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박명렬은 1912년 7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 남부면 반죽리(현 공주시 반죽동)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벌인 공주고보생들의 동맹휴학과 반일 가두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1] 이후 그는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공주고보생 김순태(金淳泰), 공주소년연맹 위원장 안병두(安炳斗) 등과 함께 반전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32년 3월 5일경 영명학교(永明學校)를 비롯한 읍내 곳곳에 반전벽보를 붙이고 격문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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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1932년 3월 10일 동지 4명과 함게 체포된 그는 12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1933년 2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의 형이 확정되기까지 11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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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 박명렬은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독서회를 조직하여 반일사상을 고취했다. 그러나 1935년 4월 29일, 1934년 여름에 있었던 이재유 사건 관련 도주자 김윤회(金潤會)와 교유한다는 이유로 공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가 그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1936년 1월 이후 충칭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행정비서요원직을 지냈다. 1947년 귀국한 그는 1953년까지 한국독립당 당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5년에서 1958년까지 자유당 당무위원을 잠시 지내었고, 1966년에서 1967년까지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을 역임했다. 이후에는 서울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3년 10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명렬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86년 공주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