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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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將說.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1461년 직접 저술한 병학서.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병장설은 크게 1461년 세조가 직접 저술한 어제병장설(御製兵將說)과, 1466년 유장편과 병법대지의 내용을 첨가하여 간행한 병장설(兵將說)로 나뉘어진다.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홈페이지 : 1461年(世祖7) 9월에 世祖가 친히 撰한 ≪兵將說≫에 申叔舟, 崔恒, 李承召, 徐居正 등이 주해와 부록을 덧붙여 1462年(世祖8)에 간행한 우리나라 最古의 兵書
세조는 일찍부터 군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한지 얼마 안된 세조 2년, 1457년에 5사(司)를 5위(衛)로 개편하면서 조선 중기 중앙 군사 조직의 골간을 완성한다. 그해 8월 세조는 전곶에서 열병이 끝난 다음 호궤연(念饋宴,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잔치)을 베풀었고, 1459년에는 교외에서 대열을 시행하였으며, 1464년에는 경회루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삼갑전법(三甲戰法)을 간행해 제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가 창안한 삼갑전법은 27인을 3대(隊)로 나누어 갑, 을, 병으로 하고 1대에는 각각 3통(統)이 있고, 1통에는 각각 장수 1인, 졸병 2인이 있다. 3대는 각각 한 모서리에 주둔하면서 작은 방패와 창을 소지하고 창 끝에 붉은 물감을 발라 싸울 때에 상대방의 등을 찔렀다. 싸움이 끝나면 상대방에게 찍힌 붉은 점을 계산해 승패를 결정했다. 실전을 방불케하는 모의 전투를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전법이었고 현대의 서바이벌 게임과 비슷하게 진법의 운용과 전투 방식을 평가하는 선구적인 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무신의 병서 학습을 중시하여 사정전(思政殿)의 병조 관원이나 선전관(宣傳官) 등 무신을 소집하여 훈련 상황을 직접 참관하고 병서 연마를 강조하기도 하였다.[1]
이후 세조는 1461년 직접 병법서인 병경(兵鏡)를 저술한 후 신숙주, 최항, 서거정에게 주를 달게 하여 1462년 2월에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어제병장설이다.
1461년 9월 세조가 병설과 장설로 이루어진 병경(兵鏡)을 저술한 후 사정전(思政殿)에서 대신들에게 내보였고 이에 신숙주가 읽어본 후 "병가(兵家)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긴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으나, 문장이 함축적이어서 독자들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에 세조가 자문을 구하였고 신숙주가 응답하여 책에 주해를 붙이게 되었다. 이때 신숙주의 지적에 따라 책의 제목도 병경에서 병장설로 고쳤다.
크게 전문, 서문, 본문, 부록으로 나뉘어지며 을해자로 인쇄되었다. 책의 첫 부분에는 1462년 2월에 신숙주가 작성한 어제병장설주해전(御製兵將說註解箋)과 서문이 실려있으며, 세조가 직접 저술한 원문은 큰 글씨로 하고, 신하들이 붙인 주해는 한 호수 작은 글자로 간행했다. 주해는 세조가 쓴 전문용어와 지식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문단마다 음을 달거나 뜻을 풀이하고 해설을 실었다.
병설은 군을 운용하는 원칙을 '이지운용 이용웅지'의 여덟 자로 집약하고 이를 연역적으로 풀이했다. 장설은 장수들이 스스로 장수로서의 자질을 닦도록 경계하면서 이를 위한 장수의 인품을 3등급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끝에는 별도로 병설(病說) 항목을 두어 군사상 병통이 될만한 것을 경계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 내용은 타위병처(打圍病處) 7항목, 행군병처(行軍病處) 3항목, 선전관병처(宣傳官病處) 5항목, 사옹다주방병처(司饔茶酒房病處) 6항목, 잡류장병처(雜類將病處) 3항목, 대장사병처(大將師病處) 4항목 등이다.
병법에 관한 원칙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직접 지은 병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병서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책인데 세조 1년, 1445년에 명필 강희안의 글씨를 토대로 만든 아름다운 을해자로 만든 초기의 책이다. 을해자는 임진왜란 전까지 갑인자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사용한 고활자로 조선 시대 활자 중에서도 가장 백미로 꼽힌다. 또한 신숙주, 최항, 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사들이 빚어낸 전쟁 사례집이자 고사로 꼽힌다.
세조는 어제병장설을 간행한 후에 신하들의 강독 자료로 곧잘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세조는 자신이 지었던 어제병장설의 내용이 다소 장황하다 느끼고 불만스러워 했다. 이에 1464년에 강희맹, 최항 등에게 재교정을 요청하고 자신은 직접 유장(諭將) 3편과 병법대지(兵法大旨) 한편을 1465년 5월에 집필한다. 1466년 9월에 재교정된 어제병장설과 유장 3편, 병법대지를 하나로 묶어 병장설로 간행한다.
이후 조선 초기 병서를 세등급으로 나눌 때 1등급 병서 중 하나로 꼽혔다. 병요, 무경칠서, 병장설이 1등급 병서, 오위진법, 병정이 2등급 병서, 강무사목을 3등급으로 정했다.
병장설은 우리나라의 역대 병법서 중 당대의 원본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병서이며, 당시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던 국왕이 직접 어필로 간행한 책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다고 할 수 있다.
1. 개요
兵將說.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1461년 직접 저술한 병학서.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병장설은 크게 1461년 세조가 직접 저술한 어제병장설(御製兵將說)과, 1466년 유장편과 병법대지의 내용을 첨가하여 간행한 병장설(兵將說)로 나뉘어진다.
2.1. 어제병장설(御製兵將說)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홈페이지 : 1461年(世祖7) 9월에 世祖가 친히 撰한 ≪兵將說≫에 申叔舟, 崔恒, 李承召, 徐居正 등이 주해와 부록을 덧붙여 1462年(世祖8)에 간행한 우리나라 最古의 兵書
세조는 일찍부터 군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한지 얼마 안된 세조 2년, 1457년에 5사(司)를 5위(衛)로 개편하면서 조선 중기 중앙 군사 조직의 골간을 완성한다. 그해 8월 세조는 전곶에서 열병이 끝난 다음 호궤연(念饋宴,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잔치)을 베풀었고, 1459년에는 교외에서 대열을 시행하였으며, 1464년에는 경회루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삼갑전법(三甲戰法)을 간행해 제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가 창안한 삼갑전법은 27인을 3대(隊)로 나누어 갑, 을, 병으로 하고 1대에는 각각 3통(統)이 있고, 1통에는 각각 장수 1인, 졸병 2인이 있다. 3대는 각각 한 모서리에 주둔하면서 작은 방패와 창을 소지하고 창 끝에 붉은 물감을 발라 싸울 때에 상대방의 등을 찔렀다. 싸움이 끝나면 상대방에게 찍힌 붉은 점을 계산해 승패를 결정했다. 실전을 방불케하는 모의 전투를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전법이었고 현대의 서바이벌 게임과 비슷하게 진법의 운용과 전투 방식을 평가하는 선구적인 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무신의 병서 학습을 중시하여 사정전(思政殿)의 병조 관원이나 선전관(宣傳官) 등 무신을 소집하여 훈련 상황을 직접 참관하고 병서 연마를 강조하기도 하였다.[1]
이후 세조는 1461년 직접 병법서인 병경(兵鏡)를 저술한 후 신숙주, 최항, 서거정에게 주를 달게 하여 1462년 2월에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어제병장설이다.
1461년 9월 세조가 병설과 장설로 이루어진 병경(兵鏡)을 저술한 후 사정전(思政殿)에서 대신들에게 내보였고 이에 신숙주가 읽어본 후 "병가(兵家)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긴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으나, 문장이 함축적이어서 독자들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에 세조가 자문을 구하였고 신숙주가 응답하여 책에 주해를 붙이게 되었다. 이때 신숙주의 지적에 따라 책의 제목도 병경에서 병장설로 고쳤다.
크게 전문, 서문, 본문, 부록으로 나뉘어지며 을해자로 인쇄되었다. 책의 첫 부분에는 1462년 2월에 신숙주가 작성한 어제병장설주해전(御製兵將說註解箋)과 서문이 실려있으며, 세조가 직접 저술한 원문은 큰 글씨로 하고, 신하들이 붙인 주해는 한 호수 작은 글자로 간행했다. 주해는 세조가 쓴 전문용어와 지식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문단마다 음을 달거나 뜻을 풀이하고 해설을 실었다.
병설은 군을 운용하는 원칙을 '이지운용 이용웅지'의 여덟 자로 집약하고 이를 연역적으로 풀이했다. 장설은 장수들이 스스로 장수로서의 자질을 닦도록 경계하면서 이를 위한 장수의 인품을 3등급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끝에는 별도로 병설(病說) 항목을 두어 군사상 병통이 될만한 것을 경계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 내용은 타위병처(打圍病處) 7항목, 행군병처(行軍病處) 3항목, 선전관병처(宣傳官病處) 5항목, 사옹다주방병처(司饔茶酒房病處) 6항목, 잡류장병처(雜類將病處) 3항목, 대장사병처(大將師病處) 4항목 등이다.
병법에 관한 원칙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직접 지은 병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병서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책인데 세조 1년, 1445년에 명필 강희안의 글씨를 토대로 만든 아름다운 을해자로 만든 초기의 책이다. 을해자는 임진왜란 전까지 갑인자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사용한 고활자로 조선 시대 활자 중에서도 가장 백미로 꼽힌다. 또한 신숙주, 최항, 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사들이 빚어낸 전쟁 사례집이자 고사로 꼽힌다.
2.2. 병장설
세조는 어제병장설을 간행한 후에 신하들의 강독 자료로 곧잘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세조는 자신이 지었던 어제병장설의 내용이 다소 장황하다 느끼고 불만스러워 했다. 이에 1464년에 강희맹, 최항 등에게 재교정을 요청하고 자신은 직접 유장(諭將) 3편과 병법대지(兵法大旨) 한편을 1465년 5월에 집필한다. 1466년 9월에 재교정된 어제병장설과 유장 3편, 병법대지를 하나로 묶어 병장설로 간행한다.
이후 조선 초기 병서를 세등급으로 나눌 때 1등급 병서 중 하나로 꼽혔다. 병요, 무경칠서, 병장설이 1등급 병서, 오위진법, 병정이 2등급 병서, 강무사목을 3등급으로 정했다.
병장설은 우리나라의 역대 병법서 중 당대의 원본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병서이며, 당시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던 국왕이 직접 어필로 간행한 책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다고 할 수 있다.
3. 바깥고리
[1] 세조실록 세조 11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