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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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민용호(閔龍鎬)
초명
민진호(閔瑨鎬)
이명
민진호(閔晋鎬)·민구호(閔毬鎬)
자 / 호
문현(文見) / 복재(復齋)
본관
여흥 민씨[1]
생몰
1869년 10월 29일 ~ 1922년 8월 23일
출생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2]
사망지
전라북도 무주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민용호는 1869년 10월 29일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에서 아버지 민치겸(閔致謙)과 어머니 연안 이씨 이병룡(李秉龍) 사이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종의 주선으로 명성황후의 친정 집안인 삼방파(三房派)의 족숙 민치우(閔致禹)에게 양자로 입적됐다가[3] 현재는 환본(還本)되었다.#
그는 12살 때 성균관 생도가 되었고 20살 때 고종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학 유생의 응제(應製)를 행할 때 장원을 차지해 직부전시(直赴殿試)[4]되었다. 그러나 시세가 어지러워지고 과거제도가 문란하자 전시를 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닦다가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11월에 단발령이 공표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1895년 음력 11월 하순 여수에서 의병을 일으킨 그는 여러 의병진과 합동한다면 지휘권이 분산되어 제대로 지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봤고, 무장과 훈련이 모두 부족한 의병으로 일본군과 대적하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고 강원도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1896년 1월 15일 원주에 도착한 민용호는 이곳에서 의병을 대거 모집한 후 강릉으로 들어가 관동의진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단양전투을 치른 뒤 병력의 손실이 컸던 안승우가 사람을 보내 군사를 합하자고 요청하자, 민용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장군이 단양에서 계책을 시험하여 단번에 적의 사나운 세력을 무찔렀으니 난적으로 하여금 그 영용(英勇)이 무서운 줄을 알게 할 만합니다. 또 보잘것없는 이 몸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친히 심방해서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 한다 하시니, 내가 비록 어리석지만 감히 공손히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오리까. 다만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 있으니 저 영동(嶺東) 9군에는 곰과 호랑이 잡는 포수들이 집마다 있는데 이들을 빨리 수집하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무찌르겠습니까.

지금 영동이 머지 않은 곳에 있으니 나는 영을 넘고, 공은 영 서쪽과 4군을 돌면서 혹은 손발의 형세를 이루고 혹은 입술과 이가 되어야만 적의 머리를 벨 수 있고,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며, 한곳에만 모여 있어 손을 묶여 확장할 계책이 없고 비용은 많아 지탱하기 어려운 탄식이 있는 것에 비한다면 이해가 판이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재량하여 아뢰는 말씀을 들어주신다면 나는 안심하고 노력하여 하고 싶은 일을 다할 것이며, 혹은 하늘이 도와 살아 만나서 군막에 나아가 절을 드리게 된다면, 가시를 지고 무릎을 꿇고 원주에서 당돌했던 처사를 사죄하겠사오니 그렇게 알아주시오.

민용호는 예정대로 강릉으로 들어가서 영동 방면의 의병들과 세력을 합하고 포수들을 모집해 관동의진을 구축하고 이병채(李秉採)·최중봉(崔重峰) 등 의병장들과 함께 부서를 정하며 포고문을 각 지방에 보내어 외적과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그는 관북 방면으로 진출하여 그곳의 의병과 힘을 합치기로 하고 북상하면서, 동시에 원산을 공격해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1896년 3월 4일 행군을 개시한 그는 러시아공사관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아, 슬픈 일입니다. 작년 8월의 변과 11월 16일의 화는 우리의 우리의 의관제도를 없이하고, 우리의 머리털을 자르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지신명인들 어찌 크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 의기의 인사들이 창의하여 토벌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러는 중에 지금 우리 황천자께서 귀진(貴陣)에 왕림하게 되었사오니(아관파천) 이 어찌 마른 수레 자국에 있는 고기에게 물이 되며, 말라 가는 움싹에 비가 내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다행히도 태산같은 은혜와 하해 같은 덕택을 드리워서 잔폐한 이 나라로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사직을 안정하게 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또한 그는 원산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지금 왜적을 토벌하는데 혹시라도 귀국인을 경동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

3월 9일 고성에 도착한 관동의진은 이틀 동안 머무르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3월 11일 고성을 떠난 의병대는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을 구경하면서 행군을 지속해 그날 저녁 포천에 도착했다. 이때 포천에 있던 의병 130명이 합세하면서 전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후 북진을 계속한 의병대는 3월 17일 원산으로부터 7, 80여리 떨어진 길목에 위치한 안병군 신평면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군대를 3개로 나눠서 김의선(金意善)이 이끄는 한 부대는 화천 포구에, 전석영(全錫永) 등에게 한 부대를 줘서 비운암(飛雲巖)에 주둔하게 했다. 그는 이들 별동대에게 안변읍을 공략하여 원산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관동의진은 뜻밖에 폭우를 만나 비가 그칠 때까지 유진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원산에서 파견된 일본군은 만반의 공격태세를 갖춘 뒤 3월 19일 일시에 의병을 기습했다. 이날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의병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그러나 의병이 가진 화승총은 비가 올 때는 사용이 불가능해 전투가 지속될 수록 전황이 불리해졌다. 의병들은 백병전까지 벌여가며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끝내 사방으로 패주했다.
민용호는 이 패배에 심하게 좌절했고 한때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통천으로 퇴각하여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강릉으로 회군하면서 의병 모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2월 16일 설악산을 넘어 양양군에 도착한 그는 고성에 일본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별영장(別營將) 김연상에게 500명의 병력을 주어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그런데 3월 중순경,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거병 초기에 뜻을 함께 하고 민용호가 원산으로 원정을 떠날 때 강릉 수비를 맡고 있던 이병채가 강릉을 약탈하고 공금 7천 금을 탈취하는 등 난행을 일삼자 부중의 유생들이 별도의 의소를 세우고 이병채와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민용호는 4월 3일 양양에서 선편을 이동해 강릉 외곡의 연곡으로 남하했다. 그는 즉시 강릉 부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병채가 입성을 거부했다. 이에 민용호는 할 수 없이 2리 정도 물러나 유진했다. 얼마 후 민심이 불리한 걸 깨달은 이병채가 스스로 민용호에게 투항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민용호는 그를 처형하고 싶었지만 큰 패전을 한 뒤인데다 동료끼리 서로를 해치는 걸 바라지 않아서 용서했다. 하지만 이병채는 4월 22일에 전몰자 위령제가 거행되는 틈을 타 연곡으로 퇴각한 뒤 서울로 가버렸다.
4월 11일 별영장 김연상이 고성으로 남하한 200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기습 공격해 수십 명을 사상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4월 20일에 일본 선박 3척이 풍랑을 만나 묵호항에 정박해 있다는 연락을 받은 민용호는 선봉장 강우서, 수성장 민동식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묵호로 출동하여 포구에 매복한 뒤 동이 틀 무렵 일시에 공격하여 선박 3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이즈음 춘천관찰사에 임명된 이재곤(李載崑)이 경군 300여 명을 거느리고 임지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즉시 관군을 돌려보내고 의병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민용호는 춘천관찰사를 의병으로 끌어들여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이석범(李錫範)을 춘천으로 밀파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밀서를 전했다.

초기에 합하(閤下:이재곤)가 300명의 경군을 거느리고 관찰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제장과 더불어 가로되, "모 합하는 조야에 충의가 뛰어났기에 반드시 할 일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며, 전 관찰사가 단신으로 해를 당했다고 하여 의진을 핍박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또 자신을 보위하기 위한 계책도 아니리라"하고, 장차 합하의 지휘를 받고자 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기다렸더니, 문득 경병을 서울로 보내고 단지 강개에 찬 선비들을 위안한다 하니, 대체 합하가 의진의 미약함을 보고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그렇게 한 것입니까?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입니까? 의병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가 공론이 두려워서 그친 것입니까? 왜의 위세가 두려웠으나 후회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까? (중략) 경향의 관군으로 하여금 힘을 합쳐 왜를 토벌하여 속히 사람들의 의혹을 깨우쳐 주십시오.

그러나 이재곤은 관동의진을 해산하라는 회신을 보내왔고, 민용호는 이재곤과 힘을 합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5월 11일 낙동병참 소속의 일본군 50여 명과 대구진위대 소속의 관군 80여 명으로 구성된 관군, 일본군 혼성군이 풍기를 지나 삼척 황지령을 넘어서 강릉으로 북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민용호는 중군장 전석영에게 300명의 병력을 줘서 백봉암 아래에 매복시켜 놓고 일본군의 북상을 기다렸다가 협공해 이들을 격퇴시키게 했다. 전석영은 이 임무를 잘 수행해 상당량의 총기류를 노획했다.
그러나 강릉의병 휘하의 횡성의장을 맡고 있던 권인하(權仁夏)가 모반을 일으키면서 민용호는 위기에 빠졌다. 권인하는 강릉의 군권을 탈취하기 위해 본진의 참모들을 유인, 체포하고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때마침 강릉의병과 합세하기 위해 다가오던 110명의 양구의병을 돌려보냈고, 강릉의병에 합세하기 위해 오던 황기룡(黃騎龍)의 의병대를 대관령 아래에서 가로챘다. 여기에 유격장 서순학(徐淳學)도 권인하에게 가담한 참모사 김형진(金亨鎭)에게 포섭되어 휘하 군사를 이끌고 강릉 본진을 탈출했다. 민용호는 상황이 이렇듯 악화되자 한 때 강릉을 포기하려 했지만 마침 춘천의진의 순무장 장한두(張漢斗)가 강릉의진에 가담한 후 반격을 가해 권인하, 황기룡을 체포하고 김형진을 처형하면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다만 서순학은 야밤에 도주해버려 처벌하지 못했다.
민용호는 권인하 모반 사건을 수습한 뒤 의진의 편제를 개편했다. 이무렵 아관파첩 후 친일 관료들이 대거 숙청되거나 해외로 망명한 후, 조정은 각지에 선무관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지시를 전하게 했다. 이에 따라 대다수 의병대가 해산했지만, 관동의진은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활동했다. 관동 지역으로 파견된 이도재(李道宰)는 의진 해산을 종용하는 서신을 민용호에게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단발령이 중지되었고 국치를 이미 갚았으니 의당 임금의 뜻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라"고 전했다. 이에 민용호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국치를 과연 이미 갚았은즉 종사의 복이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고 구차히 운운한다면, 병란의 참상이 이로부터 더욱 커져 수습할 사람이 없게 되리니 합하가 어찌 능히 마음을 편히 하고 화를 끌어내겠는가. (중략) 아, 10부(部)의 도적들이 혹 죽고 혹 도망한 것을 어찌 원수를 갚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협박에 못이겨 따르는 정치에 불과하며 왜적이 아직도 우리 땅에서 천지간에 마음대로 군림하고 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한편 민용호는 1896년 3월경 김도현이 의병을 이끌고 찾아오자 맨발로 달려와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선봉장으로 임명해 중용했다. 민용호는 김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양에 사는 김도현은 용사 수백인을 모아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왜노를 포착하였는데, 각 의병진에서는 그의 가문이 미천하다 하여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다. 이에 스스로 돌격장이 되어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장군을 초청하니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왔다.

또한 김도현은 민용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강릉에 도착하니 민대장이 친히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들에 나와 기다린다. 함께 들어가 옆에 앉아서 보니, 용모는 단정하고 뜻은 굳으며 그 글이 또 날카로워 가히 의리를 성취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당포를 주어 우리 군사의 갖가지 옷을 만들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또한 춘천의병이 해산된 뒤 잔여 병력을 이끌고 있던 이경응도 4월 하순에서 5월 초순 사이에 합세하면서, 관동의진은 전력을 어느정도 회복했다. 5월 중순경 신임 관찰사 서정규(徐廷圭)가 경군을 이끌고 홍천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을 접한 민용호는 선봉장 강우서, 신무섭 등을 급파해 강릉 진입의 요로인 동산리, 몰잇재를 수비하도록 한 뒤 김안수에게 북읍의 의병을 동원해 경군의 대관령 진입을 차단하게 했다. 그런 후 서정규에게 통문을 보내 의병을 공격하는 것은 의리에 배치되며 왜적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정규는 이를 묵살하고 오색령을 넘어 양양으로 들어왔고 5월 24일 새벽 강릉부중의 의병 본진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관동의진은 이들을 상대로 수성전을 벌였지만 전력의 열세로 패하고 강릉을 버린 뒤 임계로 물러났다. 얼마 후, 임용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해 북상하기로 결정하고 삼척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강릉을 장악한 관군은 의병의 뿌리를 뽑기 위해 이들을 추격했고, 4월 14일 새벽에 삼척에 이르렀다. 이에 민용호는 성 안에 병력을 매복하고 삼척 주변의 여러 숲과 계곡에 군대를 배치한 뒤 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관군이 성을 공격하자 일제히 들이치게 했다. 이날의 전투는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관동의진이 유리한 지형을 점해 전세가 유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탄약이 고갈되어 전세가 불리해졌고, 민용호는 의병대를 퇴각시켰다.
이 전투에서 관군은 강릉으로 생환한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의병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김도현은 이때 민용호와 결별하고 10여 명의 의병만 거느린 채 영양으로 가버렸다. 이후 민용호는 황지령을 넘어 정선, 임계를 지나 다시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는 강릉에서 개화정치를 시행하려 하던 울릉도참서관을 처형하고 울릉도에 자신의 조치를 정당화하고 망국적 개화시책을 비난하는 격문을 보냈다. 이즈음 춘천의병의 별동부대인 성익현(成益賢)의 의병대가 관동의진과 합세하고자 통천을 지나 강릉으로 남아하다가 경군의 공격을 받고 간성으로 후퇴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민용호는 성익현과 합세하기 위해 북상하여 연곡, 양양 방면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간성에 진을 치고 있던 김홍권의 관군이 역습을 가해오자 패배하고 순포로 후퇴했다. 관군은 이들을 재차 추격해 순포에서 비가 오는 틈을 타 기습했지만, 의병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한 결과 관군측의 사상자와 포로가 2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갈수록 관군이 조여들어오는 데다 각지의 의병대가 해산되어 고립무원 상태가 되자, 민용호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을 해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4월 12일 관찰사 서정규, 참서관 조관현, 중대장 김홍권이 경병 200여 명을 몰고와서 신 등을 비적이라 이름하여 무고히 얽어매고는 몰살시키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 우리 임금의 자식이 아닌 자가 없으니 자신들 서로를 공격하여 만세의 수치와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여 몇 번이나 애소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아 신 등이 부득이 대적한 것입니다. 서정규, 조관현, 김홍권 등이 양양, 건성으로 물러나 예수교도와 합쳐 우리 의병을 또 진멸코자 하니, 나아가고자 한즉 임금의 군대에 항거한다는 오명을 받을 것이오, 물러나고자 하니 군부의 치욕을 설복하기가 어렵게 되어 신등의 처한 바가 실로 낭패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금일 서정규 등의 내침이 결단코 전하의 본의가 아닌 줄을 아는 까닭에 의병을 해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편 민용호는 친족들로부터 의진 해산을 권유하는 서신을 계속 받았다. 재종손 민항직(閔恒稙)은 "한 손으로 하늘을 받쳐도 꺾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니,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고, 재증손 민병성(閔丙星)도 "때를 기다려 움직임만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6월 24일에 양양에 주둔해 있던 관군을 기습해 중대장 김홍권 이하 80여 명의 관군을 사살했다. 그러나 얼마 후 관군이 우천 속에서 반격을 가해왔고, 관동의진은 패배를 면치 못하고 강릉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양양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던 중군 최중봉은 이 와중에 관군에게 사로잡힌 뒤 처형되었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 항전의 여건이 악화되고 연이은 전투로 인한 피로가 겹친 데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어 의병 활동에 큰 지장이 초래되자, 민용호는 강원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896년 8월 초순, 민용호는 경상북도 울진으로 퇴각했다. 그런 중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이 서북행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 역시 서북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의진의 북행을 알리는 포고문을 휘하 각진에 발송하면서 앞으로의 항전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저 서북은 옛날부터 천하의 강병이라 불리어왔고 중국은 일찍부터 서해의 맹주가 되어왔다. 몸소 친히 따르는 군졸 약간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호소하여 병력을 얻은 즉 이들을 몰고 동쪽으로 달려와 서북의 의사와 강졸들을 받아들여 일시에 진격한다면 적의 우두머리를 벨 수 있으리라. 대저 이와 같이 된다면 대의를 펴고 만인을 유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보다 더한 다행이 있겠는가.

민용호는 황지령을 넘어 인제로 북상했다. 이때 장마가 계속되는 걸 보고 "우리가 무슨 죄가 있길래 하늘이 또 비를 내리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북행에 동참한 이는 500여 명이었으며, 성익현, 이경응, 권인하, 신무섭 등이 각기 군사를 분담, 통솔했다. 그러나 인제군 귀둔에 이르렀을 때, 관군의 공격을 받고 일대 타격을 입었고, 그는 나머지 병사들을 수습해 인제군 서화면 용상으로 후퇴했다. 이후 호우를 무릅쓰고 행군을 지속해 회양 화천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다섯 고을을 모아 전력을 증진시켰다. 민용호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통구포로 이동해 도강을 끝낸 뒤 도강에 사용된 선박들을 파괴하고 행군했다. 8월 9일에는 평앙읍으로 이동했고, 심북 김원변(金元變)을 서울로 파견해 조정의 형편과 각국의 동정을 정탐하여 보고하게 했다.
이어 400 내지 500명을 이끌고 곡산에 도착한 민용호는 군수 이민하(李民夏)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8월 8일 매복시켜 놓은 관군의 기습으로 패주해 의병 40~50명을 잃었고 문성으로 퇴각했다. 이때 군사를 수습해 보니 14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성에서도 관군의 공격을 받고 여러 장병들을 잃은 그는 북행을 지속하여 함흥으로 진군해 함흥관찰사서리 김택수(金宅洙)를 축출한 뒤 함흥을 점령했다. 그러나 홍천을 지나 북청에 피신한 김택수가 관군을 이끌고 함흥을 공격해오자, 성 안의 관군에 여기에 호응했고 의병들은 성을 탈출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신무섭 이하 19명은 미처 피하지 못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민용호는 잔여 의병대를 이끌고 청산암을 넘어 삼수로 들어갔다. 하지만 김택수가 계속 포군을 동원해 자신들을 추격하자, 민용호는 압록강을 건너 백두산 아래에 거주하는 청인과 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10월 5일 무장한 청인 수십명의 도움으로 최문환의 인솔 아래 잔여 의병들이 무사히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민용호는 압록강을 건넌 뒤 휘하 의병을 이양희에게 맡기고 심양으로 향했다. 그는 청나라의 구원을 기대했지만 청국으로부터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받자 의병을 부득이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풍진세상 나아온지 이미 해가 되었건만

일장 승패는 하늘의 뜻이로다

관동자제를 그대들이 맡으시면

군마타고 돌아와 다시 채찍 잡으리라

1896년 12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관서의 유명한 유학자 박문오(朴文五)가 강학을 펼치고 있던 태천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박문오와 교제한 뒤 1897년 3월 평안도 선천군에서 중국배를 타고 톈진으로 가서 위안스카이를 만나 일제를 구축하는 데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중국에서 하릴 없이 세월을 보내다 그해 8월 고종으로부터 소환 조칙을 받고 겨울에 귀국했다.
민용호는 귀국한 뒤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하는 황국협회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1898년 하반기 보부상의 조직인 상무사가 설립되자, 1899년 평안북도 도공사원(都公事員)에 임명되어 영변에 부임하여 압록강 국경지역까지 상무사 조직을 확대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자 그해 7월 서울로 귀환했고, 희릉참봉에 제수되었다. 1901년 3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가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을 비롯하여 베트남까지 여행한 뒤 1902년 여름에 귀국했다. 이후 1902년 10월 명성황후 천릉도감을 지냈고 1903년 중추원의관과 위원군수를 지냈으며, 그해 12월 비서원승을 지냈다. 그러나 국운이 갈수록 기울어지자 관직을 은퇴한 뒤 산천을 떠돌며 은거하다가 1922년 8월 23일 전라북도 무주군의 어느 농가에서 치료 도중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관동창의록>을 남겼는데, 이 저서는 현재 강원도에서의 을미의병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민용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우후공파 27세 '''호(鎬)''' 용(鏞) 항렬.[2] 여흥 민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민치방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양자로 입적되었을 당시에는 족보상으로 명성황후와 7대조가 민광훈(閔光勳)으로 같아서 14촌 지간이었다.[4] 합격자의 순서를 가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 직접 응시할 자격을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