했다. 베리야는 메르쿨로프 때문에 자신이 스탈린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벌벌 떨었지만 스탈린이 당시에 미워해서 없애려던 사람들은 몰로토프와 미코얀 쪽이라서 베리야는 한동안 무사할 수 있었고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하면서 베리야는 몰로토프, 말렌코프, 흐루쇼프, 불가닌 등과 함께 정권 분할에 끼어들게 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할 때, 베리야는 죽어가는 스탈린 옆에서 제발 말 좀 해달라고 울부짖었고 스탈린에게 거듭 입을 맞추면서 충성심을 과시했지만 정작 스탈린이 죽자마자 흐루쇼프, 말렌코프, 미코얀 등 다른 정치국원들이 울고 있는 동안 싸늘한 태도로 스탈린의 경호대장 흐루스탈료프에게 차를 내오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몰래 스탈린의 별장을 빠져나가 크렘린으로 가버렸다.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정부 최고인 수상, 흐루쇼프가 당의 최고인 당 서기를 맡고 새로운 과두정 체제가 들어서자, 베리야는 제1부수상 겸 정보기관을 맡았다.
스탈린이 죽을 때 보인 행보와 태세 전환 때문에 베리야가 스탈린을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한때 강하게 돈 적이 있었다. 예컨대, 스탈린이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스탈린을 살펴본 것은 말렌코프와 베리야였는데 스탈린을 살펴본 베리야는 스탈린이 코를 고는 것을 보고[6] 스탈린이 자는 줄 착각하여 스탈린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는 경호원들에게 스탈린 동지는 그저 자고 있을 뿐인데 왜 호들갑을 떠느냐? 헛짓을 했으니 각오를 해두어라! 라고 협박을 하는 등 스탈린이 적시에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한 책임이 있긴 하다. 이것이 베리야가 스탈린을 일부러 죽게 내버려둔 것이라는 것이 음모론의 골자인데 몰로토프도 자신의 자서전에 '''베리야, 그놈이 독살한 것임!'''이라고 썼을 정도니 말 다했다. 심지어 흐루쇼프마저 회고록에 스탈린 사후 베리야가 '''"내가 그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여 모두를 이롭게 했다."'''라고 떠벌이고 다녔다고 적어놨다고 한다. 하지만 스탈린 연구의 권위자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이러한 추측에 대해 낭설이라고 부정하는데, 스탈린의 죽음은 워낙 명백한 원인과 뚜렷한 사인이 있었으며 베리야의 행동 역시 측근들을 쥐잡듯 잡던 스탈린의 평소 행동에 비추어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후 베리야를 사형시킬 때도 기소 내용에도 스탈린에 대한 암살죄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만약 추호라도 증거가 있다면 베리야의 목을 딸 때 이만큼 좋은 핑계도 없으니 베리야 독살설이 허구라는 한가지 정황증거가 된다.
각설하고 베리야는 의외로 스탈린식 폭정을 완화하고 고문방지 법안에(!!), 굴라그 수용자 석방에다가 심지어 외국과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베리야는 심지어 동독을 해체하고 평화적이라는 보장만 있다면 독일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으며 발트 3국에 대해서 동유럽 위성국 수준의 자치를 부여하자는 말도 했다! 사실 당시 스탈린 체제의 뒤를 이을 스탈린의 심복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이런 내용들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천시받던 경공업과 농업을 부활시키고, 서방에 대한 유화책으로 전후 복구도 빨리빨리 하고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도 완화시켜서 소련도 이제는 경제적으로 여유있으면서도 어깨도 쭉피게 만들어서 살만한 나라로 만들어야하지 않겠냐는 것은 베리야만의 특이한 생각이 아니었다. 당장 말렌코프도 비슷한 정책을 펼치려고 했다가 실각당했고, 흐루쇼프는 말아먹긴 했지만 하여튼 그걸 모토에 걸고 정국을 운영해나갔다. 그러나 통일된 독일을 만들자고까지 한 것은 당시 과두정 체제 내부에서도 쇼킹할 정도로 막 나간 주장이었고 몰로토프는 대놓고 "그건 1800만 독일인을 미국 관리 하에 넘긴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독일에게 평화란 없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런 소리는 못한다."고 단언하면서 베리야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다른 경쟁자들은 이제까지 그가 스탈린 옆에서 한 짓도 있고 해서 베리야를 불편하게 여겼다. 결국 경쟁자들은 합심해서 베리야를 실각시키고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2.4. 몰락과 처형


[image]
노년의 라브렌티 베리야
베리야는 과거 악행으로 대중, 군부, 당 내부 거의 다수에게 고루 미움을 산 상태였다. 여기에 베리야가 직접 공격할 명분까지 쥐어주니 이때만큼은 흐루쇼프, 몰로토프, 주코프 등 스탈린 사후 1인자의 자리를 노리던 경쟁자들이 모두 합심해 베리야 제거에 나선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베리야의 실책은 정보기관을 이용해 유력 지휘관을 사찰하고, 스탈린에게 고자질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여 군부의 전반적인 원한을 샀다는 점이다. 사실상 2차대전 이후 많은 소련 유력지휘관의 좌천이나 체포에는 그가 맡고 있던 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주코프의 "비리" 혐의라는 것도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일러바친 것이라고. 주코프가 직접 나서서 그를 체포한 것이나, 주코프와는 매우 사이가 안좋았던 코네프조차 이 점에서는 한뜻으로 군사재판에서 베리야에게 사형을 언도했을 정도면 그가 얼마나 군부 인사들에게 원한을 깊이 샀는지 짐작 가능하다.
베리야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고, 테러 활동을 통하여 '''미제와 서방에 협력하였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7] 결국 유죄가 확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매국 행위와 서방 스파이 혐의는 날조된 것이었고 대서방 유화책에 대한 지도부의 반발이 반영된 혐의일 것이다. 죽을 때는 '''하도 살려달라고 울부짖어서''' 재갈을 물리고 총살시켜야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자가 그동안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통쾌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다.
워낙 소련 수뇌부의 사정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데다가 이때는 권력투쟁 국면이다보니 이런 진짜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베리야의 죽음에 대한 야사, 썰이 매우 많다. NKVD의 무력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처리해야 하다보니 무장이 안 되는 공산당 회의에서 당원들이 몰려가 때려서 죽였다던가 게오르기 주코프가 직접 쏴죽였다던가...

3. 일화


  • 오리주둥이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이 상당한 매력 포인트였으며 일설에는 호색한이어서 엔카베데에 끌려간 자신의 남자 형제를 살려달라는 여자를 공갈협박해서 전용기차 안에서 강간했다든가(훗날 아내가 된다...)[8] 페도필리아적인 성향을 보여 요원들을 시켜 맘에 드는 소녀들을 길가에서 마취시킨 후 마취상태에서 강간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새디스트라고 해도 옳을듯 싶다. 물론 베리야의 유족은 비열한 흐루쇼프의 술책이라며 그를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 강철권력》에서 보면 스탈린이 자신의 딸 스베틀라나와 베리야가 같이 있는 것이나 어울리는 것에 대해서 엄청 신경썼다는 내용을 보면 100%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베리야의 '아내 강간설'은 진실이 아니다. 당사자가 상세하게 반박했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베리야의 아내' 소문단 참고 바람.
  •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에 의하면, 소련 과학자 쿠르차토프와 그의 팀이 원자로 가동에 성공했을 땐 너무 흥분해서 연쇄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원자로로 뛰어들어가려고 했고(물론 주변의 만류로 방사선에 끔살나는건 모면했다),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 외곽에 있는 사막에서 마침내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을 때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자마자 4년 동안 윽박지르기만 하던 쿠르차토프를 와락 끌어안았다고 한다. 그로서는 아주 드문 감정표출이었다고. 실험중 폭발로 부상자와 사망자가 널부러져 있는 연구소 현장에서 "이 쓰레기들을 빨리 치우고 연구를 계속해라!"라고 다그쳤다던 이 악랄한 인간도 결국 스탈린의 그늘 아래 있었던 것.
  • 하나회에서 비슷한 행적을 걸었던 장세동전두환의 베리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독재자의 보안담당 측근들에게 붙는 하나의 상징화가 된 감이 있다. 배우 이순재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유명한 김병욱 PD에게 "내가 지어준 별명이 옛 KGB 총책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다. 그만큼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배우들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 이 양반 덕에 소련은 세계 최초로 전자장치[9] 없는 도청기를 제조, 보유하게 되었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냉전이 막 시작되었던 1945년, 베리야는 소련의 보이스카우트를 통해 미국의 국장[10]이 새겨진 원형 목판 벽장식을 선물하고 이 선물은 주 소련 미국 대사의 사무실 벽에 걸린다.[11] 그리고 그 안에는 러시아의 음향물리학자이자 첼리스트인 레온 테레민(Léon Theremin)[12]이 베리야의 의뢰[13]를 통해 설계한 세계 최초의 전자장치 없는 도청기가 안에 심어져 있었다. 이 도청기의 원리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안에 있는 도청기 내의 얇은 판이 청진기 역할을 해 대사 사무실 내의 목소리를 진동시킨다. 그 진동을 건물 밖에 주차된 비밀 밴 안에 설치된 마이크로파 발전기로 그 도청기에 일정한 마이크로파를 쏴주어 그 진동에 대한 반사파를 유발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반사파를 잡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반사파를 통해 전달된 소리를 전자적으로 변환시켜 듣는 것뿐이고, 만약 마이크로파 조사를 멈추면 장치가 비활성화되어 잡을 수 없게 된다. 이 도청기는 7년 동안 다섯 주소 미국 대사의 어깨 너머를 거쳐갔고 1952년에 결국 발각, 미국 첩보기관 휘하 연구소에서 철저히 연구/분석되어 첩보기술에서의 연구비 경쟁을 유발하였다.(#) 해당 도청기와 그 도청기가 숨겨진 미국 국장 벽장식은 현재 NSA 암호학 박물관에 소재되어 있다고.

3.1. 베리야의 가족들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내 강간설'에 대하여 니나 게게치코리(베리야의 아내)는 1990년에 신문기자를 초청해 직접 반박했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 집과 감옥을 오가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한 그녀의 외삼촌이 그루지야 소비에트에서 고위급 관직으로 승진하여 전근했는데, 석유공단과 체카에서 동시에 근무하던 라브렌티가 왕년의 동지였던 그녀의 외삼촌을 자주 방문하면서 니나와 자연스럽게 눈이 맞았으며, 어느 날에 데이트를 요청해서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운 정부가 석유공단의 노동자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석유를 채굴하는 기술을 배워 귀국해야 하는데, 기혼자여야 가능하므로 그녀에게 진심으로 청혼한 것이다. 때마침 니나는 외삼촌의 집에서 궁상맞게 얹혀사는 처지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라브렌티의 청혼을 수락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혼인했다는 것이다.
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회를 다스린 시기에 니나는 소련 농학원의 과학자로서 20년간 평범하게(?) 근무했다. 최고위급 관료의 부인으로서 국내외의 온천에서 휴가를 보낸 것은 덤이다. 또한 1990년대까지도 스탈린과 베리야의 다양한 업적을 열렬하게 옹호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에게 관심이 생겨서 베리야의 집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하자 스탈린은 이를 굉장히 불편히 여겨 베리야를 쌍심지를 돋우고 노려보게 되었다. 스탈린이 열받았다는 것을 직감한 니나는 즉각 스베틀라나를 찾아가 세르고는 너를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스베틀라나가 더 이상 집으로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세르고 베리야는 라브렌티가 사망한 후 어머니 니나와 함께 스베르들롭스크로 추방당했다. 이후 1964년에 석방되었다. 세르고는 어머니와 함께 베리야를 일관되게 옹호했다. 베리야의 성추문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4. 등장 매체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평행세계의 경우 조지아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충견 1로 나오는 경우가 잦다.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스탈린을 부하로 두고 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유리의 아내 라리사가 "잘한 것이라곤 베리야를 제거한 것 밖에 없는 흐루쇼프"라고 깐다. 그런데 그때는 브레즈네프 집권기로 러시아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있는 KGBGRU의 정보원까지 있는데 한 말이다.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6.25 전쟁 시점에서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일본에 비밀리에 방문해 더글러스 맥아더와 비밀 회담을 가져 동북아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북한과 중국을 패배시키는데 일조한다. 그 뒤 스탈린이 뇌일혈로 쓰러지자 '''의식을 잃은''' 스탈린에게 치료할 지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묻고 당연히 대답이 없었으니 치료를 거부했다고 내버려두고 이후 스탈린의 사망을 축하하며 파티를 벌이는데, 알고 보니 '''스탈린이 의사와 미리 짜고 죽은 척 연극한 것이었다.''' 당연히 숙청...
유녀전기에선 베리야에 해당되는 인물인 로리야라는 인물이 나온다. 비교적 유능하게 나오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원판처럼 페도필리아인데다 주인공 타냐의 스토커이기까지 한, 역시나 매우 글러먹은 인간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소련 장관진의 한명으로 등장한다. 대숙청 국가집중에서 예조프 숙청을 선택하면 기용할 수 있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베리야의 숙청과 몰락을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는 스탈린 사후 권력을 얻기 위한 베리야의 술책과,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흐루쇼프의 대결 구도로 흘러간다. 실제 역사대로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에 소녀들을 밝히는 호색한 모습을 보이다가,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한 흐루쇼프의 기습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14] 이후 살려달라 울부짖으며 추태를 부리다가 총맞고 시체마저 깔끔하게 불타 사라진다.[15] 배우는 사이먼 러셀 빌.

[1] 라브렌티 파블레스제 베리아(lavrent'i p'avles dze beria).[2] 라브렌티 파블레시스키 베리아(lavrent'i p'avleš ski beria).[3] 비슷한 이야기로 괴링은 "총통이 1+1=3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정답이다"라는 병맛을 시전하였다.[4] 물론 이는 일본에 있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나 어쨌든 베리야의 감독하에 있던 인물이라...[5] 독일의 방첩대들이 병맛이긴 했지만, 독일 정보기관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던 베리야의 정보전 능력을 보면 아주 무능한 인물은 아니다. 물론 이 자에게 무고하게 숙청된 소련 군인들을 보면 정보전에서 세운 공로도 많이 사그라든다. 할힌골 전투 직전에는 주코프도 숙청하려고 했다가 주코프가 대승을 거두자 슬그머니 제외하기도 했다.[6] 실제로는 정말로 코를 골았다기보다는 의학적 지식이 없던 베리야가 체인-스톡스 호흡을 코 고는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7] 여기에 또 재밌는 일화가 있다. 재판을 진행할 때 증인으로 참석한 사람은 베리야에 의하여 굴라그로 끌려간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서 베리야의 악행을 술술 불자 재판장에서 베리야가 깜짝 놀라서 "당신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라고 외치자 그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네 기관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지."'''[8] 좀 불확실하다. 아내가 된다는 이야기는 스베틀라나의 회고록에서 조금 언급되는 게 전부다. 스베틀라나의 회고록은 관공서의 유언비어도 기록했기 때문에 그릇된 정보가 많으니, 독자들은 반쯤만 믿어야 한다.[9] 배터리나 전선같은 것들[10]흰머리수리 모양이 맞다.[11] 선물한 명목은 '2차대전 동맹국에 대한 우호의 제스처'라나...[12] 세계 최초의 신디사이저테레민의 발명가이자 그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13] 애초에 레온 테레민은 당시 KGB의 비밀 연구소에서 강제 연구에 동원되고 있었다. 말로만 의뢰였던 거지 실제로는 강제 연구 과제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난이도 높은 것으로.[14] 베리야는 그때까지 자기가 저지른 숙청 짓거리와 스탈린 사후 권력을 얻기 위한 여러 부적절한 행동 때문에 소련 수뇌부 인사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고 있었다. 이중 백미는 소련 수뇌들이 스탈린의 장례식을 민중이 못보게 막은 책임을 베리야에게 물으려하자 베리야가 '난 너희들이 한 짓을 전부 알고 있다.'라며 욕을 퍼부은 일. 특히 주코프는 소련군보다 NKVD의 세력을 늘리려는 베리야를 아주 못마땅하게 봐서 흐루시초프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한다.[15] 베리야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설들을 다 써먹었다. '회의에서' '주코프'가 '때려 패버리고' 창고에서 약식으로 '재판'을 진행한 다음에 쏴 죽였다. 시체는 석유를 붓고, 담뱃불로 태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