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트랑 뒤 게클랭

 



Bertrand du Guesclin (생몰 1320 ~ 1380년)
1. 소개
2. 개요
3. 생애
3.1. 17세 기사의 데뷔 토너먼트
3.2. 백년전쟁기
3.2.1. 렌, 디낭 전투
3.2.2. 코크렐 전투
3.2.3. 말년 - 프랑스군의 원수가 되다
4. 후일담


1. 소개


Bertrand du Guesclin (1320년 ~ 1380년 7월 12일)

2. 개요


백년전쟁 시대 프랑스의 장군. 전쟁 후반기에 잔 다르크가 있었다면 전반기에는 그가 있었다. 게클랭은 몰락 귀족 출신이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전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으며, 잉글랜드군의 포위공격을 막아내고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전장이 프랑스 본토라는 점을 살려 전면적인 교전을 피하고 적을 견제하면서 보급로 등을 공격하여 지치게 하는, 일명 파비우스 전략으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여, 1360년의 브레타니 조약을 엎어 놓은 명장이다.
다시 말해 1340년부터 1360년까지 슬로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로 프랑스가 잃어버린 영토를 1369년부터 1380년까지의 활약으로 대부분 수복하여 전선을 사실상 원점으로(가스코뉴는 전쟁 전부터 잉글랜드 영토였다) 돌려놓은 것이다. 게클랭은 1370년부터 임종 시까지 프랑스의 대원수(constable) 직을 맡았다. 후일 여러 곳에 동상이 세워지고, '브르타뉴의 독수리(L'Aigle de Bretagne)'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는 전략가임과 동시에 일신의 무용으로 수차례의 토너먼트와 적장과의 일기토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용장이었다. 한마디로 중세 프랑스 최고의 기사였다.

3. 생애



3.1. 17세 기사의 데뷔 토너먼트


베르트랑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로베르 뒤 게클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게클랭 가문은 전설적인 바이킹의 왕 '아이킨'의 머나먼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가문은 말만 귀족이라 그의 시대에는 가난하기 짝이 없고 몰락하여 비천한 가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 그가 무용을 드러내며 등장한 때는 마침 백년전쟁이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지만 탁월한 리더쉽을 가진 소년 베르트랑이 17세 되던 해, 렌 지방의 도시 랭스에서 어느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기사 토너먼트가 열렸다. 시골에 있던 아버지 로베르는 명목상 기사 계급으로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랭스로 향했는데 문제는 그가 워낙 가난하다보니 갑주와 군마를 살 돈이 없어[1] 일꾼의 짐 말을 빌리고, 다 떨어져가는 옷과 철 쪼가리를 걸쳐야할 지경이었다.
베르트랑 역시 아버지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향했는데 바이킹 왕의 후예라고 듣고 자란 베르트랑은 큰 충격을 받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사람들이 꾀죄죄한 차림으로 온 아버지를 비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등록장의 관리인도 그가 여기에 참가할 자격이 되는 귀족인지도 의심스럽다 말하여 아버지는 매우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17세의 젊은 기사는 아버지가 당하는 수치에 대해 분노를 참지 못했고, 패배한 기사가 토너먼트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달려가 엎드려 빌었다.

제발 말과 투구를 빌려 주십시오!

기사의 호의로 투구와 말을 빌린 베르트랑은 정체를 감추고 토너먼트에 등록한 후 '''아버지를 비웃었던 기사들을 15명이나 연속으로 박살냈고''' 아버지에게는 일부러 패배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대결에서 경이적인 실력을 가진 노르만 기사가 그의 투구를 쳐 내어 얼굴이 드러났고, 친구들은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베르트랑 17세, 소년 전사의 데뷔전이었다.


3.2. 백년전쟁기



3.2.1. 렌, 디낭 전투


백년전쟁 당시 베르트랑은 전쟁에 참전해 의용군들을 모아 영국군과 맞섰다. 베르트랑은 의용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다. 당시 그의 게릴라 전술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는 모양새를 경멸스럽게 생각했다. 당시엔 대규모 회전을 통한 정정당당한 승부가 일반인부터 기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선호되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 브르타뉴 북동쪽 몽모랑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패하고 영주인 장이 전사했는데 영주 부인은 남은 가신을 이끌고 몽모랑 성에 들어갔다. 베르트랑은 의용병을 이끌고 성에 합류한다. 아직 기사 계급도 아닌 취급을 받은터라 성에서는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냉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트랑은 30명을 이끌고 성 밖 숲속에 매복했다. 베르트랑의 예상대로 잉글랜드의 지휘관 휴 칼블리 경은 기습을 가하기 위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잉글랜드군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숲 속에서 베르트랑이 이끄는 병사들의 화살비가 쏟아지자 잉글랜드군은 혼란에 빠졌다. 베르트랑은 창을 들고 돌격했고 적장 휴 칼블리는 창에 찔려 낙마했다. 전투 소리를 듣고 몽모랑 성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으며 잉글랜드군은 부상당한 지휘관을 챙겨 후퇴했다.
이 전투 후 베르트랑은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다. 가짜 귀족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모두의 비웃음과 수모를 당하던 토너먼트에서 불과 6개월 후의 일이었다. 10대 후반의 소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용맹과 지략을 보여준 셈이었다.
이후 랭스가 공격받자 그는 랭스 공방전에 참전했다. 잉글랜드의 사령관은 그로스몬트 공작 헨리였다. 베르트랑은 적의 주력군을 피하면서, 적이 소규모로 찢어지면 기습해 섬멸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당시로는 생소한 그의 전투에 잉글랜드군은 당황했다. 당대 기준으로는 기사가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동전에 농락당한 잉글랜드군은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 있었다. 베르트랑은 독수리 문양의 옷을 입고 적의 취약점에 순식간에 나타나서 닥치는 대로 검을 내려쳐 목을 베고는 번개 같이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연이은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기사 윌리엄 밤브로우(William Bamborough)가 난전 중에 1:1대결, 일기토를 신청했으며 베르트랑은 바로 응전하여 검을 내려쳐 윌리엄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렸고 그것을 본 잉글랜드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프랑스군은 여세를 모아 총공격을 가해 헨리 공작은 결국 퇴각을 명했다.
이후 프랑스의 정규군 2만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 5천명에게 전멸하고 국왕 장 2세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고 왕자 샤를이 섭정에 올랐다. 디낭 역시 잉글랜드 랭커스터 공작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베르트랑은 병사들을 이끌고 디낭으로 향했는데 디낭 공성전은 매우 치열했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곧 디낭의 보급물자는 한계에 달했다. 하지만 베르트랑이 합류해 디낭의 사령관의 되자, 잉글랜드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양측은 45일간 휴전 하는 것을 협정했으나 프랑스군은 디낭 밖으로 나오면 안된다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휴전 협정 후 베르트랑의 친동생 올리비에가 디낭 밖으로 나갔다가 사로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측은 포로의 몸값으로 거액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는 돈을 주는 대신 잉글랜드 기사와의 결투를 통해 동생을 되찾겠노라 천명했다.
잉글랜드 사령관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랭커스터 공작의 주관 아래 스퀘어에서 정식 무대가 설치되었다. 20명의 기사가 증인으로 참석했으며, 주변의 주민들이 관중으로 몰려들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최고의 기사인 켄터베리의 토마스 경이 나왔다. 베르트랑은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하의의 갑옷을 해체하고 나왔다. 창을 꼬나 쥐고 라인에 선 둘은 몇 번의 격돌 끝에 둘 다 창이 부러졌을 정도로 격렬하게 맞붙었고 창이 부러지자 곧 서로 검을 빼어들고 말을 내달렸다. 베르트랑이 검을 내려쳐 토마스의 검을 튕겨 버리고 하마하여 검을 치워버리자 토마스는 대적할 무기가 없으므로, 의례상으로는 대결을 포기하는 것이 다음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말을 몰아 베르트랑을 깔아뭉갤 셈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하의 갑옷을 벗어두었기에 베르트랑은 기민하게 몸을 굴러 피한 후 번개같이 일어나 말에게 검을 찔러 넣었고 곧이어 달려가 발로 낙마한 토마스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그리고 투구를 벗긴 후 주먹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토마스가 정신을 잃자, 중재자들이 달려들어 베르트랑을 떼어 놓았다. 베르트랑의 완벽한 승리였고 이 지역 주민들과 부하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약속대로 랭커스터 공작은 몸값 없이 올리비에를 풀어주었다.
복귀한 베르트랑은 이후에도 잉글랜드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냈으며 랭커스터 공작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군자금 문제로 잉글랜드 왕은 퇴각을 명하지만, 끝까지 공세를 계속하다 파산지경에 이르고 만다. 이를 간파한 베르트랑은 명목상의 항복을 제의한다. 랭커스터 공작은 그것을 받아들여, 성 안에 자신의 깃발이 걸리는 것을 지켜보고 정신 승리 뒤 퇴각했다. 이 렌, 디낭 전투 후 베르트랑의 명성이 전국에 울려 퍼지게 된다. 푸아티에 전투 후 얻어터지던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공세를 저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3.2.2. 코크렐 전투


1357년부터 그는 황태자(후의 샤를 5세)의 연금을 받았으며, 1359~1363년에는 많은 전투에 참가, 두 번이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포로로 잡힌 왕 장 2세가 사망하면서 태자 샤를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후일 '현명왕'으로 불리는 샤를 5세이다. 그는 베르트랑의 전술을 이해했고 파격적으로 베르트랑을 정규군 사령관 중 하나로 임명한다. 베르트랑의 비천한 가문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개인의 용맹과 소규모 게릴라전만 증명되었지, 대규모 정규전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1364년, 잉글랜드의 군주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왕 샤를 5세의 라이벌인, 나바르의 왕 시악왕(恃惡王) 샤를 2세를 지원해 전쟁을 일으켰다. 나바로의 샤를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는 잉글랜드 군의 지원을 얻어 노르망디에 상륙했는데 당시 나바르, 잉글랜드 연합군 사령관은 가터 기사단의 인원이자 명장 장 드 그레일리였다. 양 측의 군대는 1364년 5월 노르망디의 코크렐 지역에서 대면했다. 나바르, 잉글랜드 연합군은 언덕에 진을 치고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베르트랑은 소규모 기사를 돌진시킨 후 본대를 언덕을 향해 진격시켰다. 전투가 일어나자, 프랑스군의 진영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패주하기 시작했고 잉글랜드군이 총 추격에 나섰다.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을 깊숙이 따라오자 베르트랑은 손을 흔들어, 매복해 있던 좌측 후미의 소대가 앞으로 달려나가게 했다. 우측 후미의 소대는 꼬리가 되어 잉글랜드군의 뒤로 우회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잉글랜드군으로부터 후퇴하던 프랑스군이 양 갈래로 갈라졌다. 베르트랑의 본대가 돌연 벌어진 중간을 신속하게 가르며 들어갔는데 베르트랑이 손수 검을 휘두르며 지휘하는 그 군세는 질서정연하고, 위풍당당했다. 또 베르트랑이 깃발을 흔들자, 앞서 우회한 소대가 잉글랜드의 퇴로를 차단했다. 좌측의 소대가 연합군의 측면을 들이닥치고 베르트랑의 본대가 정면을 향해 돌격했다. 양 갈래로 갈라져 후퇴했던 프랑스군이 재정비 후 잉글랜드군의 우측을 포위하자 잉글랜드 측의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프랑스의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3.2.3. 말년 - 프랑스군의 원수가 되다


1364년 9월, 브르타뉴 계승전에서 그가 지지하던 블루아 공작 샤를이 전사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1369년 샤를 5세의 명으로 에스파냐의 카스티야 왕국을 돕기 위해 갔다가 1370년에 잉글랜드와의 싸움을 위해 귀국, 샤를 5세는 이 후 베르트랑에게 직접 명검을 하사하면서 프랑스 최고의 원수, 총사령관(Connétable de France)으로 임명, 1373년까지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대 반격에 나서, 흑태자와 잉글랜드에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잉글랜드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브레타니 화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대다수 회복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 후 영국군과 용병 등의 잔병 소탕전 때 한 요새를 공격하다가 1380년 7월 13일에 전사하였다.

4. 후일담


베르트랑은 자신의 명검을 프랑스의 국운을 지킬 자에게 전달할 것을 부탁한다. 현명왕 샤를의 뒤는 샤를 6세가 이어, 실정을 거듭하고 몇 십 년 뒤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다시 침공해 파리까지 함락당하게 된다. 베르트랑의 검은 콘테타블에게 이어지고, 그 미망인인 잔 드 라발에게 물려진다. 그리고 잔 드 라발은 자신의 외손자에게 베르트랑의 검을 물려준다.
그가 바로 잔 다르크와 함께 오를레앙 전투, 파타이 전투에서 활약한 원수 '앙드레 드 로에아크'이다.
[1] 사실 당시 기병의 갑주와 군마는 고가의 비용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