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혁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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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5년 창당된 중국 관내 독립 운동 정당이자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과물.
2. 창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정에 속해 있던 정치 세력이 각자 떨어져 나왔지만, 1920년대 후반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어[1] 독립운동이 난항을 겪게 되자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새로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932년 안창호, 이동녕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 전선 통일 동맹 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후 동맹에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이 '단체'와 '독립군'을 망라하여 '정치 정당'을 결성 이 정치 정당들이 모여 소위 민족 단일당을 창설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김구 등은 여기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유지를 원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논제는 민족 단일당을 결성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였는데 민족 혁명당으로의 단일당 형성은 기존의 단체들의 해체가 전제되기 때문으로, 당초에 상해 임시 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가 민족 단일당을 만들자는데 별 관심이 없었던 까닭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단 35년, 민족 혁명당은 결성이 이뤄지긴 하는데, 주석엔 김규식, 총 서기엔 김원봉, 총 사령관엔 지청천이 협력하였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김원봉의 의열단과 신익희 등의 신한 독립당, 김규식 등의 미주 한인 독립당, 조소앙 등의 한국독립당, 최동오 등의 조선혁명당 등이 모여 통합, 결성했는데 민족주의 성향의 신익희부터 무정부주의 성향의 김원봉, 김성숙, 공산주의 성향의 최창익 등 인물들까지 두루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은 기관지를 발행하고 상해로 인력을 파견해 의용대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독립 이후 토지와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더불어 인민이 무장할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2]
3. 분열
그러나 애시당초 성향이 다른 인사들이 모인 탓에 독립 운동 단체들의 통합이라는 취지와는 달리 내부에서는 치열한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고려 공산당 출신의 상해파와 시베리아파, 중국 공산당 출신, 의열단 내 민족주의파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우파 민족주의 계열은 이러한 주도권 싸움에 완전히 소외되었다. 결국 김원봉의 의열단계와 김두봉의 공산주의 계열이 당권을 장악했고, 김원(I)봉과 김두(II)봉이 각각 서기장과 조직부장을 맡아 당의 1, 2인자가 되었다.
이어 의열단계 및 사회주의계 주류와 지청천계 등 우파 민족주의계 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민혁당의 주류는 사회주의를 비판한 지청천을 강제 제명했다. 이에 창당 두달만에 조소앙을 비롯한 우파 계열 인사들이 대거 민혁당을 탈퇴해 항저우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해버렸다.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정의 집권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만들었다. 백범 김구는 민족 혁명당 결성 운동에 부정적이었지만 반대하진 않았고, 단일당 결성을 논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정당을 결성하면 단일당 운동에 재 뿌리고 난 따로 놀겠다고 선언하는 형태가 되기에 조소앙의 이탈이 확실시 된 뒤, 그러니까 자신이 정당을 세워도 이제 민족 단일당 운동에 누가 되지 않을 시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의열단계의 정당으로 전락한 민족혁명당은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