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사정전
[clearfix]
1. 소개
景福宮 思政殿
경복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2. 이름
조선 초 재상이었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하였으며, 정도전은 이 말의 뜻에 대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늘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고 설명하였다.
정전인 근정전의 북쪽, 왕의 침전인 강녕전의 남쪽에 있다.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판서였던 조석우(曺錫雨)가 썼다.
3. 역사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지붕을 용 문양이 새겨진 청자 기와들로 뒤덮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1][2] 1429년(세종 11년)에 고쳐 지었고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를 입은 후 재건하였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다가 1867년(고종 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 내 전각들을 철거할 때도 무사히 남았으나 일제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때 박애관으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사정전을 2012년 3월 2일에 보물 제1759호로 지정하였다.
4. 정문
5. 특징
- 조선의 5대 궁궐 중 정전 바로 정북방에 위치한 유일한 편전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편전인 선정전과 문정전은 정전의 측면에 있다. 경희궁의 편전 자정전도 정전 정북쪽에 있긴 하나 자정전의 정문인 자정문이 서쪽으로 틀어져있어 꺾어 들어가야한다. 그리고 사정전의 정북방으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 있는데 이를 보아 경복궁 내 전각들이 정궁으로서 질서있는 배치원칙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 장대석 3벌대로 만든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전각[3] 이다. 조선 궁궐의 편전 중 규모가 가장 크다.[4] 기단 부분에서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 그러니까 중앙 칸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양 옆 신하들이 드나드는 칸에 소맷돌이 없는 계단이 있다. 건물 좌, 우면에 계단은 없고 북측의 계단은 어칸에만 놓여있다. 초석은 원형초석이며 이에 따라 기둥 역시 둥글게 되어 있다. 어칸을 협칸보다 2배 가까운 길이로 넓게 잡았고, 측면에서도 어칸을 훨씬 크게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모두 회칠로 처리한 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그리고 잡상을 배열했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5] 과 평방[6] 을 짜돌리고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7] 를 놓았다. 공포는 가장 장중하고 복잡한 다포 양식으로 하여 편전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였다.
-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8] 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였다.
- 위 이미지를 보면 옥좌 위에 굉장히 화려한 그림이 있다. 구름과 용이 얽혀있는 그림으로 이름은 《운룡도(雲龍圖)》이다. 구름은 신하를, 용은 왕을 상징하며, 그림처럼 왕과 신하가 서로 어우러져 좋은 정치를 하길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담으로 원래는 벽화였는데 훼손이 심해지자 2000년 대 초에 따로 떼어서 별도로 보관한다. 기존에 운룡도가 있던 자리에는 실제 크기만 한 천에다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복사해서(...) 걸어놓았다.
- 바닥은 마루이다. 그래서 주로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사용하였고, 가을에서 봄까지는 양 옆에 있는 보조 편전인 천추전과 만춘전을 주로 이용하였다.
6. 여담
- 1435년(세종 17년)에 세종이 지으라고 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다른 이름이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이다. 당시 세종이 이 곳에 주로 머물며 짓게 했기 때문이다.
- 사정전 남쪽의 우측 계단 옆을 보면 돌기둥으로 감싼 해시계 앙부일구가 있다. 원래 다리 부분도 돌기둥 속에 들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드러났다. 물론 현재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7. 부속 건물
7.1. 천추전
景福宮 千秋殿
사정전 서쪽에 있는 보조 편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기준 좌, 우로 2칸 씩 온돌방이 있고 가운데엔 대청 2칸이 있다. 온돌이 있어서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하였다.
1395년(태조 4년)에 창건되었다. 1452년(문종 2년) 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867년(고종 4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물산공진회 심사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7.2. 만춘전
景福宮 萬春殿
사정전 동쪽에 있는 보조 편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이며 정면 기준 좌, 우로 2칸 씩 온돌방이 있고 가운데엔 대청 2칸이 있다. 온돌이 있어서 주로 겨울과 봄에 사용하였다.
1395년(태조 4년)에 처음 지었다. 1437년 (세종 19)에는 아침 저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만춘전의 동쪽 뜰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867년(고종 4년)에 중건하였으나 1950년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주춧돌만 남은 채 약 40여 년을 방치 상태로 있다가 198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때 경비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8. 기타 (매체 등에서의 활용)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편전으로 많이 나왔다. 물론 외견만 나오고 실내는 방송사 스튜디오에서 따로 촬영하였다.
2004년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부안영상테마파크에 조선 왕궁 세트장이 생기면서 사정전 세트도 같이 지었는데, 이상하게 강녕전과 비슷한 외형의 건물에 사정전 현판을 붙여놓았다.(...)
2008년 경상북도 문경에 《대왕세종》 세트장이 생기면서 사정전 세트 역시 지었는데, 부안과는 달리 실제 사정전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2015년 징비록 촬영을 전후하여 가운데 칸과 정문 사이에 복도각을 설치하여 현재는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실내에 옥좌를 마련하고 용상체험을 할 수 있게 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2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중략)...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중략) [2] 즉 사극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고종 시기를 제외한 세종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은 청기와 건물로 표현해야 옳은 재현이라는 것이다. 세종 이후라 하는 이유는 1443년(세종 15)에 근정전 취두(鷲頭, 치미나 용두와 같은 망새로서 용마루 양쪽 끝에 세워 놓은 대형 장식 기와)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는데, 비싼 청기와와 아련와(牙鍊瓦,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만든 기와)중에 무엇으로 덮을지 고민하면서 청기와를 정밀하고 좋게 구워 만드는 기술을 시험해 보라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유력하다. 기존에 청기와가 덮여 있었을 시 아련와를 고민한다는 것은, 더 값싼 아련와를 정전에 덮는 꼴이 되고, 편전은 이미 청기와가 있으니 격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 후술하겠지만 사정전은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청기와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선조 대의 사정전은 어떠했는지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3]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4]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편전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5]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6]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7]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건축 부재.[8]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9] 창문 위쪽에 가로로 길게 짜서 붙박이로 설치하는 채광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