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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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도현(金燾鉉)
이명
김도현(金道鉉)
자 / 호
명옥(鳴玉) / 벽산(碧山)
본관
김녕 김씨
생몰
1852년 7월 14일 ~ 1914년 12월 23일
출생지
경상도 영양현 청초면 소청리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소청마을)[1]
사망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상대산 관어대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쳥년기
2.3. 을미의병
2.4. 대한제국 시기
2.5. 을사의병
2.6. 순국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김도현은 1852년 7월 14일 경상도 영양현 청초면 소청리(현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소청마을)에서 부친 김성하(金性河)와 모친 한양 조씨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김녕 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의 23세손이고,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사육신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이며, 선조 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김응상(金應祥)의 11세손이다. 그의 가문은 정 3품 벼슬을 지낸 김응상 이후로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학을 중시하는 사대부 집안의 전통을 계속 이어갔으며, 부친 김성하에 이르러 통사랑(通仕郎)으로 소경원(昭慶園)[2] 참봉을 지냈고 영양군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인 한양 조씨 조언호(趙彦豪)의 여식과 결혼하면서 영양군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김도현은 유년기에 조부 김하술(金夏述)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부 김하술은 생가 근처에 괴암서당(槐巖書堂)을 열었고, 김도현은 이곳에서 글을 배웠다. 김도현은 후에 <괴암서당>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조부의 뜻을 기렸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때 이 땅에 터를 잡아

괴암 한집으로 세상에 나갈 자리로 삼았네.

서로 이어진 검각산은 기둥을 이루어 지탱하고

띠처럼 능담 둘러 마을을 지었네.

공씨의 뜰에서 농사를 의론하며

동생도 학업에 뜻을 두고 나무하고 고기 잡았네.

남아는 스스로 기원할 금도가 있으니

꽃그늘로 옮겨가 다시 글을 읽어야겠네.

김도현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집안에서 조부와 부친의 유교적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다. 재종제 김태현(金台鉉)의 <유사>에는 김도현의 어린시절에 관한 다음 일화가 실려 있다.

벽산은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면 나무를 깎아 병사를 만들고, 모래로 그림을 그려 진을 치고, 돌을 모아 성채를 만들어 군진놀이를 하였다. 조부께서 이를 보고 후일 우리 가문을 일으킬 아이라고 칭찬했다. 벽산이 8살 때 종이 두 폭에다 용과 호랑이를 그려서 용호전을 시험하기도 하고, 마을 앞 개천에서 돌로 둑을 쌓고는 '수중기일성(水中起一城)'이라는 글을 지으니 조부는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김도현의 친구 권한모(權翰模)의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한 번은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는 데 한 아이가 물에 빠졌다. 이에 함께 놀던 아이들은 모두 겁이 나 달아났다. 그러나 벽산 만이 혼자서 급히 뛰어들어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줬다. 또 한번은 다른 아이와 힘겨루기를 하였는데, 손을 한 번 휘두르니 그 아이가 멀리 나가 떨어져 기절해버렸다. 이 일이 있고 그는 다시는 힘겨루기 놀이를 하지 않았다.


2.2. 쳥년기


1864년 7월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 김도현은 주로 독학으로 학문을 닦으며 포부를 키웠다. 청년기에 접어들 무렵엔 안동, 예안 등지의 퇴계학통에 속한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특히 안동의 권세연이만도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1882년, 31살이 된 김도현은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 그러나 과거가 매우 문란해진 것을 보고 한탄을 금치 못했고, 마침 임오군란까지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했다.
1886년 마을에 괴질이 크게 일어나 동민 모두가 산야로 피신했다. 이때 김도현은 홀로 환자를 돌보는 한편 시체를 손수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등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1892년 <퇴계선생문집>을 구해 읽은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도덕과 문장을 고금에 떨치고

요금의 끊어진 현을 마음으로 미루어 회복했네.

하늘과 땅의 이치 빨리 성취하여

하도와 낙서는 천년의 신묘함이 마음과 함께 했네.

맑은 금회는 풍월에 있고

향기로운 광경에 초화가 무성하네.

추생이 어찌 감히 표범을 엿볼 수 있으랴.

책 속에 좋은 말씀은 엄연히 임하신 듯하네.

독퇴도선생문집유감(讀退陶先生文集有感)

또한 어지러운 시국을 한탄하며 <탄시사(嘆時事)>를 지었다.

동구에 풍랑은 이미 해를 넘기고

밤을 깊고 깊은데 달마저 기울었네.

세상 길을 갈래 많아 살만한 땅 찾기 어려운데

백성들은 하소연할 길 없어 아득히 하늘만 부르네.

꽃 같은 강호에서 어찌 원하는 군대를 얻을 수 있으랴

초야에서 부질없이 밝은 인연을 생각하네.

구름같은 오랑캐 속에 앉아 긴 한숨 쉬워보지만

조정에 가득한 소인들 그 어찌할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김도현은 상청리의 뒷산인 검각산에 석성을 쌓아 동학 농민군 침범에 대비했다. 이후 검각산성은 그가 의병을 일으킨 근거지가 된다.

2.3. 을미의병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도 의병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 1895년 음력 11월 30일 종제 감한현이 영양읍에서 돌아와 "각 고을의 수령들이 단발령에 의해 머리를 강제로 깎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의병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그는 1895년 음력 12월 1일 안동으로 가서 유원엽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을 만나 시국에 대해 논의한 뒤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이후 12월 3일 이웃 마을인 입암면 신사리에 살고 있던 친구 권한모를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했다. 권한모는 급박한 형세를 들어 어려운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뜻을 밝혔지만 김도현이 뜻을 꺾지 않자 마침내 받아들였다.
12월 9일 영양읍에서 통문을 띄워 의병들을 불러모은 그는 고을 선비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12월 11일, 영양 일대의 유생들이 향회를 열었고, 김도현과 오석인, 조병희, 조영기 등 유생 4명이 선발되어 안동과 예안 일대의 정황을 둘러본 후 의병을 일으키기로 최종 합의했다. 12월 14일 김도현과 조영기가 안동으로 떠나 권세연과 안동의진을 둘러봤다. 김도현은 진영을 살펴보고는 탄식했다.

"무슨 진세가 이렇게 허술한가?"

다음날 이만도의 선성의진을 둘러본 그는 다음과 같이 호평했다.

"대장 이만도와 부장 이중린은 위의가 정숙하고 언론이 준절했다."

12월 16일, 김도현은 조영기와 함께 영양으로 돌아오면서 다음날 열리는 대향회를 기해 의병진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2월 15일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안동의진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도현은 곧 격고문을 돌리고 창의할 뜻을 굳혔지만 부친의 만류로 중단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영양 일대 유생들을 만나고 장정들을 규합하는 등 창의를 모색했다.
1896년 정월 초하루, 김도현은 안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벽산선생창의전말>에서 자신이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병신 정원 초하룻날 두 손님이 동쪽에서 찾아왔으니 그 하나는 곧 유시연이다. 그는 나를 위해서 청량에서 거의할 것을 말해주었다. 이튿날 이동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중략) 약 4일 후 갈현에서 서로 기다렸다가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며, 그 뒤에도 청량에서 왕래한 사람이 있었다. 약속한 기일이 되자 나는 내 아우와 종제, 그리고 일가 사람 및 마을 사람 19명을 데리고 오후에 갈현에 다다르니 이미 황혼이었다.

순감 하나를 잡아가지고 밤에 어천을 지나 두곡에 다다라 밥을 먹으니 닭이 울었다. 이에 일찍 길을 떠나 산성을 넘어서 청량으로 들어가니 과연 초연적인 험한 곳이었다. 험한 비탈과 기이한 바위는 어풍대로 이것을 둘러 정사를 지은 곳은 강학소이다. 총을 가진 군사들로 대략이나마 군대의 모양을 만들어 즉일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골짜기 입구로 돌을 밟고 지나 비진촌에 도착하니 사람이 불을 켜 들고 기다린다.

이렇게 해서 1896년 1월 6일에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은 조직을 정비한 뒤 곧이어 봉화로 들어갔다. 이튿날 봉화에 도착한 그는 봉성을 점령하고 군수 안모(安某)로부터 총과 탄환을 지원받았다. 그는 봉성에서 의병을 끌어모은 뒤 1월 7일 영주로 진군해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영주에서도 의병을 모으고자 했지만 현지 유생들이 이미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있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월 8일 입석, 온혜, 서고서재 등지에서 각기 하룻밤을 지냈고, 1월 11일 예안으로 회진한 뒤 이틀 밤은 예안에서 머물고 1월 13일 안동부로 출진했다.
1월 15일 안동부에 도착한 김도현은 영주의진이 안기에 진을 치고 있고 안동의진이 향교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두 의진에게 합칠 것을 청했지만 거부당했으며 그의 문벌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김도현은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뚜렷한 학통이나 학맥을 가지지 못해서 이런 취급을 당한 것이다. 이후 안동을 떠난 그는 영양, 진보, 청송 등지를 돌며 뜻을 함께 할 의진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시 의성, 영덕, 영해 등지를 전전하다가 울령을 넘어 1월 20일 청기로 돌아왔다. 그는 청기에서 하루를 쉰 후 1월 22일 소청에서 예안으로 가는 갈령을 넘어 부포서재에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 그리고 1월 23일 예안으로 들어간 뒤 선성의진에 참여해 2월 13일 중군을 맡았다.
1896년 2월 16일, 김도현은 선성의진의 중군장으로서 태봉전투에 참여했지만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그와 함께 퇴각한 장졸은 15~16명 뿐이었다. 2월 18일 예안에 도착한 그는 중군장을 사퇴하기 위해 사면장을 올렸지만, 다음날 안동의진에서 구원을 요청해오자 군사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안동에 도착했을 때, 안동부는 이미 일본군이 불을 지른 뒤였다. 이에 예안으로 회군한 후 예안의 성을 고쳐 쌓고 방어책을 세우는 등 진용을 정비했다. 그러면서도 사면장을 3번이나 올렸고, 결국 2월 22일 대장 이중린으로부터 해임령을 받고 사직했다.
김도현은 사직 후 수기를 거두어 돌려보내고 상청리로 돌아왔다. 이후 안동도총 유난영의 초청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진보의진의 대장 허훈이 초청을 해오자 "어찌 이를 물리치고 나가지 않을 수 있으랴"하고 혼자서 말을 몰아 진보유진소로 찾아갔다. 그는 허훈과 논의를 한 끝에 안동의진의 군사 일부를 나눠서 얻어오기로 했다. 그는 군사 4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가서 안동의진의 도총 유난영을 만나 그의 부장이 된 후 김도화 대장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이었던 군사를 얻어오지는 못했다. 이때 관동창의장 민용호가 강릉에서 소모장 이호성을 보내 그를 초청했다. 이호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김도현은 <창의전말>에서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편지를 보니 내용이 몹시 긴하고 간결하며 의리가 명쾌해서 관동 전체의 모든 고을을 통솔하여 의병다운 세력을 이루겠다 했으니 참으로 의사였다. 나도 그를 보고자 해서 이를 허락하고 페랭이를 사서 의병들에게 쓰게 하고 모두 흰 옷을 입혔다. 집에 돌아가 하룻밤을 지내고 또 아버님께 고하고 나와서 먼 길을 가니 자식된 자로서 진실로 국가의 일이 아니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거느린 군사가 겨우 60명인데 집을 떠나 본읍에서 잤다.

김도현은 3월 10일 직접 방문을 작성, 배포해 의병을 모집하여 60명을 확보한 뒤 강릉으로 향했다. 음력 3월 하순 경 강릉에 도착한 그는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중 나온 민용호를 보고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릉에 도착하니 민대장이 친히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들에 나와 기다린다. 함께 들어가 옆에 앉아서 보니, 용모는 단정하고 뜻은 굳으며 그 글이 또 날카로워 가히 의리를 성취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당포를 주어 우리 군사의 갖가지 옷을 만들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민용호는 <관동창의록>에서 김도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양에 사는 김도현은 용사 수백인을 모아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왜노를 포착하였는데, 각 의병진에서는 그의 가문이 미천하다 하여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다. 이에 스스로 돌격장이 되어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장군을 초청하니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왔다.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군사들에게 당포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이후 김도현은 4월 10일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에 밀려 구산역으로 퇴각했고, 그의 아우 김경옥과 김동현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후 민용호의 관동의진은 진영을 재정비하고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현산성에서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또 패하고 정선, 임계 방면으로 후퇴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전투력이 약화된 데다 장마철이 되면서 의병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민용호와 김도현은 삼척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1896년 4월 12일, 강릉의진은 백복령을 넘어 삼척으로 이동하여 삼척 의병대와 합세했다. 민용호는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울릉도시찰사 염석하를 죽이고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에 맞설 수 있도록 진용을 갖췄다. 이후 4월 19일에 삼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민용호는 삼면에 의병을 배치해뒀다가 관군이 접근해오면 포위해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선봉장 김도현과 수성장 민동식은 성안에 매복하고, 유진장 김헌경은 죽서루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민용호 자신은 중군 최중봉, 강우서, 이영찬, 전치운[3], 신무섭 등과 함께 삼척 뒷편의 삼봉산 위에 참호를 파서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관군을 기다렸다.
관군이 삼척에 들어오자, 강릉의진은 일시에 포를 쏘면서 좌우에서 협공했다. 이날 아침 5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5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기습공격을 가해 주도권을 잡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탄약이 떨어지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이때 변복을 한 관군이 성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고, 전세는 더욱 급격히 기울어졌다. 결국 민용호는 울진의 오십천변을오 퇴각하고 말았다. 이날 관군은 "강릉으로 생환한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의병도 큰 피해를 입었다. 김도현은 성내에서 적과 격렬하게 싸웠지만 탄약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삼척 전투에서 패한 뒤, 김도현은 민용호와 결별하고 울진의 십이령과 일월산을 넘어 영양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친척과 면민들을 모아 읍내로 들어가 진영을 세우고 재기를 도모했다. 그가 처음 영양에 도착했을 때 그를 따라온 군사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이 10여 명을 불러 모아서 괴암서재에서 재차 창의하고, 소청의 검각산성에 본진을 두고 면내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모아 진영을 편성했다. 이후 동생 김경옥, 김동현을 청송 덕천에 보내 청송의진의 거의를 촉구했으며, 자신도 각처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집했다.
5월 6일 관군이 소청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급히 소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본진이 관군에게 약탈된 뒤였다. 이에 검각산성의 성벽을 수리하고 진영을 재편성했으며, 이후 검각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이끄는 의병진의 무기는 화승총으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사격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정거리도 30보를 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무기 수준이 월등한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유리한 지점에서 기습 공격을 했음에도 무기의 열세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거듭된 패배에도 포기하지 않고 영양, 예안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지속했다. 6월 2일에 수비를 거쳐 옥령을 넘고 외선미, 내선미 등지를 전전하며 군수품을 거뒀으며, 관동의진, 예안의진 등과 협력했다. 그러던 중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대가 영덕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김하락이 강물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김하락 의병대에 속했던 잔여 병사들을 수습한 후 영양으로 회군했다. 그는 이들과 힘을 합쳐 영양읍에 있는 관군을 사로잡고자 했지만, 잔여 의병들은 이를 거부하고 청송 방면으로 갔다. 이에 김도현도 석보, 창암, 중노곡, 신기, 감곡, 중평 등지를 거쳐 청송의 상덕천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1896년 6월 10일, 김도현은 덕천에서 마평을 거쳐 대전으로 향하던 중 일본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으로 회군했다.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집하던 그는 7월 14일 대천, 송점 등지를 거쳐 영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안동의진과 이천의진으로부터 연합하자는 요청을 받은 그는 안동의진과 합세하기로 결정하고 안동도총 김하림, 선봉장 유시연 등을 만나 몇차례의 논의를 거쳐 안동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관군의 추격을 받아 실행하지 못했고, 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해 산지를 전전해야 했다.
8월 말, 김도현은 관군 병대장 김장옥으로부터 의병 해산을 권유하는 서신을 받았다. 이에 그는 <답병대장>을 보내 의병 활동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도현은 일개 벼슬없는 선비로 멀리 떨어져 발길조차 없는 곳에서 분연히 일신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낭패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보내온 글을 보니 "서북의 여러 고을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모두 군사를 일으킨 것으로 지목하지만, 동남의 여러 진영은 오히려 해산하였는데 홀로 거의 우두머리로 여긴다"하였습니다. 만일 병사로 말할 것 같으면 헛된 이름만 있어 세상을 그르칠 뿐이고, 의리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이 떳떳한 충정이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의병으로서 돌아가기 불가한 것은 창천을 장차 어떻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임진년으로부터 일본 오랑캐는 만대 원수국이 되었으며, 갑신년에는 박영효가 일대 역신이 되어 갑오년 6월 원수를 끌고 들어와 궁궐을 침범하고 임금의 명령이라 속여 우리 선왕의 중전(重典)을 능멸하였으니 이는 창의할 때 아닙니까? 을미년 8월 원수의 칼날이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창의할 때 아닙니까? 또 11월 역당들이 우리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으니 이것도 창의할 때 아닙니까? 아! 이 나라에 사람이 없음이여. 어찌 추로지교남에서 보고 지나치겠습니까?

이에 머리를 깎이는 날에 의병을 일으켰으니 비록 늦다 할지라도 역시 춘추대의에 있어 당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이라 속인 사자들이 사방으로 나가 여러 진영을 모두 해산하였습니다. 아! 나 혼자서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까. 천전만도밖에 할 수 없는 죽을 고비를 겪고 나서 목숨을 겨우 부쳐 살고 있으나 세상의 움직임을 지켜보면 우러러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공같은 분은 이미 강병부국의 계책을 가지고 벼슬길에 나와 병관에 이름을 올렸으니, 끝내 우리 임금을 도와서 바깥 오랑캐들이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여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바랍니다.

김도현은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진에 <통교남각진문>을 발송하여 의병 활동을 독려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의라는 것은 마땅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는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의가 있을 따름이다. 슬프다. 우리나라의 종사는 일도, 일향, 일가, 일신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동국에서 우리 임금과 신민으로 전성기 태평성대의 역대 임금이 배양한 해택을 입지 않은 이가 누구이겠는가. 평소 한가히 거처할 때는 스승이 강구한 도리를 또한 밝힐 따름이다. 이같이 만고에 없던 큰 변을 당해서는 나라를 위해 충으로 죽고 도를 위해 의로 죽으니 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과 같은 것이다.

창의 이래로부터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여러 의병진은 백 혹은 오십의 사졸로 서로 따르고 도망하는 것이 진실로 피차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일단 장래에 희망을 두고 가을을 기다려 다시 나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가을바람이 상쾌하고 이슬이 처량하니 동서를 바라보고 남북을 거슬러도 소위 저 사람이 물에 있으니 어느 방향으로 하늘을 우러러도 욻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엎드려 바라오니 각 진영의 모든 분들은 구차히 삶을 도모하지 말고 빨리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을 수 있도록 결정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수령들에게 고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서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평안히 하여 우리의 지난 날 대동방예의의 나라를 회복한다면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1896년 8월 말, 김도현은 일월산 조록동으로 들어가 6일을 머물며 재기를 모색하고 영남 각처로 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은 장기간의 전투로 피로가 쌓인 데다 관군의 토벌 작전과 해산 종용으로 동요했다. 결국 각처의 의병진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선성의진은 8월 14일 향회를 열어 의병을 해산했고, 안동의진도 8월 말부터 해산을 시작했다. 김도현도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총 113자루를 갈령의 인가에 은닉하게 한 뒤 해산을 준비하면서 영양 지역 각처를 전전하다 일월산으로 들어가 양수정에 머물렀다. 9월 초 선유어사의 글을 받고 회신한 뒤, 9월 9윌 따르던 포졸 10여 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의병진을 해산했다. 그는 을미의병 때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2.4. 대한제국 시기


김도현은 의병을 해산한 뒤 청기면 소청리에 은거했고,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전개된 광무개혁에 반대를 표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의상팔조소>라는 제목이 붙은 이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나라의 망함은 부녀자가 마땅히 걱정할 것이 아니며, 씨줄이 부족하거나 그 몸에 미칠 화를 면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양산의 무너짐은 무거운 짐을 짊어진 자에게 말할 바가 아니지만, 불가피 전하는 것은 그 나라에 예가 행해지지 못할까 해서입니다. 신은 궁벽한 산속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는 한낱 평민으로 어찌 감히 종묘사직의 천고대세를 더불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나라가 없은 즉 집을 보존하기 불가하며, 임금이 없은즉 몸을 보존할 수 없으니 몸과 집의 존망은 임금과 나라의 유무에 관계되는 것인즉 떳떳한 충정이 격동하는 바 어찌 근심 걱정을 하지 않으며, 어찌 천지와 부모의 앞에서 부르짖을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은 신성하고 예지로운 덕망으로 조종의 간대한 일을 이으시고 열성조의 삼가 공손한 마음을 체득하시어 태평의 치세를 가히 이루었는데, 불행히 근래 간흉들이 나라를 그르쳐 맑고 평안한 날이 없어 적게는 바르고 화평하지 못한 날이며, 많게는 변란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이는 문을 열어 적을 부르고 양식을 갖추어 적을 키운 것과 같습니다. 법령으로 기강을 세우는 일을 강한 이웃의 입에 맡기고, 시설을 다시 고치는 것도 흉악한 무리들의 손에 부탁하며, 국호를 개정하고 직위와 칭호를 함부로 고치며, 관직을 바꾸고 역기를 물나하게 하여 을미년 8월의 참화와 11월의 늑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비를 갖추지 아니하고 성문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름만 독립이요 그 실상은 마침내 멸망에 이를 따름입니다. 신은 청컨대 해서는 아니 될 8조를 죽음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첫째, 국호를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둘쨰, 황제라 칭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셋째, 관직을 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넷째, 역기를 문란케 함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다섯째, 난역을 토벌치 않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여섯째, 수원을 복수하지 않음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일곱째, 군기를 정비하지 않음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여덟째, 성문을 굳게 하지 않음은 불가합니다. (이하 생략)

신은 가만히 생각하니 금일 힘써야 할 정사는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의 밝음으로 지시하여 바로잡고, 고통스럽더라도 기력을 모아 조선이라는 국호를 회복하시고, 다음으로 황제의 칭호를 없애시고, 관직을 정비하여 어질고 능력있는 인물을 임명하고, 역기를 바로잡아 문란함을 없애고, 난적을 토벌하여 간악한 도적을 징치하고, 원수를 갚아 국치를 설원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밖으로 경계를 갖추고, 성문을 굳게 하여 엄하게 지킨 연후에야 나라는 가히 나라다울 것이며, 백성은 가히 백성다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백년 종사가 쉴 곳이 어딘지를 알지 못할 것이며, 미미한 신의 한 가닥 목숨도 죽을 곳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다른 기술과 능력은 없지만 단지 한 가닥의 어리석은 충정은 있습니다. 병신년 거의에서 복수의 뜻을 조금이나마 품었으나 전도되고 낭패되어 곤액을 많이 받았습니다. 집은 패망하고 몸은 암혈에 구차하게 의지하면서도 지금의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보니 상망이 언제까진지 모를 것 같아 차라리 분수를 지켜 안전을 도모하기보다는 지위를 떠나 한번 간장의 피를 토하여 용안을 범해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신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해 더욱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에 두려움이 지극합니다.

이후 그는 1902년과 1904년에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영남 인사들에게 발송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경북 북부 일대 유림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고, 1901년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 위패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도산서원의 임시원장으로 추대되어 위패를 다시 봉안했다. 또한 1903년에는 경북관찰사 이헌영으로부터 오읍도집강으로 위촉받아 영양, 청송, 진보, 영덕, 영해 등 다섯 고을의 화적을 토벌하는 데 참여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도현은 이만도의 초청을 받아들여 예산으로 가서 상소운동을 계획했다. 그는 안동, 풍기, 영주, 순흥, 봉화, 영양, 영해, 진보, 청송, 예안, 영양 등 각지의 유생들을 널리 규합한 뒤 영남 각 지방에 통문 <통삼남각성문>을 발송한 후 상경했다. 그러나 12월 10일 서울에 도착해보니 약속한 날짜에 모인 이는 서너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만도와 함께 다시 통문을 보내 불의의 죄를 토벌하고 천하만국에 대의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고자 했다. <의청토적복소>라는 제목의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대대로 한미한 가문의 사람으로 궁벽한 초야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날 과거시험 보는 날 멀리서 전하의 용안을 뵈올 때 충애지심이 가슴 속에서 발하여 전하의 다스림을 도와 태평성대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임오년 변란 이후 과거를 폐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군대의 일에 마음을 두고 갑작스런 일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듣자하니 조정에서는 원수 나라와의 통교를 개화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만, 개화 두 글자는 바로 망국의 조짐입니다. 갑오년 6월에 역신들이 궁궐을 범하여 임금님을 욕되게 한 것이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우리 선왕들의 전장을 혁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을ㅇ미년 8월에는 원수 오랑캐가 궁궐을 범하여 국모가 화를 입었으니 더욱 참을 수가 없었으며, 성상께서는 또 삭방을 당하는 변란을 맞았습니다.

신들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분수를 어기고 거의하여 교남의 여러 고을이 한 목소리로 서로 상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군대가 차례로 내려와 점차 의병들은 흩어지고 많은 군사들의 쇠잔한 목숨은 살육되었고, 문헌과 고택이 소멸되었는데도 전하를 좌우에서 가로막아 덮으니 어찌 들어 알 수 있겠습니까. 대저 토적복수는 천지의 경의이며 백성의 떳떳함이지만 도리어 저지되었으니 원통합니다. 신은 우리 전하의 이와 같은 명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설사 이와 같은 명령이 있었더라도 단언코 이는 수이와 난적이 억지로 협박하여 그런 것이니 적을 반드시 토벌하고 반드시 복수하는 거사는 장차 앞으로 있을 것입니다.

신은 요행히 동쪽 구석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밤낮으로 북쪽 궁궐의 전하를 생각한지 10년 이래로 임금을 연모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홀연히 10월 20일의 변고가 저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오적의 손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4천년 예의지국을 마음대로 원수 오랑캐에게 귀속시켰으니 이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전하꼐서는 40년 동안 임금으로 계씨면서 홀로 5백년 종사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나라를 남에게 주려 하십니까. 팔도의 백성을 금수에게 주어서 약육강식이 된 후에는 살아남을 이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어찌 이런 망극함이 있사옵니까.

오호라! 오늘의 형세는 거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도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만국공법에 손을 벌려 다른 나라의 군대를 빌려 힘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구차히 목숨을 도모하여 조종에 죄를 얻느니 차라리 피를 뒤집어쓰고 창자를 갈라 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손을 거두어 포박을 받아 후세에 놀림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배성일전으로 존망을 결정하여 이기는 것만 못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뼈아픈 결단으로 복수보국의 계책으로 호령을 내리시어 중외의 군대와 백성들에게 전하의 본 뜻을 밝게 알릴 것 같으면 비록 궁벽한 시골 사람조차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더욱 나라를 위해 죽는 기개를 더할 것입니다. 또 억울하게 견제당하는 사정을 외국 공관에 알린다면 천하만국도 역시 우리나라의 억울함과 저 왜노의 속임수를 마땅히 공법으로 시행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원수를 갚고 토우를 회복하고 난역을 제거하여 명분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통절히 생각하시어 깊이 받아들여 주십시오. 신은 변고를 듣고 통곡하며 칼날과 가마솥이 눈앞에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적과 더불어 살 수 없다는 것은 신의 뜻이고 신의 바람이옵니다. 전하꼐서 복수보국하고자 함이 위와 같다고 말씀하신다면, 신은 비록 만 번 죽더라도 감히 회한이 없을 것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음도 없을 것이며, 백번 절하며 죽음에 이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 이만도가 앞서 상소를 올렸다가 별 비답을 받지 못하고 쫓겨났기에 동지들이 올려봐야 소용없다고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는 각국 공관에 포고문을 발송해 조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그는 자결하려 했지만 동지 조병희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하고 귀향했다.

2.5. 을사의병


1906년 1월 27일, 김도현은 영양에서 포군 50~60명을 인솔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영양군수 이범철이 의병 해산을 종용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이제 적신이 국권을 농단하니 의로서 차마 좌시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기병하여 설분할 계획을세웠다. 그런즉 군수 또한 현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이니 어찌 그 명을 받는 것은 불가하랴만, 청컨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만약 다툼이 생길 것 같으면 먼저 제거함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범철은 안동 주둔 수비대에게 편지를 보내 군대를 보내달라고 했고, 이후 김도현이 오읍도집강 시절 결납전을 거두어 의병의 군비로 쓰고자 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일본헌병대와 경찰고문지부장에게 고해 그를 체포하게 만들었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김도현이 체포된 뒤 인근 몇 군의 여론이 "이와 같이 탐학한 군수는 법에 의해 주살함이 마땅하고 김씨가 무죄임에도 화를 당한 것은 대단히 원통한 일이다."라며 들끓었다고 한다. 또 안동진위대는 소청동으로 가서 김도현의 일가친척들을 구타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김도현은 체포된 후 1906년 2월 1일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이범철의 탐학 행위가 드러나 경질된 덕분에 곧 풀려날 수 있었다. 그해 4월 8일, 김도현은 고종이 밀파한 특진관 이용원, 강창희로부터 <칙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학으로 창의한 신 김도현을 특별히 추천함에 분충정란제삼등호일을 내린다. 선조 계사년 예에 따라 삼남의려소백의종사분격장군으로 공경히 차임하노라.

광무 10년 4월 초8일

전차특진관 신 이용원

또한 밀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제는 목욕재계하고 삼가 특별히 선거된 신 강창희를 파견하여 병신년에 창의한 신 김도현에게 비밀히 이르노라. 오호라! 짐은 어리석고 용렬한 자질로 욕됨을 백성들에게 더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임한 지 30여 년에 도에 반하고 덕에 어그러진 행동으로 선왕에게 죄를 얻었고 독이 백성들에게 흐르게 하였다. (중략) 홍재학과 백낙관은 직언으로 자신을 죽였고, 서상렬과 조동석은 충심으로 목숨을 잃었으니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노라. 작년 10월 25일 만나게 된 것은 나라가 있은 이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으로 삼림과 전택, 공부와 지도, 호적 등 강탈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략)

특히 밀칙으로 경에게 분격장군을 내리고 겸하여 은밀히 효유하노라. 경은 모름지기 우리 선왕들을 은혜롭게 하고 우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의로운 군대를 고무하여 먼저 도적들을 피곤하게 하고 간흉을 제거하여 나라의 원수를 물리치도록 하라! 세세로 천록을 경과 함께 할 것을 맹세하니 저들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짐은 맹세하노라. 모름지기 도원수 신 강창희와 상의하여 나라에 복이 있게 하라!

지금 도적들이 함부로 움직인 지 40년에 362만 명이 죽었노라! 백성과 신하들이 뜻을 달리한 것에 화의 발생이 있었다. 우리나라 지경에 주둔하고 있는 것 또한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다. 경의 충용으로 때를 타 분발한다면 이기지 못할까 어찌 근심하랴. 일을 극복하기 전에는 서울로 들어오지 말라. 경계하고 조심할 지어다.

광무 10년 4월 초8일

함께 목숨을 맹세한 신은 이중우, 노병대 등이다.

김도현은 기의밀칙을 받은 뒤 격문을 각지에 발송했다. 그러나 관청의 감시와 탄압이 심했기에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그는 방향을 바꿔 민족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1909년 5월 말, 김도현은 조언찬, 조인석 등과 함께 영양읍내에 영흥학교를 설립했다. 영흥학교는 그해 11월 1일 영양군 객사를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고 학부의 인가를 얻어 개교했다. 김도현은 이때 영양군교육회장이었으며, 영흥학교 교장을 겸했다. 당시 영양군수를 역임했던 윤필오의 <매석집>에 따르면, 김도현은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영양군수와 일본군 헌병대장을 면담했고 지원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도현의 친구 남건은 <김의사전>에서 영흥학교 교장에 취임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관찰사가 불러 오읍도총으로 삼았으나 사양하지 않았고, 본읍의 신학교사로 임명하였으나 또한 공교롭게 피하지 못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집에 계셨고, 집안과 국가에 대한 근심이 절실하였으나 온갖 궁리로도 방책이 없었다. 군수가 불러서 "만약 일본 경찰을 만나보지 않으면 장차 아버지에게 미칠 것이다"고 말했다. 의사는 말을 달려 영해로 가 경찰을 만나보고 돌아왔다. 내가 이에 힐난하기를 "자네가 거의하는 동안 아비 잃은 자식과 남편 잃은 아내가 무릇 얼마인데, 지금 자네의 한 가닥 목숨은 아까운가?"라고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의사는 능히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며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2.6. 순국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도현은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손자 김여래가 기술한 <도해일기>에 따르면, 그는 자살하려 했지만 늙으신 부친이 있었기에 차마 결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만도가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즉시 이만도를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청구일기>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벽산(김도현)이 문안을 여쭙자 향산(이만도)은 "우리 둘은 마음으로 서로 친한 지가 이미 여러 해인데 어찌 멀리서 나를 보러 왔는가?"하며 맞이하였다. 제자의 방문을 대하는 향산의 응대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벽산은 울먹이며 차마 응대하지 못했다. 곧 작별인사를 올리고 영결하면서 벽산은 "선생님, 쉬이 뵙겠습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말을 남꼈다.

이후 이만도가 끝내 순국하자, 김도현은 조문을 드리며 <곡향산선생문>을 제문으로 바쳤다.

선생님의 대의는 못난 제자가 알고, 못난 제자의 마음은 선생님께서 아십니다. 못난 제자의 눈물을 피 끓는 마음에서 흘러 나오나니, 선생님의 영령도 제 제주 위로 강림하소서. 아, 애통합니다. 상향(尙響)

그는 이만도가 죽은 뒤 일제가 보낸 은사금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냈다. 그러던 1914년 9월 3일 부친이 85세를 일기로 영면하자, 그는 그동안 고민해온 자결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1914년 12월 17일, 부친의 상례를 마친 그는 다음날 장손 여래에게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나는 중년부터 시절을 아파하고 나라를 걱정하느라 뜨거운 피가 가슴 속에 가득하였는데, 오늘 갑자기 가슴이 크게 열리고 심기가 상쾌하고 명랑하니 만사가 저절로 정해진 것 같다. 싫어하는 것에는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있으며, 원하는 것에는 살아있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겠는가. 오늘에서야 맹자가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진실로 알겠다."

그는 이어 여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줬다.

이제야 죽는데 어느 땅에서 죽을고

옛 나라에는 남은 강토가 없구나

노중련은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었건만

밝은 달과 같이 오히려 빛나는구나.

여래가 만류했다.

"할아버지께서는 한 번의 생각으로 결정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여 멀리 외진 땅에 피신하여 국내외의 지사들과 친히 결맹하여 국제 정세를 살펴 원수 오랑캐를 쳐부수고 국권을 회복하여 광복을 보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김도현이 대답했다.

"나도 생각을 깊이 하였다. 그 시세를 들어보니 천에 하나도 기대할 수 없는 운수에 당해 있으며, 천하대세도 뜻밖으로 어렵게 되고 있으니 어찌 약속하여 기다릴 수 있겠는가? (중략) 을미년 8월에는 국모께서 차마 듣지 못할 화를 입었고, 이해 11월에는 성상께서 가히 말 못할 치욕을 당했으니, (중략) 마침내 집을 기울이고 재물을 뿌려 의사를 모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이로써 복수하고 부끄러움을 씻을 기약을 하였더니, 뜻밖에 선유사가 사방에서 나와 해산하라는 명을 전하였다. (중략) 을사년 10월 20일에 이르러서는 (중략) 마침내 영남의 사대부들이 더불어 소를 올려 담판을 행하고자 하는 의논을 한 뒤 두려움에 떨며 서울에 올라가서 같이 모이기로 하였는데, 모인 사람은 불과 3~4인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경술년에 이르러서는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였으나, 고당을 우러러보고 감히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금년 7월에 하늘도 불행하게 노친께서 천년으로 세상을 버리시니 (중략) 장차 대가를 남으로 옮겨 흥복을 도모하자면 한 사람이라도 북해로 쫓아가서 은밀히 광복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막연하게 되었다. 아! 천하의 일이란 가히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말인가? 만약 천지에 봄이 돌아온다면 세상의 일도 정해진 대로 돌아갈 것인즉, 내 비록 있지 않아도 가히 이루어질 것이다. 좋은 운수가 돌아오지 않으면 세상의 일도 오히려 정체되고 말 것인즉, 내 비록 있더라도 역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그는 자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원컨대 너희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음덕을 베풀고 음해를 가하지 마라. 선행을 쌓아라. 선행이 많으면 경사가 후손에 넘친다. 악을 징계하고 악을 징계하라. 악행이 많으면 재앙이 자손에게 이어진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 선악 두 글자를 더욱 절실하게 말하노니 너희들은 함부로 듣지 말고 가슴에 새겨두어라."

12월 19일, 김도현은 부친의 빈소에서 곡을 한 후 8살 된 증손 기팔을 불러 "글을 부지런히 읽어라"하고 집을 나섰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깨닫지 못했지만 손자 여래가 의심이 들어 물었다.

"할아버지 장차 어디로 가십니까?"

"청기에 간다. 어제 다하지 못한 말이 있어 이제 다시 간다."

이후 김도현은 청기에서 친구 김병식을 만나 오언일절(五言一絶)을 써서 벗에게 주었다.

당세의 평원군은 어찌 노연자와 같았든가

내가 가라앉은 곳을 알고자 하거든 동해에 가서 물어보게나.

김도현은 김병식과 헤어진 뒤 동쪽으로 곡령을 넘어 읍동, 문현을 거쳐 대천 오세호 집에 이르렀다. 김병식은 그 사이에 아들 형팔을 소청의 벽산가로 보내 김도현의 손자 여래에게 "할아버지께서 지금 동쪽으로 향하여 가셨다"고 알렸따. 이에 여래는 청기를 거쳐 대천으로 달려가 김도현을 만났다. 김도현은 손자를 보고 말했다.

"너는 무엇하러 왔느냐? 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너희들은 달리 구분하여 대처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분분히 따르면 한갓 나의 자취만 드러나서 도리어 나의 마음만 상할 뿐이니, 급히 돌아가라."

그러나 여래는 끝내 떠나지 않았고 뒤이어 김도현의 자손들이 모두 와서 그를 모실 것을 밝히자, 김도현은 체념하여 말했다.

"너희가 나를 굳이 따르고자 하니, 끝내 물리치지 못하겠다."

이후 김도현은 자손들과 함께 지난날을 회고한 뒤 12월 22일 새벽 유서 <여국내동포>를 작성했다.

고신(孤臣), 고애자(孤哀子) 김도현은 피눈물을 흘리며 대동조선국의 모든 군자들에게 우러러 고합니다. 오호라 슬프다. 도현은 일찍이 <한서>를 읽다가 우리 선성 공자께서 "조선에 살고자 했다가 동남 바다의 섬에 수많은 왜놈 종자가 있어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부자(夫子)께서 어찌하여 왕도를 우리 동국에 베풀지 아니했는지, 그때 이후로 부자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을 꿰뚫어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국 명나라 영력 이래로 한가닥 양맥이 오로지 우리 동쪽에 있는데, 이제 나라가 망하고 도 또한 망했으니 원통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모든 군자들은 우리 부자가 끼친 뜻을 공경히 생각하사 이제부터 절치부심하여 집집마다 칼을 갈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일제히 소리 질러 왜노들과 한 번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기면 4천리 선왕의 나라를 되찾고 4천 년 선성의 도를 일으킬 것이요, 지면 지하에서 선왕선현을 뵈어도 천하 만세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무궁한 사람의 도리를 세울 것입니다.

아! 도현은 85세의 어버이를 받들고 있던 사정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세상 일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금년 7월 24일에 천년으로 세상을 떠나시니 고애자의 나이 63세입니다. 지난날에 이루지 못하였던 일을 통탄하며 장래에 다시 할 것을 맹세하나니 오는 11월 7일 동지에는 동해에서 죽어 왜적을 기어코 명망케 할 것입니다. 다시 바라오니 모든 군자들은 힘써 조국의 광복을 꼭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1910년 12월 22일 석양에 영해 상대산 관어대에 도착한 그는 산수암에 높이 올라가서 유시를 짓고 장손 여래와 삼종제 태현에게 큰 소리로 읽게 했다.

나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 피 온몸에 가득하도다

중년의 열아홉 해 동안

수염과 머리털은 추상같이 늙었구나.

나라가 망함에 눈물이 그치지 않는데

친상에 마음이 다시 아프구나

홀로 서 있으니 옛 산만 푸르고

백방 헤아려도 한 가지 방책도 없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 싶은데

이렛날에는 마땅히 양이 회복되리라

희고 흰 저 천 길 물 속에

이내 한 몸 족히 간직하겠구나.

그 직후, 김도현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향년 63세. 자손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날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 산수암에는 그를 기리는 '도해단'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도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김녕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동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무덤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내에 있다.[3]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치운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