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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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옛 러시아 제국의 공사관 터이다.
2. 위치
원래 왕실의 정원인 상림원(上林苑)이 있던 곳으로, 정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다. 그래서 고층건물이 거의 없었던 조선시대 당시에 러시아공사관에서 한성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며, 건물 또한 한성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관련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러시아공사관의 위용을 인상적으로 적어두었다.#
현재 동쪽에 덕수궁 선원전 터, 서쪽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교육원, 남쪽에 정동공원과 예원학교, 북쪽에 새문안 어린이공원, 서북쪽에 정동 상림원 아파트, 동북쪽에 디팰리스 아파트가 있다.
3. 찾아가는 길
- 지하철: 수도권 전철 1 · 2호선 시청역과 수도권 전철 5호선 서대문역, 광화문역을 이용하면 된다. 시청역에서는 11번 출구, 서대문역에서는 5번, 광화문역에서는 6번 출구가 가깝다. 시간은 세 역 다 대략 11 ~ 12분 정도 걸린다.
- 버스: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앞(01007, 01008) 정류장이 제일 가깝다. 그 다음으로는 서울역사박물관.김구집무실(경교장, 01250),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강북삼성병원(01165) 정류장이 가깝다.
4. 역사
4.1. 외교공관 시절
1884년(고종 21년) 조로수호통상조약[2] 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러시아 정부는 공사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당시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였던 카를 베베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사경리국 소속 건축가 류뱌노프에게 설계를 부탁하고 일본인 하도급자인 치오고에게 견적 및 도면 작성을 맡겼다.
그러나 처음 설계안대로 지으려했더니 예산을 너무 많이 쓰게 생겨 원래 계획대로 짓지 못했다. 1888년(고종 25년) 이후에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3] 을 고용해 예산을 새로 짜고 설계안을 고쳐 1890년(고종 27년)에 공사를 끝냈다.#[4] 이는 서양식 건축형태를 지닌 첫 외교공관이었다.[5] 당시에는 러시아를 음차한 아라사(俄羅斯) / 노서아(露西亞) 공사관, 줄여서 아관(俄館) / 노관(露館)으로 불렀다.[6]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이 왕태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이곳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현장이기도 하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1895년(고종 32년) 11월 28일에 미국 공사관으로 가려 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으며, 이를 거울삼아 아관파천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결국 성사시켰다.
이후 고종은 여기에 머물면서 김홍집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박정양 친러 내각을 조직했으며 러시아는 이를 기회로 조선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아관파천 문서 참조. 1년 여 뒤인 1897년(건양 2년)에 고종은 궁으로 돌아갔는데, 경복궁이 아닌 러시아 공사관 근처에 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갔다.
대한제국 수립 후, 1904년(광무 8년) 2월에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을 시작했고, 곧장 러시아 외교관들은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일본이 압력을 넣어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국교는 끊겨 러시아 공사관은 빈 건물이 되었다. 2년 뒤인 1906년(광무 10년)에 러시아 외교관들이 다시 한성(조선시대의 서울 이름)에 오긴 했지만 이미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체결시켰기 때문에, 국가 대 국가로 주요 외교업무를 상대하는 공사가 아닌, 정치성이 없는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로 왔다. 그러면서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도 영사관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러시아 영사관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운영이 어려워 1921년에 스스로 폐쇄했다. 1922년에 새로운 국가 소련이 세워졌고,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은 후인 1925년 9월에 소련의 영사들이 다시 경성(일제강점기의 서울 이름)으로 와 옛 러시아공사관을 영사관으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소련 영사관을 폐쇄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실천에 옮기진 않았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소련 영사관은 서울에 남아서 그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1949년에 영사관원의 간첩 사건으로 한국 정부에서 폐쇄시켜 외교공관으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1년 뒤 발발한 6.25 전쟁 때에는 탑과 외벽 일부를 제외한 건물 전체가 폭격을 맞아 사라졌다.
4.2. 전쟁 이후
폐허가 된 공사관 건물 주위에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는 등 한동안 방치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 1969년에 장충단비를 재발견한 것을 계기로[7] 러시아공사관 터와 남은 건물을 보존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반대가 심했다. 치욕스러운 아관파천의 현장인데다 공산주의 적성국가 소련의 흔적인데 굳이 냅둬야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보존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 서울특별시에서는 러시아 공사관의 남은 건물들을 1969년 9월 18일에 '양관'이란 이름으로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했다. 그러다 문화재관리국에서 1977년 11월 22일에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253호로 재지정했다.#
1973년에는 남은 건물들을 보수했고, 1981년에는 유적 발굴 및 공사관 터 일대를 정비한 뒤 주변 경관을 꾸몄다. 1987년에는 탑 남쪽 부지에 정동공원이 들어섰다. 이후 몇 번의 수리를 거쳐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은 수교를 했고, 소련 대사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자리잡았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러시아 연방에서는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대사관을 새로 지으려했다. 그러나 이미 상당수 부지를 일반에 매각했고 그곳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있어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후 남쪽으로 350m 떨어진 옛 배재고등학교 운동장 자리를 대사관 부지로 정하고 새 건물을 지어 2001년에 입주했다.
5. 건물
- 남향으로, 남쪽의 정동길과 만나는 곳에 공사관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벽돌로 만들었으며 가운데에 큰 아치가 있어 마치 개선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담장은 한국식 전통 돌담이었다.# 건물 구성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본관에, 본관 동북쪽에 있는 3층 탑으로 이뤄져있었다. 위에 썼듯 현재는 탑만 남아있다.
- 모든 칸마다 출입문이 있었고 문으로 오르는 계단의 평면은 둥글었다. 동, 서, 남쪽에 아치열주로 형성한 아케이드를 두었고 열주 하단부 사이에는 호리병 모양의 난간을 설치했다. 또한 열주의 기둥머리에는 화려한 장식을 해두었다. 정면 가운데에는 삼각형 모양의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붙여 놓았다. 옥상 가장자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뒤 사이마다 난간을 두었다. 정면 좌대 위에는 항아리 모양의 장식을 올렸다.
- 평면과 내부 배치는 아랫그림 참조.
6. 지하 밀실과 지하도
서울특별시와 문화재청에서 공동으로 이곳 일대를 발굴 정비하던 1981년 10월 16일에 탑 동북쪽에서 20m 떨어진 거리의 지하 3m 지점에서 지하 밀실과 지하도를 발견했다.
밀실은 가로 7m, 세로 4m, 총 면적 28㎡로 바닥은 돌이고, 벽은 벽돌이었다.#
지하도는 러시아공사관 본관과 밀실을 연결하는 공간이었다. 길이는 20.2m이고 폭은 제일 윗 부분이 1m, 가장 아랫 부분이 45cm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지하도 중간에는 길이 5m, 폭 50cm짜리 공간이 있는데 이는 지하도 중간에서 지나는 사람끼리 마주칠 경우를 대비해 어느 한 사람이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닥은 석회칠로 마감했다.#
당시 작업했던 발굴단은 '러시아공사관 건물을 지으면서 밀실을 같이 설치한 것 같다'고 밝혔다. '웅장한 석조건물 밑에 완벽하게 설치되어있고 사용된 벽돌 등 구조물이 남아있는 양관의 구조물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밝혀졌다'는 이유였다.#
한동안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지하실에서 머물렀다는 주장이 나돌았다. 그러나 밀실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해 한동안 풍문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이 발굴로 그 주장은 상당한 근거를 얻게 되었다.
지하도에 대해서도 아관파천 후 일제가 고종을 찾으려고 만들었다는 설, 고종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연결하는 통로로 만들었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 중 경운궁 연결설에 대해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김정신 명예교수와 발레리 알렉사드로비치 사보스텐코 교수는 반론을 제기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 쪽 방향 지형은 사방으로 10여m 떨어지는 급경사이며, 미국공사관 구역을 거쳐 250m 가량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 즉, 저 지하도는 러시아공사관 본관과 호위대 막사를 잇는 통로라는 것이다.#
사실 지하실의 존재 자체는 발굴 전부터 사람들이 알고는 있었다. 6.25 전쟁 후 러시아공사관 터 근처에 살던 판잣집 주민들은, '공관에 길이 50m 짜리 땅굴이 있으며 그 끝에 지하실 2개가 있다.', '집 없는 사람들이 이 굴속에서 살림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누군가가 지하실을 쌩뚱맞게도 '''댄스 홀'''로 썼다고 한다. 지하라서 방음도 완벽한데다(...) 춤추러 오는 사람들이 근처 상가를 많이 이용해 지역 경제를 살려줘서 댄스 홀을 한동안 그 자리에서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댄스 홀 때문에 전쟁 이후 옛 러시아공사관의 남은 부분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위에 썼듯, 한 때 적성국가 영사관 건물이었던데다 폭격으로 대부분이 파괴당했으니 남은 부분들을 완전히 헐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이미 누군가가 영업하고 있는 상황에 섣불리 없애기는 힘들었기 때문.
현재 지하 밀실로 들어가는 지하도 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7. 여담
- 2017년 문화재청에서 덕수궁 선원전 터에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8] '고종의 길'을 완공하여 일반에 개방했다. 이 길의 서쪽 끝 문으로 나가면(아래 사진에서 보는 사람 기준 직진 방향) 바로 러시아공사관 터가 나온다.
- 대한제국기 근대 정동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역사문화축제 '정동야행' 행사 중 하나가 이곳에서 열렸다. 2018년 5월 11일 오후 7시에 옛 러시아공사관 터에 있는 정동공원에서 대한제국 당시 외교가에서 열었던 연회 '정동연회'를 재현했다.#
- 아리랑TV에서 2020년 3월 2일에 방송한 프로그램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에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가 직접 출연해 옛 러시아공사관 터에서 아관파천의 뒷 이야기와 고종의 항일운동을 소개했다.#
- 아랫사진들이 '아관파천 당시에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대포를 끌고와 위협하는 일본 육군'의 모습으로 알려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기와 장소 둘 다 아니며 1907년(광무 11년) 덕수궁 돈덕전에서 찍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을 참조.
- 문화재청에서는 2020년 10월 19일부터 같은해 11월 11일까지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한 건축가 사바틴을 주제로 한 특별전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부제: 사바틴이 남긴 공간과 기억)》을 개최했다. 전시는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했으며 현장 방문 관람은 20일부터 덕수궁 중명전에서 시행했다. 해당 특별전에서는 사바틴이 설계한 여러 건물의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했는데, 거기에 러시아공사관 관련 자료들도 많았다. 도면, 사진, 문서 등등. 이미지로 보고 싶으면 이 곳을 참조.
- 사바틴은 열심히 건축 공사에 힘썼는데 정작 설계, 공사 대금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청나라 톈진 주재 러시아 영사 슈이스키에게 못받은 돈을 달라는 청원서를 여러 장 보냈다.#
- 러시아 정교회가 한국에서 처음 정착한 곳이 러시아공사관이었다. 정교회 신자들인 공사관 직원들을 위해 파견나온 것. 그러다 한국인 신자 수가 늘면서 새 성당을 지어야했다. 그래서 1903년(광무 6년) 대한제국 선교담당 주임 사제 흐리산프 솃콥스키가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땅에 임시 성당을 지었는데 그 땅 역시 러시아공사관과 거의 바로 붙어있다시피 했다.[9] 이는 한국 정교회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8. 매체에서
[1] 당시의 건물은 6.25 전쟁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 부분만 남아 있다.[2] '로(露)'는 러시아를 한자로 쓴 '노서아(露西亞)'의 앞글자이다. 즉 조선과 러시아가 맺은 조약이란 뜻이다.[3]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리며, 근대기 서울과 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4] 사바틴은 1883년(고종 20년)에 처음 조선에 온 이후 인천에 머물렀고, 1888년에야 경복궁 건청궁 관문각 공사를 위해 한성으로 올라왔다.[5] 최초의 외교공관은 미국공사관이고 그 후 영국 외교공관이 러시아공사관보다 먼저 들어섰다. 그러나 이들은 한옥이었다. 미국공사관은 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영국공관은 1891년(고종 28년)에 서양식 건물로 바뀌었다.[6] 노서아 / 노관보다는 아라사 / 아관으로 더 많이 불렀다.[7]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장충단에 있던 비석이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뽑아서 버려두었다.[8] 이건 좀 논란이 있다.[9] 한성부 서서 황화방 군기시계 소정동. 지금의 경향신문사 사옥 언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