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구테이

 


'''Belgutei/Бэлгүдэй'''
(1156?~1255)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예수게이의 차남이자 칭기즈 칸의 배다른 형.[1]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온화하고 인정이 많은 성격에 민첩하며 지략이 많았고, 검소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체격이 크고 힘이 매우 강했다고 전한다.
이름의 표기는 대체로 영어로는 "벨구테이(Belgutei)"라 하며, 몽골어로는 "벨구테이(Бэлгүдэй)"라 한다. 《원사》 등의 중국 문헌에서는 별리고태(別里古台)로 표기된다.
벨구테이는 보르지긴 씨족의 족장이었던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게이는 첫번째 부인인 소치겔로부터 아들인 벡테르와 벨구테이 등의 두 아들을 얻었고, 두번째 부인인 호엘룬으로부터는 테무진을 포함한 네 아들을 얻었다. 첫번째 부인이었는데도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호엘룬 소생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밀려나 서자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옹기라트의 지체높은 집안 출신이었던 호엘룬과는 달리, 소치겔은 계급이 낮은 평범한 여인이었던 것 같다.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 인들에게 독살당하는 바람에 보르지긴 씨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설상가상으로 타이치우트 씨족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자 예수게이의 유족들은 초원을 떠나 험한 산림에 들어가 가난하고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가운데에 예수게이의 아들들 중에서 최연장자로서 가장 덩치도 크고 힘도 강했던 벡테르가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이복동생인 적자 테무진과 카사르와 사냥감을 다투며 가장 노릇을 하려 하자 이에 발끈한 테무진이 벡테르를 로 쏘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벡테르는 자신을 활로 겨누고 있는 테무진을 보고는 죽음을 직감했는지 도망가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핏줄이 이어지도록 동생인 밸구테이만큼은 살려달라고 말하고는 곧 살해당했다. 이 일로 호엘룬이 테무진을 크게 꾸짖자, 벨구테이는 아마도 집안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테무진의 살인행각을 변호해주었다. 비록 벨구테이는 테무진에게 형을 잃었으나 이후로는 테무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심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장성한 테무진은 그럭저럭 세력을 회복하는 듯 싶었으나, 메르키트 씨족이 테무진을 습격하여 그 아내인 보르테를 빼앗아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에 벨구테이의 어머니인 소치겔도 함께 같이 끌려갔다.
1182년 경, 테무진은 안다(의형제)이자 절친이었던 쟈다란의 자무카, 그리고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의형제)였던 케레이트토오릴 칸[2] 등의 지원을 받아 메르키트를 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되찾았다. 이때 벨구테이는 포로들을 심문하여 자신의 어머니인 소치겔이 있는 곳을 알아냈으나, 소치겔은 메르키트 족들로부터 매우 비참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늙고 가난한 남자의 첩이 되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고. 자신을 찾으러 온 아들을 본 소치겔은 아들이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부끄럽다며 숲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고 하고, 이후 행적은 기록이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행방불명 또는 자살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생모의 비참한 말로에 분노한 벨구테이는 메르키트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고 한다. 납치 가담자들을 '친척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도륙'했고, 그들의 여자들 중 '품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은 모두 제 여자로 삼았다', 나머지는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여러 기록에서 침착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벨구테이가 이토록 분노한 경우는 이때밖에 없었다.
테무진이 13익의 전투에서 자무카에게 패배한 후, 오로오드 족과 망고드 족 등이 자무카의 잔인한 성격에 학을 떼고 테무진에게 귀부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테무진이 속한 보르지긴 씨족의 친척이었던 주르킨 씨족이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일어났다.[3] 벨구테이는 이를 막으려다가 주르킨 씨족의 장사였던 씨름꾼 부리가 휘두른 칼에 맞아 팔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로 인해 보르지긴과 주르킨 사이에 한바탕 패싸움이 일어났다. 테무진은 벨구테이가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노발대발하여 주르킨 씨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 하였으나, 벨구테이는 '''"나 하나 때문에 형제들간에 불화가 생겨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며 테무진을 말렸다. 이에 테무진은 마음을 다잡고 연맹의 결속을 유지하였다. 이 일화는 당시 몽골인들에게 인상깊게 기억되었는지 《원사》에서도 따로 기록되었다.
1196년, 테무진이 금나라와 연합하여 타타르를 정벌한 일을 계기로 다시 초원의 강자로 떠오른 후에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항하던 주르킨 씨족을 토벌하여 그 족장인 사차 베키를 죽였다. 이때 테무진은 벨구테이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혔던 씨름꾼 부리를 사로잡은 후, 그를 벨구테이의 손으로 죽이도록 해주었다. 또한 1205년 나이만 정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칭기즈 칸의 통일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206년 경, 쿠릴타이를 통해 몽골 제국을 선포하고 대칸의 지위에 오른 칭기즈 칸(테무진)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분봉을 하였을 당시에 벨구테이는 비록 서열은 낮은 편이었으나, 칭기즈 칸의 어머니 호엘룬과 친자, 그리고 칭기즈 칸의 동복 아우 중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카사르 등의 뒤를 이어 분봉을 받았다.
이후 벨구테이는 매우 장수하여, 1251년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몽케 칸의 즉위식에 참여하기까지 하였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따르면 벨구테이는 1255년에 사망하였는데, 사망할 당시에 나이가 110세에 달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벨구테이는 칭기즈 칸보다도 나이가 20살 정도는 더 많아지는 데다가 아버지 예수게이랑 나이 차가 고작 12살밖에 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되는데 부자 관계라고 보기에는 나이 차가 말이 안되는데다 1살 연상의 형인 벡테르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매우 장수했으며,[4] 최소 90세에서 최대 100세 정도까지 살았다는 점이다. 일설에는 벡테르가 칭기즈 칸보다 2살 연상이라고 하는데[5] 이에 따른다면 벨구테이는 칭기즈 칸보다 1살 연상이라고 볼 수 있다.
벨구테이는 비록 칭기즈 칸의 친동생은 아니라는 한계점이 있었으나 불온한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아 큰 신뢰를 받았다. 칭기즈 칸의 동복 동생 중 가장 공로가 컸던 카사르조차도 역모에 연루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별리고태(벨구테이)의 힘과 합살아(카사르)의 궁술 덕분에 내가 천하를 취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벨구테이를 신뢰하였다.
이렇게 수많은 전공을 세운 벨구테이였지만 그도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타타르 정벌 때 칭기즈 칸이 타타르를 몰래 학살하기 위한 계책을 세웠는데, 이를 타타르의 족장에게 벨구테이가 누설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타타르 학살 과정에서 최후의 발악이 벌어져 수많은 몽골족이 죽자 칭기즈 칸은 벨구테이를 한동안 쿠릴타이에 참석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1] 다만 장남 벡테르와 함께 서자 취급을 받았기에 삼남인 테무진을 형으로 대우해야 했다.[2] 흔히 토그릴 칸, 옹 칸이라고도 한다.[3] 집안 어른들에게 술을 올릴 때에 보르지긴 씨족보다 명목상 항렬이 높은 주르킨 씨족의 어른들에게 먼저 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4] 벡테르는 1176년, 카치운은 1207년, 카사르는 1219년, 칭기즈 칸은 1227년, 테무게는 1246년에 죽었다. 칭기즈 칸의 형제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오래 산 셈.[5]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도 이 설을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