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독려 공익광고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
'''투표율'''
63.9%▼ 8.0%p
'''선거 결과'''
[image]

<rowcolor=#70000b> '''정당'''
'''지역구'''
'''전국구'''
'''총합'''
'''비율'''
'''신한국당''']]
'''121석'''
'''18석'''
'''139석'''
'''46.5%'''
'''새정치국민회의''']]
'''66석'''
'''13석'''
'''79석'''
'''26.4%'''
'''자유민주연합''']]
'''41석'''
'''9석'''
'''50석'''
'''16.7%'''
'''통합민주당''']]
9석
6석
15석
5.0%
'''무소속''']]
16석
-
16석
5.4%
1. 개요
2. 과정
2.1. 김대중의 정계 복귀
2.2. 선거구 획정 논란
3. 선거 결과
3.1. 분석
3.2. "철새의 계절"
3.2.1. 1차 집단 이동
3.2.2. 2차 집단 이동
3.2.3. 3차 집단 이동
4. 여담
4.1. 사전예측조사의 실패
4.2. 정치 1번지 종로
4.3. 인재 영입 전쟁
4.4. 자민련의 선전(3당 합당의 분열)
4.5. 뉴스 앵커들의 정계 진출
4.6. 김진명 대 맹형규
4.7. 만화계의 정치 진출 시도
4.8. 사노맹 사건 관련
5. 출처

[clearfix]


1. 개요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이다. 투표율은 지난 총선에 비해 8%p 줄어든 '''63.9%'''였다.

2. 과정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와 같았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이 16석 늘어 253석으로, 전국구 의석이 16석 줄어 46석으로 감소했다.[1] 출마 정당은 여당신한국당야당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등이다.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였으며, 비례대표격인 전국구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수의 합산'''으로 결정했다. 13~14대 총선에서 전국구를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 수'''에 따라 배분하던 규정이 바뀐 것이다. 지역구 의석수를 얻기 힘든 소수 정당에 조금은 유리한 쪽으로 선거법이 개정된 것이다.[2]
선거 전 각 당의 목표 의석는 신한국당 원내 제1당 수성, 새정치국민회의 100석 이상 확보, 자유민주연합 60석 이상 확보, 통합민주당 원내교섭단체 구성 의석(20석 이상) 확보였다.

2.1. 김대중의 정계 복귀


1992년 14대 대선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실력을 과시한 뒤, 그 해 7월에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민주당 내부에서 그의 복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자 아예 당을 나와 새정치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때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민주당 의원 중 2/3 정도가 국민회의로 넘어가게 된다. 이로써 야권은 크게 개편 및 분열되는데, 국민회의의 대선을 노린 안정, 보수적 행보에 통합민주당은 진보, 시민사회계 인사[3]를 영입하며 경쟁을 벌이게 된다.

2.2. 선거구 획정 논란


선거 1년 전인 1995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시행됨에 따라 선거구도 이에 따라 조정되어야 했으나 여야는 이를 16대 총선부터 반영하기로 하고 15대 총선은 14대 총선 당시의 지역구를 조금 손보는 선에서 치르기로 합의했고, 그에 따라 지역구는 260석, 전국구는 39석으로 조정되었다. 그런데 최대 인구 선거구인 부산 해운대구-기장군(36만 4천)과 최소 인구 선거구인 전남 장흥군(6만 1천)의 인구 편차가 무려 6:1이었고 이에 대한 표의 등가성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또한 충북에서는 제천시와 제천군이 통합되면서 기존의 제천군-단양군 선거구가 제천시-단양군 선거구로 재편됨에 따라 남은 1석에 대한 보상으로 단일 선거구로 묶였던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서 옥천군이 분리되고 보은군-영동군 선거구로 개편되자 이에 대한 게리멘더링 논란이 일어났다.[4]
결국 헌법재판소에서는 1995년 12월 27일 선거구 인구 상한선과 하한선의 비율을 4:1 이내로 조정할 것을 판시했다. 그러자 여당인 신한국당은 인구 하한선을 7만에서 해운대-기장 선거구 인구의 1/4인 9만 1천으로 상향하기로 방침을 제시했는데, 이럴 경우 국민회의의 텃밭인 호남권에서 대대적인 의석 감소가 불가피하였기에 국민회의는 인구 하한선을 7만으로 유지하고 상한선을 30만에서 28만으로 낮추는 방안을 제시했고 자민련은 인구 하한선을 분구 기준선인 30만의 4분의 1인 7만 5천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선거구 하한선이 어떻게 조정되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지는 만큼 여야간의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를 보다 못한 헌법재판소에서는 상한선 280,736 이하, 하한선 70,184 이상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예시하기까지 했다.[5] 결국 여야 협상 끝에 1996년 1월 24일 여당은 상한선을 30만, 하한선을 7만 5천으로 하자는 야당안을 수용하고, 야당은 통합시 선거구에 대한 일시적 특례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합의하였고,[6] 그에 따라 지역구는 260석에서 253석으로, 전국구는 39석에서 46석으로 조정되었다. 그에 따라,
  • 부산 강서구는 북구의 일부 지역과 통합하여 단일 선거구(북-강서 을)를 이룬다.
  • 강원 태백시와 정선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충북 옥천군은 보은군-영동군 선거구와 통합된다.
  • 충남 금산군은 논산군 선거구와 통합된다.
  • 전남 신안군은 목포시의 일부 지역과 통합하여 단일 선거구(목포-신안 을)를 이룬다.
  • 전남 영암군과 장흥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전남 화순군과 보성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경북 예천군은 문경시 선거구와 통합된다.
  • 경북 울진군은 봉화군-영양군 선거구와 통합된다.
  • 경남 거창군과 합천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통합 전에는 각각 인구 상한선을 넘겼으나 통합 후에는 분구 기준선인 인구 30 만에 미달하는 통합시의 경우 15대 총선에 한해 갑, 을로 분구한다.

3. 선거 결과


[image]
[7]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무소속[8], 기타
서울 (47)
'''27'''
18
0
1
1
경기 (38)
'''18'''
10
5
3
2
인천 (11)
'''9'''
2
0
0
0
강원 (13)
'''9'''
0
2
2
0
대전 (7)
0
0
'''7'''
0
0
충북 (8)
2
0
'''5'''
0
1
충남 (13)
1
0
'''12'''
0
0
광주 (6)
0
'''6'''
0
0
0
전북 (14)
1
'''13'''
0
0
0
전남 (17)
0
'''17'''
0
0
0
부산 (21)
'''21'''
0
0
0
0
경남 (23)
'''17'''
0
0
2
4
대구 (13)
2
0
'''8'''
0
3
경북 (19)
'''11'''
0
2
1
5
제주 (3)
'''3'''
0
0
0
0
지역구 (253)
'''121'''
66
41
9
16
전국구[9] (46)
'''18'''
13
9
6
-[10]
총합 (299)
'''139'''
79
50
15
16
'''전국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6,783,730
'''34.5%'''
18

4,971,961
'''25.3%'''
13

3,178,474
16.2%
9

2,207,695
11.2%
6

3,114
0.02%
0

177,050
0.9%
0

571
0.003%
0

1,693
0.01%
0

2,328,785
11.8%
-
총합
19,653,073
100.0%
46
총 유권자 수는 3,148만 8,294명이었는데, 이 중 2,011만 8,528명만 투표해 전국 평균 63.9%로 저조했다. 이는 역대 총선 중 가장 낮은 투표율이며 전년도 지방선거 때보다 낮았다. 여담으로 재야사학자 임영태는 그 원인을 '정치에 대한 관심도 하락'에서 찾았다.

3.1. 분석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는 물론 제1당 등극까지도 노리고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는 기대에 영 못미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85년 총선 이래로 (야권분열로 패배한 1991년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늘 민주당이 우세하던 서울에서 고작 18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면서 여당인 신한국당(27석)에 밀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인데, 특히 정대철, 조세형, 김덕규, 한광옥, 김병오, 장석화, 박실, 이원형 등 서울에 지역구를 두고 있던 중진급 정치인들이 대거 낙선한 것은 뼈아팠다. 이는 야권분열로 수도권 30여개 지역구에 통합민주당 후보가 출마하면서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가 분산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았다. 다만 통합민주당이 선전한 지역에서는 국민회의-민주당간의 1~2위 다툼이 벌어져 대부분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반면,[11] 통합민주당의 지지율이 낮은 지역에서는 국민회의 후보도 꽤 큰 폭으로 졌으므로, 결과적으로 통합민주당이 중도 성향의 무당층이나 신한국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제3당 효과를 어느정도 냈다는 분석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한다해도 1년전의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을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 수에서 앞섰고, 신한국당이 선전했다지만 득표율은 34.5%를 차지하는데 그쳐 지방선거 때보다 득표율이 내려앉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뼈아픈 결과는 맞다.
한편, 재야사학자 임영태는 이 결과가 야권분열 뿐만 아니라 중산층 보수화 때문이라는 색다른 주장도 했는데, 여권이 당선한 데가 유독 아파트 밀집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이 추론의 근거. 과거엔 가방끈 긴 중산층이 야당 성향(강남 지역의 경우 YS계 지지 성향이 강했다)이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중산층들의 전반적인 의식 또한 바뀌어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후의 양상을 보면 반보수 성향의 고학력 중산층 역시 여전히 많기에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나, 최소한 이때는 YS 집권기였기에 개혁보수 성향의 고학력층들이 신한국당을 지지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
실제 결과적으로 야권분열을 초래한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 창당에 대해 당시 상당수 지식인 및 개혁 성향 인사들은 이를 냉담하게 봤고, 그건 투표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과거엔 야권 분열 시 당선 가능 후보에게 전략적으로 투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서울 같은 경우 개혁 성향 민주당 인사가 출마해서 국민회의에 전략적으로 표를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야권 표가 국민회의-민주당으로 찢어져 신한국당 후보가 대거 어부지리를 얻었는데, 이 때문에 신한국당에선 "모순적이게도 여당 서울 승리의 최대 원군은 DJ다"(...)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렇듯 서울 지역의 야당 참패 뒤엔 야권 분열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정치권 신진대사 및 변화를 바라는 갈망이 작용한 것이다. 심지어 대구, 대전, 강원, 경북, 경남, 제주 등 8개 지역에선 단 한 석도 얻지 못해 DJ의 대권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실제로 야권 분열로 인한 호남출신 야당 고정표도 당시 총선에선 야권분열로 인한 혼돈으로 국민회의에 그리 모이지 못하고 분산되는 모습을 보여줘 호남표도 예전같지 않다는 비아냥을 들었던 총선이었다.[12]
국민회의는 비례대표(전국구) 선거에서도 불과 1% 가량의 득표율 미달로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14번이던 김대중 총재가 낙선하는 씁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하지만 김대중 총재는 이러한 선거결과를 놓고 유례없는 자화자찬에 들어갔다.

“이번 선거에서 왜 모든 언론은 국민회의가 패배했다고 보도하지요? 패배가 아니라 '''약진'''이란 표현을 쓰라고 언론에 요구하세요. 65석이 79석이 됐고 전국 58개 지역에서 3000표 차 이내의 초접전을 벌였는데 이게 민심이 아직 국민회의를 안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뭡니까. (중략) '''신한국당이 170석에서 139석으로 준 것이 이긴 것이냐, 국민회의가 65석에서 79석이 된 게 진 것이냐''', 뭐가 패배고 승리냐, 이걸 기조로 당 기자실에서 성명을 발표해주세요.”#

물론 이는 선거 전체로 볼땐 허세가 섞여있는 억지성 발언이었지만, 정신승리할 핑계는 되어 결과적으로 위기에 빠진 지지층을 추스르는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한편, 김종필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은 충청권을 싹쓸이하고 박준규, 김복동, 박철언 등 反YS 민정계 인사들이 출마한 대구광역시에서도 선전한데다 경기도에서도 구도심(수원시 장안구, 안양시 만안구) 또는 농촌 지역(평택시 을, 오산시-화성군, 파주시)을 중심으로 당선자를 추가하면서 50석으로 대약진했다. 이는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제외하면 제3당으로는 최대 의석을 확보한 것이었다.[13] 다만 이후 대구 지역의 경우 정치적 맹주가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DJP연합이 이뤄지며 다음 총선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시 한나라당에게 제 1당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통합민주당울산시, 안동시 등 영남권에서 3석을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서울에서 이부영만이 당선되고 부산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비롯한 전원이 낙선한 결과, 의석 수가 30석에서 15석으로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선자 3명이[14] 신한국당으로 이적하고, 이기택계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계열이 분열하면서 사실상 분당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소속 역시 경남지역에서 당선자를 많이 배출하긴 했으나 이마저도 신한국당 공천에서 탈락한 친여 인사들이었고, 이들은 당선 후 신한국당으로 넘어갔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김영삼 대통령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꽤나 선전했는데, 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 출신의 운동권 인사였던 이재오, 김문수 등 당시만 해도 참신하다고 평가받던 정치 신인들을 수도권에 대거 공천하고 야권 분열의 어부지리를 얻으면서 당초 예상보다 선전한 139석을 확보한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 47개 선거구 중 27석을 확보해 여대야소 현상을 만든 것은 보수계 정당에선 특기할만한 성과였다. 심지어 혼전 선거구였던 경기 북부지역도 북한군 비무장지대 무력시위 등 '북풍'이 작용해 신한국당이 휩쓸었고, 국민회의 텃밭이던 호남 지역에선 강현욱(군산을), 자민련 텃밭이던 충남 지역에선 이완구(홍성)가 각각 당선해 일단 교두보를 확보했다. 물론 아래에 나와있듯이 출구조사가 너무 압도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실제 그것보다 많이 부진한 개표 결과를 보고 나서는 1당이 되고도 찜찜해졌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지만.
다만 대구 지역의 참패는 골 아플 만 했는데, YS정부의 전두환, 노태우 구속 역풍 등이 겹치며 자민련 후보가 득세해 서구을에선 강재섭, 달성에선 김석원이 뽑힌 게 전부이고, 경북/경남에서는 1당은 되었으나 포항 북구에 옥중출마한 허화평,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수석을 지낸 밀양시김용갑 등 무소속 후보들에게 일부 의석을 내주면서 원내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훗날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박근혜를 정계에 컴백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당이 다시 보수화되는데 한 원인이 된다. 게다가 별탈없이 치러진 전년도 지방선거와 달리 관권 선거, 금품 살포 분위기도 만연했기에 정치개혁입법 취지를 무색케 만들었다. 그래도 무소속까지 흡수해 과반수 넘는 의석을 확보한건 다행이었으나, 야당의 반발로 원 구성도 못해 한동안 국회는 파행으로 치닫게 된다.
선거 직후 결과는 여당 139석, 야권 144석, 무소속 16석(12석은 영남 지역 무소속)의 절묘한 의석 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끝났다면''' 이 총선은 그다지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3.2. "철새의 계절"


이 선거 이후 몇 년간 한국 정치판은 굵직굵직한 정계개편이 많았고[15] 이에 따른 의원들의 당적 변경도 흔했는데, 사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 당시에는 각 당들의 정책, 이념이 고만고만해서 지역[16] 및 인물(보스)[17] 변수가 정당을 가르는 주된 기준이었는데, 이러다보니 이념이 많이 상반되는 인물들도 한 정당에 잡탕처럼 섞여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과장 좀 보태서 '보스 말이 곧 이념'처럼 떠받들어지던 시대였으니... 물론 이러한 기조는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이어지고 있지만, 이때는 차원이 달랐다.
환경이 이러니 정치인들도 당적을 바꾸는 데에 심리적인 제약이 덜한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특히 중도파 입장에서는 이 당이나 저 당이나 하는거 보면 오십보백보인데 본인이 정말로 당에 충성심이 있지 않는 이상 굳이 귀찮게 야당 생활을 할 이유가 없었다.[18] 하지만 물론 이는 의원들의 사정이었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2.1. 1차 집단 이동


'''신한국당의 과반 채우기와 크리스마스 날치기'''
선거 직후 신한국당은 통합민주당[19], 자유민주연합[20], 무소속 의원을 대거 영입,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1996년 연말의 노동법/안기부법 크리스마스 직권상정 정국을 예고했다. 이러한 '의원 빼가기'로 신한국당은 157석까지 의석이 늘어났으며,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총 의석은 125석으로 줄어들었다(국민회의 79 + 자민련 46).
이렇게 몸집을 불린 결과로 법률 개정안 정족수를 충족시킨 신한국당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1996년 12월 26일 새벽, 자당 국회의원 154명을 버스에 태워 대동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기습적으로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참조.
게다가 대선을 코앞에 둔 1997년 11월엔 DJP연합이 이뤄지고 신한국당에 박근혜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영입되자, TK 자민련 의원 9명 중 3명인 이의익 의원(대구 북구갑)과 안택수 의원(대구 북 을), 박종근 의원(대구 달서 갑)이 자민련에서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심지어 안택수 의원은 당시 자민련 현직 대변인이었다(...).[21]
그리고 DJP연합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시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통합민주당 조순의 주도로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전격 합당하여 165석의 거대 여당 한나라당이 탄생한다. 그렇게 한나라당은 대선 후보 이회창, 총재 조순 체제로 15대 대선을 치뤘으나 결과는 김대중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자리를 내주고 패하여 야당이 된다.

3.2.2. 2차 집단 이동


'''국민회의-자민련의 역(逆) "의원 빼가기"'''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고 국민회의는 김대중을 지지한 김종필의 자민련과 함께 120석의 공동여당이 된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의석상 다시 신 '여소야대' 현상이 일어났고[22] 첫 야당 신세를 겪게 된 160석이 넘는 비대한 한나라당은 과반 의석을 이용해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고 김대중 정권 타도성의 장외집회등으로 잦은 정국 파행을 일으키며 연립 여당과 김대중 정부의 심기를 건드린다. 그리고 이에 연립 여당측은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전후해 역 '의원 빼가기' 러쉬를 시작한다.
이때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항의하던 한나라당 하순봉 원내총무를 향한 자민련 구천서 원내총무의 발언이 압권이었는데, '''"우리는 아직 원금도 못 받았다."''' 이게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이, 김종필은 DJP연합이 깨진 이후인 제16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고 아예 중립을 선언해버릴 정도였으니 그 빡침의 정도를 알만했다.[23]
1998년 4월 민정계 김종호, 박세직 의원을 시작으로 오장섭[24], 이완구, 이의익[25] 의원이 자민련에 들어가더니, 4월 29일엔 서정화, 이성호, 김인영, 이강희, 서한샘 의원이 새정치국민회의로 이적했다. 이어서 5월에 김명섭, 정영훈(새정치국민회의 행), 이택석(자유민주연합 행) 의원이, 8월에는 홍문종(새정치국민회의 행) 의원이 당적을 옮겼다(국민회의 87석, 자민련 48석. 한나라 과반 붕괴).
8월 28일에는 이인제국민신당까지 국민회의와 합당하면서 7석이 추가되었고, 국민신당 소속이었던 김학원 의원은 자민련에 입당했다. 이어 9월 초에는 노승우(자유민주연합 행), 김충일(새정치국민회의 행), 차수명 의원(자유민주연합 행)이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며, 최종적으로 9월 8일 한나라당의 유용태, 김길환, 박종우, 송훈석 4명이 이동하면서 연립 여당은 국민회의 101석(개헌 저지선 확보), 자민련 52석으로 합계 153석의 안정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한나라당은 140석으로 의석이 줄었다.[26]

3.2.3. 3차 집단 이동


'''다시 고향(한나라당)으로'''
이후 '철새' 의원들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시민들에게 찍혀(...) 이른바 낙선운동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낙선의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상당수 정치인들은, 2001년 통일부 장관 파동으로 DJP연합이 깨지자 살 길을 찾아 헤매다, 차기 대선 레이스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우세해보이자 다시 원래 있던 정당으로 돌아갔다. 다만 송훈석 전 의원처럼 그대로 눌러앉아버린 케이스도 있긴 했다.

4. 여담



4.1. 사전예측조사의 실패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방송사 합동 예측 조사 결과'''
정당
지역구
전국구
예측 의석수[27]
'''신한국당 '''
155
20
'''175'''(130~189)
'''새정치국민회의 '''
59
12
'''71'''(54~82)
'''자유민주연합'''
26
8
'''34'''(25~37)
통합민주당
5
6
11(11~14)
무소속
8
-
8(4~10)
'''조사 개요''' #
의뢰기관
KBS, MBC, SBS, CBS
수행기관
한국갤럽, 코리아리서치, 미디어리서치,
월드리서치, 동서리서치
수행기간
1차 : 1996년 4월 4일~7일
2차 : 1996년 4월 8일~10일
3차[28] : 1996년 4월 11일 14시까지
조사대상
253개 지역구, 선거구별 350~1000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 4.3%p

MBC 출구조사

SBS 출구조사
'''역대급 출구조사'''로 불리는 문화방송[29]과 SBS의 출구조사 방송 신한국당 175석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총선 출구조사 안습 전설'''의 첫 막을 올렸다(...).[30] KBS, MBC, SBS 방송3사가 전년도 실시한 지방선거 투표자 조사결과가 제법 정확하게 나오자 정치권에선 투표자조사를 용인하도록 법을 바꾸었고, 방송사간의 지나친 경쟁을 피한다는 취지(일단 말은 그렇다. 물론 현실하고 거리가 멀었지만..)를 살려 공동 투표자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이 투표자 조사결과를 저녁 6시 정각에 발표했다.[31] 이 투표자 조사에선 신한국당이 압도적으로 과반 확보('''175석''')하는 것으로 나왔고, 당연히 국민회의와 민주당 지지자들은 엄청난 멘붕을 겪게 되고 신한국당 지지자들이나 당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겠지만...[32]
하지만 막상 개표를 시작하고나서는 개표결과와 실제 출구조사 결과와 영 딴판으로 나왔다. 개표를 시작했는데 신한국당이 당초 예상보다 부진했고, 심지어 과반에도 못미쳤던것이었다. 물론 선거 전 예상을 생각하면 선전한것은 맞지만 어쨌든 출구조사와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엄청난 초대형 사고나 마찬가지인 셈으로 최종 개표결과는 신한국당 139석으로 예측의석보다 무려 36석이나 적게 나왔고 국민회의는 8석(투표자조사:71석), 자민련은 16석(투표자조사:34석), 민주당은 4석(투표자조사:11석), 무소속이 8석(투표자조사:8석)이나 많이 나왔다. 덕분에 밤새도록 방송 3사에 항의전화가 빗발쳤고 그 후폭풍으로 인해 다음날 방송 3사는 사과방송을 해야 했다. 덧붙여 외신에서도 비웃음거리로 소개되는 등 굴욕을 당해야 했다(...). 때문에 과거 대략 맞은 1995년 지방선거 때의 예측조사를 생각하고, 이번에도 방송사들의 예측조사 결과만 보고 나서 일찍 잠에 들었다가 다음날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투표자 조사를 시행한 여론조사 기관들의 신뢰도도 추락해 광고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졌다. 이는 1997년 한국갤럽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맞추고 나서야 해소된다. 여하튼 당시 신한국당 지지자들은 개표가 시작되기 전에 너무 결과가 압도적으로 나왔던 탓에 선거운동 기간 동안 나온 예측치에 비해 잘 나온 수치임에도 개표 중이나 개표가 끝나고 나서는 기분이 영 찝찝했다는 반응이 많았다(...).[33] 어쨌든 민주당이나 국민회의 당원들 입장에서 보면 출구조사 결과가 너무 절망적으로 나왔던 탓에 그나마 개표 중이나 개표가 끝난 뒤에 멘붕을 덜 겪기는 했다.
15대 총선에서 투표자조사와 실제 당선자가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투표자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39개 지역.

4.2. 정치 1번지 종로


[image]

이명박, 이종찬, 노무현 그리고 김을동 후보 등이 출마했던 '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의 경우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분열 양상이 벌어져, 당시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가 지역구 초선[34]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2년 뒤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받던 중에 자진 사퇴하여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이 자리는 국민회의 소속으로 나온 노무현 후보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덕분에 종로는 역대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한 국회의원 선거구가 된다.[35] 국회의장도 배출했다.[36]

4.3. 인재 영입 전쟁


그동안 치러진 총선 공천 방식이 주로 각 당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밀실 공천[37]이었다면, 해당 선거는 그래도 신선한 외부 인사들의 영입으로 나름 주목받은 선거였다. 15대 初選(초선)이 46%…기성정치인 不信(불신)반영.
보수 진영에서는 개혁적인 중도 성향을 띤 인물은 물론 진보 운동권 정치인까지 내세웠고, 반대로 민주 진영에서는 꽤 보수적인 성향으로 알려지던 언론인이나 법조인, 장성 출신 인사들을 영입했다. 특히 차기 집권을 노리기 위한 김대중의 보수 끌어안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신인 인재 영입을 넘어 반대 진영에서 활동하던 기존 정치인까지 대거 등용하였다. 총선 승리를 위해서 '''진영을 넘나들어''' 각자의 성향에 따른 약점을 보완했던 셈. 신한국당에서는 선대위원장 자리를 겸하여 이회창, 박찬종을 끌어오는데 성공했고, 민주당 측에서도 유신 시절 장군 출신으로 전국구를 한번 역임한 강창성, 노동과 인권 운동에 참여하던 서경석 목사가 지역구에 뛰어들었다. 새정치국민회의에서도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인인 이종찬, 총선을 앞두고 색깔론을 차단하고 군사, 안보 라인을 강화하기 위해 천용택, 임동원 등을 데려왔다. 그 밖에도 한글과컴퓨터 창업자인 이찬진 대표와 아래 서술할 SBS 앵커 출신인 맹형규, KBS 간판 앵커 박성범, 김영삼 대통령 딸과 친구 사이라 인연이 있어 정계에 데뷔한 이덕화는 신한국당으로, 기존 정계에 뛰어든지 얼마 안된 작가 출신 김한길, 김진명 등은 새정치국민회의로 갔다.
특히 이 선거에서 초선으로 당선된 몇몇 의원들은 중진, 거물급 의원으로 성장했으며 2020년이 지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정치인이 꽤 많다. 민주당계 정당에서는 추미애와 소위 '천신정' 트리오로 나름 유명한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정세균, 김근태, 설훈, 당시 최연소 지역구 의원에 당선된 김민석 등. 보수정당에서도 홍준표, 김무성,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황우여, 남경필, 안상수(창원,인천 둘다), 민중당 출신 거물급 노동 운동가들인 김문수, 이재오 등이 대표적이다. 정치에 때묻지 않은 신인들을 각자의 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각 진영간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특히 홍준표의 경우 처음에는 노무현민주당 정치인들이 밤늦게 집에까지 찾아와 입당을 제안하여 민주당으로 갈까 했는데 몇 시간 안돼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온 여당 측 강삼재 사무총장의 설득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하게 됐다는 일화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권교체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도 계속되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회창, 윤여준에 의해 수구, 보수적인 인사 대신 원희룡, 오세훈 같은 개혁적인 중도 신인들을 대거 영입하였고, 새천년민주당임종석, 우상호 등 소위 386세대 인사를 이때부터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4.4. 자민련의 선전(3당 합당의 분열)


15대 총선에선 민자당에서 탈당해 중도보수주의, 충청 지역주의를 내건 JP의 자유민주연합이 무려 50석을 당선시켜 세간의 화제를 낳았다.
당시 신한국당 내에선 3당 합당의 여파로 민주계(김영삼계, 주류세력) vs 민정계(5공 및 노태우 정권 부역 세력) vs 공화계(김종필계, 충청 기반) 세력 간 갈등이 심했는데[38], 이땐 민주계열 세력이 당권을 장악하고 나머지 두 세력에게 배타적 지배권을 행사할 때라, 대놓고 푸대접을 받은 김종필이 결국 두 세력의 인사들을 끌고 나와 자유민주연합이라는 간판으로 총선을 치루게 되었다. 그 결과 충청 지역 뿐 아니라, 대구, 경기, 강원 지역에서도 상당히 선전해, 해당 선거에서 총 50명의 당선자를 내게 된다. 때문에 3당 합당의 분열을 보여준 첫번째 선거였다는 점에서 분명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이러한 구도는 보수 진영에서 2000년대 친이 vs 친박 vs 충청 세력의 구도로써 계승되는 모습을 보인다.[39] 다만 충청 세력의 경우, 애초에 충청도가 이념보단 일명 충청 대망론으로 상징되는 지역 거물급 정치인에 대한 갈망으로 지지를 보내는 측면이 컸고, 이게 김종필과 이회창의 은퇴 이후 사라지자[40] 충청지역정당 역시 갈수록 세가 약해져 결국 2010년대 제1보수정당에 흡수되어 사실상 소멸된다. 이후부터 충청권은 여야 가리지 않고 충청 대망론을 이뤄줄 정치인을 여전히 물색하고 있다(...).

4.5. 뉴스 앵커들의 정계 진출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맹형규SBS 8 뉴스 앵커와 박성범, 이윤성KBS 뉴스 9 앵커를 이미지 쇄신차원에서 영입하였고, 이에 뒤질세라 국민회의에서도 정동영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영입하였다. 이들은 전부 전국구가 아닌 지역구로 출마했는데 아무래도 대중적 인지도가 있었기에 기존에 지역기반으로 활동하던 정치인들을 누르고 '''전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해낸다. 이전부터 정계활동을 하던 하순봉 전 뉴스데스크 앵커까지 포함하면 5전 5승이고 변웅전까지 합하면 6전 6승인 셈.

4.6. 김진명 대 맹형규


당시 국민회의에선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 선거구에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큰 인기를 끈 김진명 작가를[41] 공천한 바 있다. 상대는 역시 초선에 도전하는 SBS 앵커 출신 맹형규. 결과는 맹형규 후보가 39.8% 득표로 당선. 김진명은 33.2%를 득표하며 낙선했다.[42]

4.7. 만화계의 정치 진출 시도


더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로는 <병영일기>, <말주비> 등의 만화를 낸 시사만화가 박호성 화백이 있었는데, 박 화백은 무소속 신분으로 서초을에 출마했으나 결국 낙선했다. 이와 관련해 만화평론가 손상익은 만화문화의 대중성 검증과 이의 정치세력화를 시도한 사례로 만화가가 국회의원에 도전함에 따라 만화문화의 영향이 정치권에까지 퍼진 '대중문화 시대'의 조짐을 실감케 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2년 뒤에 선배 이홍우 화백도 18대 총선 공천에 나가려다 탈락했다.

4.8. 사노맹 사건 관련


사노맹 사건 재판 과정 당시 1992년 7월 사노맹 지도자 백태웅은 첫 공판에서 사노맹은 안기부가 선전하는 바와 같이 테러단체가 아니며, 머지않은 미래에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이 합법화 될 것이라는 확신[43] 아래 1996년 의회선거[44]에 참여할 목적으로 정당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5. 출처


  • 대한민국 50년사 2권 - 임영태 저. 들녘. 1998. p385~387.

[1] 역대 총선 중 전국구(비례대표) 의석이 가장 적었던 선거로, 두 번째는 일단은 2020년 21대 총선의 47석이었다. 총 의석수가 19대 총선 이후 300석으로 늘어서 그렇지, 지역구 수는 15대와 20, 21대가 공교롭게도 같다.[2] 의석 수가 기준일 경우 소수 정당은 소선거구에서 의석을 따내지 못하는(즉 1위를 하지 못하는) 이상 단 한 석도 얻지 못하지만, 득표 수의 합산이 기준이 되면 지역구(소선거구)에서 패해도 얼마나 많은 득표를 올렸는지에 따라 전국구 결과에 반영될 수 있다.[3] 이들이 중심이 된 개혁신당이라는 당과 통합하였다.[4] 옥천군은 보은군과 영동군 사이에 위치하는데 옥천군이 분리되면 보은군과 영동군은 서로 떨어진 월경지가 된다.[5] 전체 인구를 지역구 의석 수로 나눈 수인 175,460에서 ± 60% 이내.[6] 대표적으로 경북 안동시의 경우 과거 안동시, 안동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각각 11만, 8만으로 둘 다 인구 하한선 7만을 넘겼으나 통합 이후 인구 19만으로 분구 상한선인 30만에 미달되었다. 원칙대로라면 1석을 배정받아야 했으나 여야 합의로 15대 총선에 한해 2석을 배정받았다.[7] 아래 표와는 다르게 연한 녹색이 자민련, 짙은 녹색이 국민회의이다.[8] 군소정당의 후보는 모두 낙선하며, 따라서 당선자 전원이 무소속이다.[9] 무소속을 제외한 '''지역구 득표율에 비례'''하여 나눠갖는 방식.[10] 1인 2표제가 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표(死票)로 분류되었다.[11] 통합민주당 이부영 후보가 당선된 서울 강동갑 제외.[12] 96 총선 호남표 표심 분석(동아일보)[13] 다만 통일민주당은 의석이 아닌 득표율로는 당시 제2당이었다. 참고로 이 선거 이후 제3당이 가장 약진한 사례는 이로부터 20년 후인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은 것이었다.[14] 이규택(경기 여주), 황규선(경기 이천), 최욱철(강원 강릉 을).[15] 김영삼 정부를 거쳐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초기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정계 개편이 잦았다.[16] 물론 지금도 각 정당별로 지역 기반이 있긴 하지만, 이 시기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지역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던 때였다.[17]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의 보스가 각각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18] 당시 당적 변경을 한 의원들 중 대부분은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 케이스이다.[19] 이규택(경기도 여주군), 황규선(경기 이천시), 최욱철(강원도 강릉시 을).[20] 최각규 강원도지사, 류종수(춘천시 을), 황학수(강릉시 갑) 의원 등 강원도 지역 정치인을 죄다 끌어들였다.[21] 그는 당적을 바꾸기 직전까지만 해도 자민련 대변인으로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기피의혹을 선두에 서서 문제제기 했었는데, 신한국당으로 이적한 이후엔 이회창 후보를 "참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라고 추켜세운다(...).[22] DJ 당선 직후 새정치국민회의의 의석을 보면 김대중의 당선 직전 이석현 의원과 권노갑 의원이 각각 '한국/남조선 병기 명함' 파동과 한보 뇌물수수사건이 터졌는데, 이에 이 의원이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하고 권노갑 의원은 한보 뇌물수수로 한보청문회에 불려나와 구속당하고 의원직을 상실함으로서(권노갑 의원 청문회 이모저모) 국민회의 의석은 77석으로 더더욱 줄어들었다.[23] 헌데 재미있는 점은 훗날 그 이회창이 세운 자유선진당이 몰락한 자민련을 대신해 충청계 지역정당의 바통을 이어받는다는 것. [24] 이회창의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군이 지역구였다. 총선에서는 자민련 조종석 후보에게 개발살났으나, 선거법위반으로 치러진 재선거에서 이회창의 지원으로 몰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입당해 원내총무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는데, DJP연합 해체 이후 다시 한나라당 복당을 시도했으나 그때의 통수를 잊지 못한(...) 이회창에게 거부당하고 그대로 정계에서 아웃된다.[25] 상술되어있듯 원래는 자민련 공천으로 대구에서 당선되었으나, DJP 연합이 이뤄지자 신한국당으로 날아갔다가, 기대했던 대구시장 후보 공천을 받지 못하자 다시 자민련으로 복당(...)해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50% 대 득표차로 한나라당 문희갑 후보에게 개발살 났고, 이후 정계를 떠난다. [26] 이 명단에는 국민회의 1석, 자민련 2석의 명단이 빠져있다.[27] 괄호는 당시 조사에서 오차범위를 감안한 최소치와 최대치이다.[28] 1~2차 조사 중 경합 혼전지 대상[29] 첫 화면에 나오는 엄기영신경민이 그 후 서로 다른 당에서 정치를 했다는 것도 알면 나름 흥미로운 포인트. 다만 엄기영은 MBC를 박살낸 MB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해 민주당의 X맨 노릇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30] 정확하게는 4년 후인 16대 총선부터 출구조사가 시작되었고, 이 때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 방식으로 예측한 것이었다. [31] 이 와중에 MBC가 상당수 지역구에서 불법(지금은 불법이 아니지만 당시엔 투표소에서 500m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출구조사를 하는건 불법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출구조사를 벌이다가 타 방송사에 의해 무산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 그리고 투표자 조사결과가 틀리고 출구조사 결과가 상당히 정확한걸로 나오자 출구조사 거리 규정 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동안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16대 총선에선 망했어요(...).[32] 참고로 당선자 예측발표 했을땐 오차범위(+-4.3%) 따윈 쌩까고 조금이라도 앞서면 그냥 당선예상! 이런 식으로 발표했다. 물론 오차범위를 감안해도 신한국당 130~189석, 국민회의 54~82석, 자민련 25~37석, 민주당 11~14석, 무소속 4~10석으로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사실상 당선자 예측이라는 의미가 없다시피한 조사이긴 했다. (특히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의 경우 예상 의석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전국구 득표율에서도 국민회의-자민련-민주당의 경우 오차범위 내에서 맞쳤으나 신한국당의 경우 실제 득표율(34.8%)보다 예측조사(43.5%)가 훨씬 더 나왔다(...).[33] 여담으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과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선거에서 이겼긴 했는데, 출구조사보단 결과가 못나왔기 때문.[실제] A B 개표결과 3위.[34] 전국구 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그것까지 합치면 재선의원이었다.[35] 윤보선,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36] 정세균 전 국회의장.[37] 이건 한국 정치권의 고질적인 문제라서 '''단순히 시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15대 총선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 생긴 소위 새누리당의 공천파동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정치에 아직 남아있는 잔재인 셈이다. 그래도 21대 총선 이후부턴 시스템 공천이라 하여 그나마 개선되고 있는 중이다.[38] 애초에 이들은 이념적 이질성을 싸그리 무시하고 한 당에 뭉친 세력이었기에 갈등이 없는게 더 이상했다.[39] 실제 보수 진영내에서도 친박 세력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과거 군부 독재 세력을 미화하는 경향이 다소 존재하고, 친이 세력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반대로 이들과 거리감을 두는 경향을 보인다.[40] 그런데 사실 이들조차도 충청권에서 압도적인 지지는 받지 못했다. 김종필은 아예 대선에서 주요 후보가 된 적이 없었고, 이회창 역시 3번의 대선에서 단 한번도 충청을 석권한 적이 없었다.[41] 1958년생으로 당시 만 38세였다.[42] 지역구에 모교인 보성고등학교가 있다.[43] 구소련이 무너졌으며 냉전이 해체되고 독재 정권이 몰락하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탈이념적 분위기가 있었다.[44] 다시 말해 해당 제15대 국회의원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