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용석(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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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鏞錫
1945년 11월 6일 ~ (79세)
대한민국의 전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945년 충청북도 진천군 만승면(현 광혜원면)에서 태어났다. 광혜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70년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에 입사하면서 노동자의 가혹한 현실에 눈을 떠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72년 한국모방 민주노조 창립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당시 원풍모방은 청계피복[1] , 동일방직, YH무역[2] , 콘트롤데이타 등과 함께 서슬퍼런 유신정권 치하에서 몇 안되는 굳건한 민주노조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같은 조직이었다.
1974년 한국모방 노동조합 지부장에 취임하여 1975년 회사가 이름을 원풍모방으로 바꾼 뒤에도 계속 노조를 이끌었다. 그러나 1982년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권의 가혹한 탄압으로 노조는 무너지고, 노동쟁의조정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돼서 옥살이를 했다.
출소뒤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위원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노동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계속해서 노동운동을 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는 민중당에서 당무위원을 지냈다.
1993년 김근태가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을 창립하자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5년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여기에 동참해서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김대중 총재의 노동담당 특별보좌관, 국민회의 노동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국회의원(제12번)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 국회 환경노동상임위원회 청문회 중 정우택 의원과 언쟁 도중 정우택 의원이 유리컵으로 방용석 의원의 머리를 내려 쳤고 머리에서 피가 나 응급처치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2년 1월까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민주화운동보상추진위원회에서 원풍모방 노조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기사
2002년 1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노동부(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재임하였다. 고졸에 노동운동가 출신 노동장관으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15대 국회에선 1997년 외환 위기로 실업자가 폭발하고 노동조건이 악화되자 집권당 국회의원임에도 이를 매섭게 추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정작 본인이 노동부 장관이 된 뒤론 자신의 발언을 모조리 뒤집는 모습을 보여줘서 한때 같이 하던 노동운동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1998년 정부가 공무원노조 결성에 반대하자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정작 2001년 노동부 장관이 된 뒤에는 공무원노조와 대화는커녕 무조건적인 불허방침을 내세워서 경찰이 결성대회장에 난입해서 강제해산 후에 간부들을 체포하는 상황을 수수방관했다. 장관되면 세상도 달라진다?
2004년 2월부터 2007년까지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