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1. 개요
바늘의 구멍. 바늘귀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침공(針孔)이라 한다.
여기에 실을 꿴다. 나이든 어르신들은 노안 때문에 이걸 손주에게 부탁하는 사례가 많다. 도와드리자.
우리말에서는 '귀'에 비유하는데, 서양에서는 '바늘의 눈'(the eye of the needle)'이라고 하여 눈에 비유하기도 하고, 침비(針鼻)라고 하여 '코'에 비유하기도 한다.
2. 관용어
'''작은 구멍을 통과할 정도의 어려운 난이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한데, 이는 아래 성경 구절에서 유래했다.
2.1. 유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말을 했던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 청년이 찾아와서 "영생불멸을 누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자, "계명들을 지켜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는 "저는 이미 일상적으로 계명을 지키고 있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되묻는다. 그러자 나온 대답이 "가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청년은 재산을 잃기 싫어서 그만 돌아갔다. 이에 예수가 제자들을 둘러 보며 한 말이 바로 위의 구절. 즉, 부자는 현생에서의 재물에 대한 탐욕을 그만두고,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이에게 적선하라는 교훈이다.Et iterum dico vobis: facilius est camelum per foramen acus transire, quam divitem intrare in regnum cælorum''(VC)''.
And again I say un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KJV)''.
'''내가 거듭 말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빠져 나오는 것이 더 쉽다.'''
개역개정판과 같은 옛 번역 성경에서는 낙타를 '약대'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약대'는 낙타의 순우리말이다.
2.1.1. 오역 주장
보통 과장법이란 것은 '침소봉대'(침→몽둥이)와 같이 형태와 성질이 유사한 것을 대상으로 질적 양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보통이나, '바늘'과 '낙타'는 워낙에 연상시키기 어려운, 이질적인 것이라 일부에서는 오역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 대목을 논파하려는 시도가 빈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약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구원과 가진 자의 봉사와 자선을 중요시하는 신약성경이지만 특히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기독교의 구원 대상인가)'''를 알려 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길드와 대항해 시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부를 축적했던 옛 부자들은 이 대목을 굉장히 두려워했고, 종교 개혁 시기에는 이에 대항하여 자본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주장
대표적인 오역 주장으로는, 아람어에서 밧줄을 '감타(gamta)', 낙타를 '가믈라(gamla)'라고 했는데, 이를 희랍어로 받아 쓰는 과정에서 복음의 서술자가 착각했다는 것. 즉, 원래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을 구멍에 통과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하신 거였다." 는 주장이다. 물론, 번역자가 실제로 이러한 실수를 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저 일방적인 추측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낙타를 바늘귀에 넣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만, 밧줄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굵기가 천차만별이니 단지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므로 상대적으로 그 난이도가 경감되는 꼴이다.
- 실제 '바늘 구멍'이 아니라 《바늘 구멍》 이라는 이름의 고유명사였다는 주장
다른 설로는 예루살렘에 바늘구멍이라는 별명의 좁은 성문이 있었는데,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한 학설로 알려져 있는데, 근대 이후 부르주아 시민계급에 영합해서, 부지런히 일해 성공한 소위 '선한 부자'들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청교도 측에서 지지하기도 했다.
다만 위 두 설은 어느 것이나 '''정설이 아닌 단순 추측 수준의 가설'''이며, 이렇다 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낙타 - 바늘구멍' 비유를 위 두 설로 풀이해 번역한 본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낙타'가 '바늘'과 어울리지 않는 명사라고 해서 오역이라는 주장은 아래 유사한 사례들에 의해 충분히 반박 가능하다.위의 예에서 보듯, '코끼리와 팔뚝', '메뚜기와 코끼리', '바늘과 소', '하루살이와 낙타'와 같은 이질적인 대상을 비교하는 다른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낙타와 바늘'이란 조합을 쓰지 말란 법도 없다.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리스 속담)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속담)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우리말 속담)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터넷 종교 사설 같은 것을 찾아보면 위 낭설들을 그럴듯하게 이야기해놓고, 근거도 없이 "역시 오역이 맞았다! 아무리 부자여도 교회랑은 상관 없으니 안심하시라." 또는 "그러니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헌금도 많이 내자." 는 식으로 멋대로 결론을 내려 버리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는 '''만에 하나 오역이 맞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고자 했던 진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비교 대상이 밧줄이든 쪽문이든, 결국 이는 비유일 뿐이고 '세속적 재물욕을 갖지 말라.'는 교훈이 위 성경 구절의 진짜 의의다.
2.1.2. 기독교에서 부자는 무조건 지옥행인가?
위 성경 구절에서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너는 천국에 못 간다.'고 못박은 적은 없다. 대신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쓰고', '나(예수)를 따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따라서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지옥행이라는 법은 없다. 다만, 청년이 실망하여 돌아간 것처럼 어떻게 모은 돈을 나눈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결단일 뿐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당대 기준으로 재력가에 꼽힐 만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단 아브라함부터 부자였으며[1] , 야곱, 이사악도 부자였다. 예수의 애제자이자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받은 베드로의 경우에도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으로, 당시에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구약에서 허락한 음식인 코셔 푸드를 먹었는데 '물에서 나는, 비늘이 있는 생물'[2] 인 물고기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따라서 고기를 잡아 파는 베드로는 가난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부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예수에게 무덤을 드린 아리마태아의 성 요셉도 부자였다.
결국 성경 속 부자였던 성인들은 천국에 갔을 것이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심(聖心)이며, 자신의 부를 통해 가난한 자를 돕는 등 기독교 교리에 합치되게 살아간다면 아주 가난한 자가 아니더라도 구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영화
켄 폴레트(1949~ )원작소설에 리처드 마퀸드 감독[3] 의 영화. 1981년작. 한국에선 1982년 1월 1일 새해특선으로 개봉하여 서울관객 12만을 기록했다. 당시 흥행 수준으로 그럭저럭 흥행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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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 Of The Needle. (바늘의 눈)
2차대전 말엽, 냉혹한 독일첩보원인 바늘구멍(암호명,배우는 도널드 서덜랜드)은 영국에서 지내다가 자기 정체를 알아차린 하숙집 여주인을 칼로 죽이고,그동안 알아낸 노르망디 작전안을 비롯한 고위정보를 가득 챙겨 배를 타고 독일로 가던 길에 추격하던 인물들이라든지 수색하던 군인들을 만나 싸그리 다 죽인다. 그렇게 독일로 가는 도중에 배가 파손되어 어느 외딴 등대섬에 머무른다. 거기에는 사고로 다리를 못쓴 탓에 휠체어에 의존하며 지내는 등대지기와 그의 아내, 아들이 살고있었다.
거기서 고립되어 비극이 일어나는데, 주인공은 여주인공을 사랑하지만 여주인공은 그런거 없다(주인공이 몇명 죽이긴했다. 결국 정체를 알아차린 남편까지 죽였다.) 결국 유보트를 앞두고 죽는다. 1989년에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를 독점계약하여 비디오로 낸 SKC 비디오는 다른 비디오에 수록된 이 영화 예고에서 그만 마지막에 여주인공 총에 맞아죽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줘 스포일러를 해버렸다. 꽤나 사실적으로 1대 다수 격투도 사실적으로 재현해냈다. 스티븐 시걸처럼 한대도 맞지 않는게 아니다. 맞으면서 결국 쓰러뜨리는등, 굉장히 사실적이다. 덕분에 여주인공이 섬에 머물던 그의 온몸 곳곳에 난 상처를 보고 수상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평가는 꽤 좋은 편. 스파이 눈으로 보는 시각과 냉혹한 스파이를 열연한 도널드 서덜랜드 연기도 꽤 잘 되었다. 하지만 흥행은 본전치기 정도인 1750만 달러에 그쳤다.
그런데 전쟁말기에는 독일이 아무리 중요한 정보라도 역전시킬수는 없었다. 주인공의 행동은 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1945년 초반, 제 아무리 노르망디 상륙전 정보를 알아차렸다고 해도 나치 독일로선 길어야 몇 달 겨우 전선을 길게 이끌 수준이었고 장비에서 병력면에서 이미 패배가 보이던 시기였다.
원작 마지막에는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서독이 우승한 방송을 보고 한 가정에서 한 할아버지가 독일놈들이 우승하다니...이렇게 투덜거리는데 같이 보던 손자에게 독일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2차대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언급되고 "그러고 보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한 독일 스파이가 알아차렸단다. 하지만 그 놈은 그 정보를 본국에 보고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너희 할머니가 죽였지." 라는 말을 한다. 즉...여주인공이 30년 지나서 다른 사람이랑 재혼했던 것.
원작소설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국내에서 여러번에 걸쳐 번역되어 나왔다. 80년대 중순 해적판에선 영화장면들을 무단으로 싣기도 했는데, 90년대 중순에 나온 정식판에선 그런걸 다 빼고 글로만 나왔다.
여담인데 87년 9월 13일 명화극장에서 더빙, 방영하던 도중 방송사고로 우리말로 나오다가 갑자기 영어로 대사가 나오던 소동이 있었다. 고인이 된 영화평론가 정영일이 나와 명화극장 영화를 소개할때 이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로부터 1년도 안가 정영일은 암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