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孝昌公園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330호
서울 효창공원
서울 孝昌公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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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가 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근대인물 / 광복운동
면적
123,303㎡
지정연도
1989년 6월 8일
제작시기
[6]
위치


1. 개요
2. 효창독립 100년공원(가칭) 조성
3. 연혁
3.1. 원소(園所)에서 숙영지로
3.2. 골프장과 유원지화
3.3. 독립운동가의 묘소
3.4. 민족공원화 시도
4. 기타
5. 바깥고리
6. 사적 제330호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시립공원. 지리적으로는 효창동 외에도 청파2가동, 마포구 공덕동신공덕동까지 영역이 있으며 일반적 공원과는 달리 호국보훈 관련 시설 및 유적지들이 있어 호국적, 역사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원래는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가 있는 자리라 하여 '효창원(孝昌園)'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효창원과 100보 정도 가까운 위치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의빈묘가 함께 있었다.
효창공원은 1989년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2. 효창독립 100년공원(가칭) 조성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해서 애국선열들이 모셔져 있는 효창공원을 국립공원화 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에 서울시문화재청, 국가보훈처, 용산구는 2019년 4월 10일 '효창독립 100년공원 조성 기본구상 계획'을 발표하고 효창공원을 정비하여 국가에서 관리하는 공원으로 만들겠다고 공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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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독립 100년공원(가칭) 조감도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효창공원을 국립공원화 한다는 기본적인 방향만 발표되었다. 2020년까지 세부 계획을 수립하고 2021년 착공하여 2024년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효창공원을 둘러싸고 있던 담장은 철거하고 기존의 보도를 확장해 효창100년길을 조성하고, 숙명여대, 경의선 숲길 등 인접한 곳에 편의시설을 배치해 주변 시설물과의 조화를 이루게 할 예정이다. 또한 효창운동장은 리모델링되어 운동장 지하에 독립운동박물관이 조성되고 일부 시설을 철거하여 묘역을 가리지 않도록 조정된다.
국무회의에서 2020년 9월부터 국가보존묘지로 지정하기로 의결되었다. 단 효창공원뿐만이 아닌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안장된 국립현충원 외 묘역을 관리묘지로 지정한 것.

3. 연혁



3.1. 원소(園所)에서 숙영지로


효창공원의 역사는 정조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사망하며 시작된다. 당시 정조는 이들의 묘소를 궁궐 가까운 곳에 두고 싶어했다. 도성 주위에 여러 후보지를 보던 중 소나무가 울창하고 한강이 보이는 언덕을 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효창공원이다. 정조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고 판단하여 묘소를 조성하고 이곳에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의 '효창(孝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후 조선왕조 때까지는 소나무숲이 우거진 곳으로 인적이 꽤 드물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묘역도 광활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러한 효창원 분위기를 이용하여 일본군에 의해 '구용산고지'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당시 일본군은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다는 점을 이용해 이 곳을 숙영지로 삼기도 했으며 동시에 비밀 병참기지로도 활용하여 숙적이었던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을 비밀리에 펴기도 하였다. 해방 후 일본군이 사용했던 숙영지 및 병참기지는 일본군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한 후 공식 철거되었다.

3.2. 골프장과 유원지화


1921년 6월에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하려는 일제의 판단하에 경성 최초의 골프장이 개설하여 3년 간 운영되었다. 당시 골프장은 9홀 규모로 영국인이 설계를 맡았다고 한다. 주 고객 층은 원정역(현재의 효창공원앞역) 주변 호텔에 머물던 투숙객이었다고 한다.
1924년 경기도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가 효창원 일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순환도로, 공중변소까지 갖추면서 8월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1930년 대에는 놀이시설이 들어서고 벚나무, 플라타너스 등의 외래 식물들이 심어져 유원지로 조성되었다.

3.3. 독립운동가의 묘소


1944년 효창원이 경기도 고양시(서삼릉)로 이장되면서 이름만이 남았다. 해방 후인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지금의 루쉰공원)에서 당시 일본왕 히로히토의 생일 행사 때 물통 폭탄을 던진 매헌 윤봉길 의사와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폭사(爆死)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쳐 일본군에 의해 사형을 당했던 이봉창 의사,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주중(駐中) 일본 대사를 저격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옥사(獄死)했던 구파 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국내에 공식 운구되어 삼의사묘(三義士墓)에 안장되기도 했다.
실제 삼의사묘에 가보면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는데, 그 묘소에는 1909년 중국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의 정치가이자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불리웠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유골이 안장될 묘소라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되기 전 유언에서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대한의 독립이 되거든 조국으로 나의 유골을 운구해달라" 라고 남겼지만...허나 순국한 지 113년이 지나고 해방이 된 지 7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커녕 유골의 행방도 찾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시신을 못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안 의사가 묻힌 지역이 1930년대에 한번 재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그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현재까지 정설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도 안 의사를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기에 유골 수색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문제는 안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 즉 북한이라서 남북 양측이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다. 2019년 3월, 안중근 의사의 가묘 표지석이 정식 묘비로 교체되었다. 묘비로 교체되었을 뿐 현재도 유해가 안장되지 않은 가묘 상태이다.
만약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게 되어 삼의사묘에 안장될 경우 묘소 명칭이 '사의사 묘(四義士墓)' 로 바뀔 듯 싶다.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신이었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역시 삼의사묘와 마찬가지로 3인의 유해와 이름을 새겨넣은 비석들이 있다. 다만, 삼의사묘와는 달리 별도의 가묘는 없다.
1949년에는 백범 김구서울특별시 경교장에서 암살당함에 따라 국민장을 통해 그의 시신이 운구되어 안장되기도 하였다. 2002년에는 김구의 생애와 항일 업적 등을 기념하는 백범 김구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3.4. 민족공원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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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민족공원 조감도
2005년 참여정부 때 효창공원을 민족공원화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효창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고자 효창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넓은 광장을 조성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공원을 조성하여 관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효창운동장을 철거한다는 소식은 당연히 축구계에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대체 구장을 설치하기 전까지 철거는 절대 안된다고 반대하였다.
결국에는 축구계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효창공원 민족공원화 계획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4. 기타


공원 계단 위쪽으로는 신라의 고승(古僧)이었던 원효의 동상이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특별시 원효로의 '원효' 도 원효의 법명을 본따 지었다.[1]
공원 옆에는 효창운동장이 위치해 있어 '공원 옆 운동장' 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조화로운 분위기를 보이기도 한다. 인근에 숙명여자대학교도 있다. 이봉창 의사의 경우 고향이 효창공원 근처다. 용산구 효창동 118-1번지에 생가 표지석이 있으며 효창공원에서 유일하게 고향에 안장된 독립운동가.[2] 이봉창 의사의 생가는 원래 자리에 복원이 예정돼 있다.
2000년 12월에는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어 효창공원앞역이 신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원까지는 약간 떨어져 있는 것이 단점.[3]
한때 효창공원 내의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이장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13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지정함으로써 관리주체를 지자체가 아닌 국가로 바꾸고자 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그런데 효창공원 내의 묘소가 국립묘지가 되면 공원 이용 시간에 제한을 받게 되고, 묘지라는 명칭 때문에 주변 집값이 떨어지는 등 주민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며 용산구의회에서 이 법안 제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 그러다 한 술 더 떠 국립묘지화 반대를 주장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차라리 묘지를 이장해가라'는 요구까지 나온 것이다.관련뉴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흐지부지 되었다.
다만 효창공원 성역화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이 유원지화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그에 맞는 예우를 하여야 하고, 원래 조선 시대부터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가 있던 곳으로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리던 곳이었으므로[4] 원래의 명칭인 효창원으로 되돌려야 한다며[5] 효창공원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있다.
2011년 6월 3일 스펀지에 따르면 문정역부터 효창공원까지의 지하철 노선을 그리면 고래 모양이 나타난다고 한다.
양서류의 천국 그 자체다. 특히 제일 많은 양서류는 두꺼비로 비가 온 날 밤이면 어디든 바닥에 넘처나는 두꺼비 때를 볼 수가 있다. 그 밖에도 참개구리청개구리 역시 마음만 먹으면 꽤나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5. 바깥고리



6. 사적 제330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순조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옹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을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효창공원 → 서울 효창공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정확히는 일제강점기 시기 이 지역에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되어 모토마치(元町, 원정)로 불리웠는데 해방 이후 일본식 지명 순화 과정을 거치면서 모토마치의 한자의 원(元)자를 살리면서 신라의 고승인 원효의 이름을 따와서 바꾼 것. 이와 관련해서는 일제강점기 이 지역에 있던 용산선의 역인 원정역(용산선) 문서 참조.[2] 생가에서 묘소까지 약 500m 정도 된다.[3] 2016년 4월 30일 경의중앙선 효창공원역도 개통되었고 이 역에서 효창공원으로 가려면 1번 출구로 나가야 그나마 가깝다.[4]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은 1944년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5] 비슷한 예로,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있던 곳은 명성황후 능이 현재의 홍릉(홍유릉)으로 이장한 후에도 홍릉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