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회루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224호'''
'''경복궁 경회루'''
景福宮 慶會樓 | Gyeonghoeru Pavilion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1)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궁궐
'''시설'''
1동
'''지정연도'''
1985년 1월 8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395년(창건) / 1867년(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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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복원된 현 경회루의 사진.
1. 개요
2. 역사
3. 건축
3.1. 전통 건축 중 최대의 크기
4. 기타


1. 개요


景福宮 慶會樓
경복궁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누각. 근정전 서편에 있다. 만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으로 나온 건물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해외 어느 일간지에서는 이 경회루가 물에 가라앉은 그림을 기사로 내면서 한국 경제 침몰이라는 글귀를 달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 부피가 큰 전통 건물이기도 하다.
경회루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하루 전날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해서 지정된 시간에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일주일 전부터 예약이 마감되므로 빨리 예약하는 게 좋다.

2. 역사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도록 명했다. 건설은 당시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에게 맡겨졌고, 무려 8개월 만에 경회루를 완공한다. 이 당시의 경회루는 현재의 경회루보다는 크기가 더 작았으나 지금의 경회루보다 더 호화로웠다. 3층 높이의 중층 지붕을 가진 전각이었다. 1474년(성종 5년) 3월과 8월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는데, 이 때 경회루를 헐고 다시 지으면서 돌기둥에 아름답게 꽃과 용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1] 1521년(중종 16) 경회루를 수리하고 청기와를 덮으려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2][3][4]
[image]
조선 전기 회화 '기성입직사주도'에 묘사된 경복궁과 경회루.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후 약 300년 뒤인 고종 4년(1867년) 때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세워졌다. 이 때 경회루의 크기 자체는 더 커졌지만, 단층 지붕으로 바꿔 높이가 낮아지고, 누각을 지탱하는 용조각이 새겼졌던 돌기둥들이 무늬 없는 것들로 바뀌어 세워지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3.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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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단면도
경회루의 구조는 전형적인 대량식 구조지만, 1층의 기둥이 전부 돌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2층은 외부와 통해 있는 외진과 내부 공간인 내진, 그리고 가장 중심에 있는 중궁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 공간 사이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문을 전부 들어올려 한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외진과 내진 그리고 중궁은 바닥의 높이가 달라 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자리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어 가장 안쪽으로 갈수록 지위가 높은 사람의 공간임을 나타낸다. 외진과 내진에는 궁궐 건축답게 천장을 개판(蓋板)으로 막고 있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네모나고 안쪽 돌기둥은 둥근데 이는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라는 천원지방(天圜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체 기둥은 총 48개로 바깥기둥이 24개 안쪽 기둥이 24개인데 이는 24개절과 24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회루 주위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과 두 개의 둥근 모양의 섬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천원지방을 형상화 한 것이다.[5]
각 지붕끝에는 잡상이 11개 올려져 있다. 이는 옆에 위치한 법전인 근정전에 올려져 있는 잡상 7개보다 많은 개수다. (근정전의 잡상은 과거 일제시대 촬영된 사진에는 11개가 올려져 있으나 현재는 7개가 올려져 있다. 확인 ])

3.1. 전통 건축 중 최대의 크기


근정전의 크기는 정면 30 m에 측면 21 m, 높이 22.5 m(기단 제외)지만,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34.4 m, 측면 28.5 m, 높이 21.5 m로 '''현존하는 한국의 단일 목조 건축 중 부피가 가장 크다.''' (다만 가장 면적이 넒은 건물은 종묘 정전이다.) 칸 수 역시 근정전이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총 25칸인 데 반해 경회루는 정면7칸에 측면 5칸 35칸이다. 다만 한 칸의 길이는 건물에 따라 다 다른 만큼 칸 수만 가지고는 건물의 크기를 확실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경회루 근처의 수정전은 정면 10칸에 측면 4칸으로, 무려 40칸이나 되지만 실제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다.
경회루는 이 정도 크기가 조선 말의 목재 여건상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건물이었다는 추측을 하게 해주는 건물인데, 소모되는 부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른 건물과 차별화된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팔작 지붕의 삼각형 수직 벽면인 박공의 비율상 크기가 굉장히 크다. 근정전과 비교해봐도 두 건물의 크기 차이 이상으로 박공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박공의 크기를 늘려 그만큼 박공 아래에 있는 처마 지붕의 길이를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비가 들이치는 박공은 작을수록 좋은데, 통상의 비율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만들었음은 그만큼 처마에 쓸 긴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삼림자원이 고갈된 조선 말에서는 충분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4. 기타


  • 해질녘 측면 사진.
  •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못에 청동용 2마리를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7년 연못 공사를 위해 연못의 물을 뺐을 때 1마리가 발견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으며, 나머지 1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 연산군 시절에 창경궁에 옛 경회루를 본 따 큰 누각인 서총대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총대는 중종 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연못을 팠는데, 그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춘당지인 듯하다.
  • 안의 연못이 고여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안에 여러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오고, 빠져나가는 곳이 있어서 물이 썩지 않았고, 배수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서 호우에도 물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 돈이나 물건 따위를 함부로 마구 써 버린다는 단어 '흥청망청 이 경회루와 연관 있다. 조선 시대 연산군이 '흥청'이라는 기생들을 모아놓고 경회루에서 술잔치를 벌이던 것이 그 유래이다.
  • 이승만 대통령이 하향정이란 사설 정자를 만들었는데 철거 논란이 있다.
  • 길창덕의 만화 선달이 여행기에 주인공 선달이가 보고는 "임금님 수영장"(...)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후에 동행으로 같이 여행하던 대학생 뚝갑이가 정정해 주긴 하지만.
  • 공포 게임 몬스트럼에서 액자 사진으로 나온다. 제작진 중 한국인이 있기 때문에 들어간 이스터에그인 듯하다.
  • 채만식의 소설 미스터 방의 등장인물인 방삼복이 짧은 영어 실력이 계기가 되어 해방정국의 공간에서 미군 장교 S소위를 서울 저잣거리 이곳저곳을 안내해주며 구경시켜줄 때 방문한 장소 중 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장교에게 이 장소를 소개하기를, “킹 듀링크 와인 앤드 댄스 앤드 싱, 위드 댄서.”...... 그러니까 임금이 기생 끼고 춤추고 노래부르며 술먹고 놀았던 곳이라고.
[1] 《성종실록》 성종 5년 12월 17일 무술 4번째기사: 정괄이 차자를 올려 경회루 돌기둥에 새긴 무늬가 지나치게 화려함을 지적하다.[2] 《중종실록》 중종 15년 12월 18일 임인 2번째기사: 전교하였다. 경회루(慶會樓)는 바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 누(樓)를 본 중국 사람들은 모두 장려(壯麗, 웅장하고 화려함)하게 여겼다. 그런데 전부터 청와(靑瓦)로 이지 않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근정전(勤政殿)은 모두 청와로 이었는데 만약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렇게 했다면, 함원전(含元殿)·서현전(瑞賢殿)도 모두 청와로 이어야 한다. 어제 해조(該曹, 육조 중에서 해당하는 조)가 경회루를 수리하려 하였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데, 이제 청와로 고쳐 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는 사치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나라 사신의 관람을 위해서인 것이다...(중략)[3] 《중종실록》 중종 15년 12월 18일 임인 4번째기사: 삼공이 아뢰었다. "경회루는 건립한 지가 이미 오랬습니다. 그 뒤 다시 중수할 적에도 청와(靑瓦)로 이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청와를 굽는 공역이 매우 클 뿐더러 누각도 정전(正殿)에 견줄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금년처럼 흉년든 해에 또 청와 굽는 역사를 시행한다면 그 폐단이 작지 않은데다가 이제 명나라 사신이 올 때를 당하였으니 더욱 거행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명나라 사신이 이를 본다면 더욱 우리 나라의 검소한 덕을 알게 될 이점도 있습니다. 이 누(樓)는 사면이 모두 공간이므로 철망을 친다해도 잡새들이 깃드는 것을 막기가 어렵고, 또 그 공역도 작은 일이 아니니 해서는 안 됩니다."[4] 《중종실록》 중종 16년 1월 11일 갑자 1번째기사: (중략)...또 소에 말한 바 경회루(慶會樓)를 푸른 기와로 이려 했다는 일은, 감히 사치(奢侈)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누(樓)는 사명(使命, 중국 사신) 을 봉영(奉迎, 맞이함)하는 곳인데 유독 푸른 기와로 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게 물은 결과 공역(公役)이 매우 커서 하기 어렵다고 하기에 정지시켰다...(중략)[5] 거기다가 연못주변에 담장을 둘러서 일반인들이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나 일제강점기때 훼손되었고 북쪽과동쪽 담장을 복원했으나 서쪽과남쪽 담장은 관람객들의 관람문제로 복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