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승

 

  • 白樂承
  • 1896년[1] 6월 25일 ~ 1956년 10월 12일
  • 창씨명 : 시라카와 라쿠쇼(白川樂承)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


1. 개요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기업인. 본관은 수원(水原)[2].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부친이다. 일제 말기 국방헌금과 군수품 조달한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 경제 부문에 등재되었다.

2. 생애


백낙승은 1896년 6월 25일 한성부 동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종로 시전 상인 백윤수(白潤洙)의 4남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백낙원(白樂元), 백낙중(白樂仲), 백낙삼(白樂三) 등의 형이 세 명 있었다.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률과와 니혼대학 상과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1921년 부친이 설립한 대창무역(大昌貿易)의 이사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대창직물(大昌織物)[3] 이사에 취임하였고 1927년에는 합명회사 애국(愛國) 사장에 취임했다. 1928년에는 태창방직(泰昌紡織)의 이사에 취임했고 1933년에는 대창사(大昌社) 이사에 취임했다. 1935년에는 삼화제약(三和製藥)을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1937년 합명회사 백용상회(白湧商會)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맏형 백낙원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해동직물(海東織物)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태창직물(泰昌織物) 사장에 취임했다.
1941년에는 태창방직의 사장에 취임했고, 1942년에는 대전흥아직포공장(大田興亞織布工場)을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고 같은 해 선광수출공예(鮮光輸出工藝) 사장에도 취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전남도시제사(全南道是製絲)와 조선해수흥업(朝鮮海水興業) 등에 이사로 취임했고 유정칠공장(柳町染工場)과 대흥무역(大興貿易) 등에 감사로 취임했다.
한편, 그는 주로 태창직물의 면포를 만주로 수출하여 큰 이익을 취하였는데, 일제 말기 전시체제에서 중공업 분야로 진출하여 군수업체를 운영했다. 일본무연탄제철(日本無煙炭製鐵)주식회사를 통해 소형 용광로 제철사업을 수행하면서 1944년 군수생산책임제 기업으로 선정됐고 1945년 군수회사법에 따른 군수회사로 지정됐다. 이 외에도 1942년 강원조선철공(江原造船鐵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해 조선업에도 진출하였고,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朝鮮飛行機工業)주식회사 설립에도 참여하여 5천주 이상을 보유했으며, 조선기계제작소에는 관리인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이 시기 소위 애국기(愛國機)랍시고 일제에 비행기 1대를 헌납했으며#, 1938년 12월 24일 국방비 명목으로 1만엔을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 헌납하는 등# 소위 성심국방금품(誠心國防金品)을 1만엔 이상을 헌납한 전력이 있다.#
8.15 광복 후에는 태창공업(泰昌工業), 태창산업(泰昌産業), 태창직물, 태창방직, 해전직물(海田織物), 대전흥아직포 등을 경영했으며, 조선기계 관리인, 조선상공회의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또 1948년 대한문화선전사(大韓文化宣傳社)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였다가 1947년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자 여운형을 찾아가 근로인민당 본부로 사용해달라며 구 천향원(天香園) 요릿집 건물을 헌납하기도 하며 정치권과 연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경찰대에 체포되어 서울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여 쌓은 친분을 이용해 고려방직공사를 불하받고 대출과 외화 조달에 특혜를 받았으며, 자유당 정권의 비호 아래 여러 경제 관련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1956년 10월 12일 사망했다.

3. 미디어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윤갑수가 연기했다.

[1] 대한연감 4288년판에는 1906년생으로 오기되어 있다.[2] 27세 낙(樂) 항렬.[3] 1936년경 해동직물(海東織物)로 상호를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