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국검

 




1. 검술 본국검(本國劍)
1.1. 본국검 신라 기원설
1.2. 본국검의 복원 수련
1.3. 각 단체의 본국검 복원자료
1.4.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기술
1.4.1. 순서
1.4.2. 기본 자세(格法)[1]
1.4.2.1.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1.4.2.2.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1.4.2.3.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1.4.2.4. 조천세(朝天勢)
1.4.2.5. 전기세(展旗勢)
1.4.2.6.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
1.4.3. 격자지법(擊刺之法) 21수[2]
1.4.3.1. 진전살적세(進前殺賊勢) (3수)
1.4.3.2. 향전살적세(向前殺賊勢) 2수
1.4.3.3. 후일격세(後一擊勢) 3수
1.4.3.4. 후일자세(後一刺勢) 2수
1.4.3.5. 일자세(一刺勢) 1수
1.4.3.6. 안자세(雁字勢) 1수
1.4.3.7.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 1수
1.4.3.8. 발초심사세(發艸尋蛇勢) 1수
1.4.3.9.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1수
1.4.3.10. 좌우요격세(左右腰擊勢) 2수(각1수)
1.4.3.11. 좌협수두세(左挾獸頭勢)
1.4.3.12. 장교분수세(長蛟噴水勢) 1수)
1.4.3.13. 우찬격세(右鑽擊勢) 1수)
1.4.3.14.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 1수
1.4.3.15. 시우상전세(牛相戰勢) 1수
1.4.4. 방어법
1.4.4.1. 내략(內掠)
1.4.4.2. 외략(外掠)
2. 소설 '본국검법'


1. 검술 본국검(本國劍)


승정원일기 현종 14년 3월 11일 신사 1673년자 기사에서부터 시험을 본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검술이다. 이후 주로 어영청에서 수련되었고, 계속해서 기록에 등장하다가 사도세자가 만든 무예신보에 12기가 추가되면서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현존하는 사료에는 무예도보통지 3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순조 20년(1820, 경진) 10월 2일자 어영청중순등록(御營廳中旬謄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시험을 본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민족전통검술을 복원하고자 하는 연구가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쌍수도는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에서 수입한 것이 너무나도 확실하고, 제독검이여송의 검을 예로 들며 참장 낙상지에게 배웠다고 쓰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순수 한국 검술인 조선세법/예도와 본국검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조선세법은 무비지의 저자 모원의가 조선에서 되찾았다고 하여 조선 출처임을 명백히 하고 있고, 예도총보는 조선의 군관인 고만흥의 아버지 고후점이 전수한 검술이며 조선세법에서 유래된 것으로 역시 조선사람이 전수한 검술이다. 그리고 본국검은 무예도보통지에 쓰여진 대로라면 신라의 검객 황창랑을 시조로 삼는다고 하고 있어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검술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고찰은 아래 본국검 신라 기원설 단락 참고.
그러나 실제 쓰이는 세법의 이름을 보면, 향전살적, 진전살적, 견적출검과 같은 중국 기효신서 장도의 4글자 명칭과, 표두압정/좌협수두/백원출동 같은 조선세법의 명칭이 섞여 있다. 단순히 명칭만 같은 것이 아니라 동작도 유사하다. 즉 아무리 시대를 낮춰도 명나라의 척계광 장군이 왜구의 진중에서 카게류 전서를 획득하여 기효신서 장도를 창작하는 자료를 얻은 1561년 이전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1.1. 본국검 신라 기원설


본국검이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역사가 깊은 검술이라는 인식이 있다.
본국검이 언급된 사료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시대인 정조14년, 1790년에 제작된 군용 무술 서적이다. 무예도보통지 어디에도 본국검이 직접 신라시대부터 물려내려온다고 쓴 부분이 없다. 본국검이란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검술'이라는 의미일 뿐이니 조선시대 검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당시에는 신라인을 라인(羅人)이라고 쓰니까, 신라의 검술이라면 라검(羅劍)이라고 전해졌을 것이다.
본국검이 신라의 검이라고 유추하게 된 이유는, 무예도보통지 3권 본국검 부분에서 나온 구절 때문인데,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황창랑은 신라인이다. 전하는 말에는 7살에 백제에 들어가서 시중에서 칼춤을 추었는데 이를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이룬 것 같았다. 백제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불러서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창랑이 이 기회를 타서 왕을 찔렀다. 이로 인하여 백제국인들이 그를 죽이니 라인(羅人, 신라인)들이 슬퍼하여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전한다고 한다....

(중략)

또 신라는 왜국과 이웃하여 그 검무가 분명히 전했을텐데 밝혀낼 수가 없다. 이제 황창랑을 우리나라 검술의 시초로 삼고자 한다(今因黃倡郞爲本國劍之緣起). 어찌 검보를 조선에서 얻어갔다는 모원의와 같겠는가. 조선이 서역의 등운에 비유되는 것은 조선이 스스로 우리나라의 검보를 만든 것이고, 또 일본의 '상서'에 비유하는 것은 조선이 중국의 검보를 전해 받은 것이다. 그 만든 것과 전해 받은 것이 지금 모원의의 시대로부터 백수십 년이 지나서 논할 수가 없으므로 서로 주고 받은 것이 누구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전하지 않아 모씨의 '무비지'를 기다려 전하고 익혔는지 알 수 없다....

이 구절은 단지 '''황창의 고사를 들어서 조선 검술의 시조적인 의미로 삼겠다'''는 말이지 황창이 직접 검술을 전해주었다는 내용이 아니다. 황창랑의 고사 자체는 조선시대 여러 고서에서 나오는데 설명이 다 동일하다. 가장 오래된 것은 여지승람으로 막상 여지승람에서는 황창랑 고사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첨(李瞻)이 고증(考證)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쓴 동자가 뜰에서 칼춤을 추는 것이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에 황창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나이 15, 6세쯤되어서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원하건대 임금을 위하여 백제의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곧 백제에 가서 시가에 춤추니 백제의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 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창이 임금을 좌석에서 쳐서 죽이고 황창은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도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서 말하기를 "창이 와서 춤을 춘다. 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 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눈이 도로 즉시 밝아졌다 한다. 창이 어려서 능히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에 실어서 전해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찌기 삼국사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나라를 침벌한 것은 다 씌어 있으며, 해와 별과 우뢰와 비의 변이 초목, 금수의 요괴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은것이 없다. 나라의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다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할 만하다. 다만 열전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춤추는 것은 반드시 관창일 것이다. 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즉 한 나라의 왕이 암살당하는 큰 사건이 전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창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삼국사기에는 왕이 자객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존재한다.

〔7년(304)〕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 분서왕(汾西王) > 7년 10월 분서왕이 자객에게 살해되다(0304년 10월 (음)) 冬十月, 王爲樂浪大校勘 001守所遣刺客賊害薨.

하지만 어찌됐건 황창랑 고사의 기원은 이렇게 내용이 명백하니, 황창랑 고사와 본국검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칼춤추는 소년과 황창의 고사는 칼춤에 관한 얘기고, 본국검은 칼춤과는 전혀 관계없는 검술이다.

1.2. 본국검의 복원 수련



동영상은 화성행궁의 무예 24기 공연 중.
한국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전통이 희미한 나라다. 조선대부터 문치를 매우 중요시했고, 그 이전의 고려 시대나 삼국시대는 조선보다 전쟁이 잦았고 기록상 당나라 등 중국에 못지 않은 병장기와 무술 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은 가능하지만, 오랜 평화기로 단절되다시피 하고 남아있는 것은 유물 몇 점만 나와도 보물로 여겨질 정도다.[3]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얼마 안되는 사료라도 뒤져서 연구를 해야 하므로 국내 무술인들에게는 무예도보통지와 본국검법이 크게 주목받는다.
덕분에 한국에서 한국 무술을 한다는 단체치고 무예도보통지를 참고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물론 무예도보통지, 무예제보 같은 것들은 민간의 무술이 아니라 군용 무술서이며 이거 하나로만 어떻게 무술을 완성하기에는 내용이나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사료가 워낙 드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거라도 붙잡고 파고들 수밖에 없다.
본국검법과 무예도보통지가 여러 무술 단체에서 한국 무술의 대표 격으로 대접받은 이유가 이것이다. 십팔기 협회, 무예24기, 경당, 해동검도, 대한검도회 등 한국무술계에서 메이저급이라고 할만한 단체들이 다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검술을 나름대로 복원 시도하고 있다.
다만 이 복원 검술이라는 것이 설명이 극도로 부실한 검보를 보고 각 단체에서 자기 아이디어를 내서 해석하는 것이다 보니, 같은 검술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체별로 하는 세부가 다르다. 사실 해석 방식에 각 단체의 검리나 스타일이 깃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대한검도회에서 하는 본국검은 검보에 나오는 내용을 일본 검도의 검리에 맞춰서 해석하다 보니 일본 검도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은 과도하게 생략한다는 비판이 많다.
그리고 일부 단체는 위의 신라 기원설을 토대로 검도는 원래 한국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작금의 '검도'라 불리는 것들은 죽도를 사용하는 일본 검도가 점차 스포츠로 발전한 것인데, 한국에서 일본 문화 자체가 영 좋지 못한 눈길을 받다 보니 이를 타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은 국궁 활쏘기를 심신 단련으로서나 군사용으로나 검법에 비해 훨씬 애용해왔고, 조선 이전 한반도의 검술은 전부 실전되었기에 현재로선 대략의 형태조차 알 수가 없다. 사료상으로 조선은 무예제보와 무예도보통지 발간, 유대유 검경의 도입 등 주변국 도검 및 검법을 분석하고 도입한 문서들이 주된 군사교범으로 사용되는 양상을 유지한다. 이에 따라 조선의 도검 사용법도 범동아시아적으로 다양한 도검과 검법을 종합한 종합무술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즉 본국검이 현재 한국사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검법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신라대에 나타나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설은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는 얘기다. 애초에 무술이나 스포츠는 원류가 어쨌든 간에 유용하면 받아들여서 익히는 게 최고다. 치안이 안정되고 내란과 전쟁이 뜸했기에 자생적 냉병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군은 전적으로 그러한 관점에 입각해 무예를 도입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장 주변국 도검유행에 맞춰 도검의 형태나 바리에이션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를 드러내는 한 측면이다. 시대에 따라 날과 손잡이의 길이, 날폭 등 형태가 제각각인 환도 라든지 말이다.

1.3. 각 단체의 본국검 복원자료


각 단체마다 수련 방식이나 해석의 차이 때문에 동작이 많이 다르지만 큰 틀은 다르지 않다.
당연하지만, 본국검과 관련된 무술 단체들은 모두 '''"복원단체들"'''이다.
→ 경기식 대련에 익숙해서인지 동작이 매우 경직되어있고 검술 해석 수준이 타단체들에 비해 매우 낮다고 평가된다. 복장이나 검리도 일본것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 무예24기는 본래 24반 무예 경당출신으로 이루어진 단체로 초창기에는 경당식 본국검을 했으나, 원전을 참고로 재해석한 결과물을 시연에 보이고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 무예사 박사학위 1호인 최형국 박사가 무예24기 소속이다.
→ 흔히 해동검도에서 본국검법이라 함은 대한해동검도협회에서 수련하는 본국검법 1~7번을 의미한다. 영상은 이와 관련 없는 원전 복원형태이다. 최근에는 협회가 사분오열되어 원전을 재해석하여 수련하는 단체가 많아지고 있다.
→ 본국검을 토대로 등장한 현대 검술단체의 해석. 이쪽도 전승을 주장하지만 엄연히 복원단체다.
→ 쿵후로 복원한 본국검. 해당 복원형은 한국 초창기 쿵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오늘날 우슈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참고로 십팔기협회는 본국검 뿐만 아니라 무예도보통지의 무술 전반을 놓고 타단체들과 대립하며 심각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 서양검술 유저인 Oldswordplayer의 해석.

1.4.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기술


<본국검법>은 모두 33세(勢)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격법(擊法)이 12수(首), 자법(刺法)이 9수로 치고 지르는 것이 모두 21수이다.

1.4.1. 순서


오른쪽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줄을 따라가는 순서대로 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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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도, 지검대적세
  2. 우내략세
  3. 진전격적세
  4. 금계독립세
  5. 후일격세
  6. 금계독립세
  7. 진전격적세
  8. 일자
  9. 맹호은림세
  10. 우회전, 우회전, 좌회전
  11. 안자세
  12. 직부송서세
  13. 발초심사세
  14. 표두압정세
    -중단, 상단, 우회전
  15. 조천세, 우회전
  16. 좌협수두세
  17. 향우방적세
  18. 후일격세
  19. 전기세
  20. 진전살적세
  21. 금계독립세
  22. 좌요격세
  23. 우요격세
  24. 후일자세
  25. 장교분수세
  26. 백원출동세
  27. 우찬격세
  28. 용약일자세
  29. 후일격세
  30. 후일자세
  31. 향우방적세
  32. 향전살적세
  33. 향전살적세
  34. 시우상전세

1.4.2. 기본 자세(格法)[4]



1.4.2.1.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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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그대로 검을 들고 상대와 마주한 자세이다.

검술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현대 검도에서는 이자세를 별로 취하지 않는다.[5]

1.4.2.2.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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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F(전방) GIF(후방)
금계[6]가 한발로 섰다가 곧 날아가려는 듯한 자세이다. 상대를 공격할 때 중단에서 하는 것보다는 더욱 위력적이다. 북진일도류의 음도세가 왼발을 들지 않고 가볍게 땅에 대고 이런 자세를 취하는데 후일 발전하여 팔상세(八相勢)가 되었다. 옛날의 왜검보(倭檢譜)를 보면 <본국검법>에 있는 자세가 단순화 된 듯한 느낌을 받아 '신라와 왜국은 가까이 있으므로 무기(칼)와 검술이 반드시 서로 전했을 것이다'라는 글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세는 실전에서 가장 많이 쓰인 자세라 할 수 있는 셈.

1.4.2.3.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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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가 숲에 숨어 있다가 뛰어나오는 듯한 자세를 말한다. 이 그림은 자칫하면 칼을 든 손이 시야를 가릴 수도 있게 되어 약간의 문제가 있다. 또 왼손을 펴면 다음의 공격에 지장이 있으므로 수정이 불가피하다. 정확히는 저런 느낌(기세)으로 하라는 것이다.

1.4.2.4. 조천세(朝天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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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하늘에 해가 떠오르듯 검을 높이 쳐든 자세로서 오른발을 들어올려 칠 듯한 기세를 보인다. 요즘의 상단세와 같다. 단, 이 그림에서는 양손이 내려와 있는데 본래는 양손이 이마 위에 올려져 있어야 한다.[7]

1.4.2.5. 전기세(展旗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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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펴 앞으로 벌리는 듯한 자세이다. 내략(內掠)과 같은 방적세(防賊勢)의 일종으로 보면 된다. 위의 이미지는 찌르는 자세 같으나 이것은 멈추었을 때의 동작이기 때문이다. 오른발을 들고 안으로 스쳐 취한 자세이다.

1.4.2.6.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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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P
원숭이가 동굴을 뛰어나오려는 준비자세라 할 수 있겠다. 백원은 희고 큰 원숭이로 성성이, 고릴라 같은 지능이 매우 높은 유인원으로 중국의 서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으며 성이 나면 표범도 찢어 죽일 만큼 힘이 세다고 한다. 이런 짐승이 동굴을 뛰어나오려는 찰나를 모방해서 이 자세를 취하라는 뜻이다.

1.4.3. 격자지법(擊刺之法) 21수[8]



1.4.3.1. 진전살적세(進前殺賊勢) (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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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F(후방)
앞으로 나아가며 상대의 상체를 위에서 아래로 치는 자세이니 현대 검도의 정면치기가 바로 이것이다. 위 짤은 중간에 멈춰있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동작을 표시하기 위한 중간 동작이라고 보면 된다. 이 자세야말로 검으로 상대를 치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그림에서는 머리를 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1.4.3.2. 향전살적세(向前殺賊勢)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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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만 놓고 보면 진전살적세나 후일격세와 별 다를바가 없어보인다.

1.4.3.3. 후일격세(後一擊勢) 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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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격적세(進前擊賊勢)와 같이 상대의 머리를 정면으로 치는 자세이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며 왼발로 몸을 밀면서 오른발이 땅을 구르는 순간 치는 것이다.

1.4.3.4. 후일자세(後一刺勢)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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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P
뒤로 돌아 상대의 목 부분을 찌르는 자세이다. <본국검법>의 격법(擊法)은 대개 오른발을 구르며 치게 되어 있고 자법은 오른발과 왼발을 고루 사용하여 찌르는데 총검술에서 길게 찔러의 자세가 이와 비슷하다는 설도 있다. 칼날이 위로 향한 것은 틀어 찌르는 것을 나타낸다.

1.4.3.5. 일자세(一刺勢) 1수


정면찌르긴데

1.4.3.6. 안자세(雁字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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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雁)자의 변인 엄자와 같이 몸을 기울이며 직선으로 찌르는 자세이다. 엄자세라 하지 않고 안자세라 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러기의 질서나 절도 그리고 겨울 철새의 꿋꿋한 기상들을 보아 그렇게 일컫는 듯하다.

1.4.3.7.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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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찌르는 자세로 대부분의 자세가 동물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는 것인데 이 자세는 특이하게도 군사와 관련이 있는 용어인데 부란 병부를 말하는데 군대를 동원할때 표로 썼던 것이니, 화급을 다투는 것이기 떄문에 지체없이 신속하게 찌르라는 뜻인 듯하다.

1.4.3.8. 발초심사세(發艸尋蛇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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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헤쳐 을 찾는다는 뜻인데 언뜻 보면 정면을 치는 형태인 것 같으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옆을 치는 자세이다. 즉 조심스럽게 풀을 헤쳐 뱀 찾는 즉시 옆에서 푸려치는 것이다. 그림에도 칼이 잘못 그려져 있다. 츨어 잡은 양손의 모양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4.3.9.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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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정수리를 칼끝으로 겨누어 누르는 듯한 자세이다. 깊이 찌르는 것과 달리 뛰어오르는 표범의 정수리를 눌러 이를 제압하는 형태이다. 발을 구르지 않고 힘있게 눌러 뛰어드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듯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1.4.3.10. 좌우요격세(左右腰擊勢) 2수(각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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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요격세
우요격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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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요격세(左腰擊勢): 왼쪽 허리를 치는 자세이다. 그러나 <본국검법>에서는 세법(洗法)으로 목을 베라 하였으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목덜미를 옆으로 후려치듯 베라는 뜻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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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요격세(右腰擊勢): 좌요격세에서 이어지며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 목을 씻어 베는 자세이다. 이때는 왼발을 구르며 오른발을 들어친다. 그림에 칼을 등에 멘 듯한 것은 친 후 칼끝이 돌아간 모양이다.

1.4.3.11. 좌협수두세(左挾獸頭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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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발을 들고 짐승의 머리를 왼쪽 겨드랑이에 낀듯한 자세이다. 조천세와 비슷한데 검을 끌어당기듯 왼쪽 어깨에 둘러멘다.

1.4.3.12. 장교분수세(長蛟噴水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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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적인 그림의 모습은 진전격적세나 후일격세, 향전살적세와 같다. 그리고 실제 상대의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자세이다. 여기서 교(蛟)란 교룡(蛟龍)[9]을 말하며 교룡은 가끔 물을 입으로 뿜어내는데 자연 포물선을 그리게 되니 칼끝을 그와 같이 큰 원을 그리며 오른발을 내어 치라는 뜻이다.

1.4.3.13. 우찬격세(右鑽擊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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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격세(擊勢)이지만 실제로는 찬자(鑽刺)이며 오른쪽을 향하여 송곳으로 찌르듯 비비어 찔러가는 자세이다. <본국검법> 중에서 가장 형태와 실제가 모호한 자세이다. 위 짤을 보면 오른발을 구르며 오른쪽을 찌르게 되어 있는데 이는 이치에 어긋나서 무리가 생긴다.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다른 검법에서도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

1.4.3.14.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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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두압정세와 비슷한 자세로 용감하게 뛰어 즉시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자세이다. 이 때는 왼발을 굴러 몸을 안정시키며 칼끝이 멈추도록 한다.

1.4.3.15. 시우상전세(牛相戰勢) 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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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뿔소가 서로 머리를 숙이고 받는 듯한 자세이다. 이에 앞서 향전살적세를 두 번하여 상대의 정면을 진전격적세와 같이 두 번 치는데 그 후 이 시우상전세를 취하고 끝을 맺는다. 이 법은 존심의 뜻을 가지고 있으니 두 번 연속 공격한 후 넘어진 상대를 꼭 다시 찌른다기보다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니 이는 현대 검도에서는 매우 중요시하는 검도정신의 백미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왜검에는 물론 기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아홉 가지 도검보(刀劍譜)에도 없는 유일한 것이다. 예도(銳刀)의 것이 수두(獸頭)로 끝나나 이 시우상전세와는 큰 차이가 있다. 방심하지 않는 심신의 자세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본국검법>이 이미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4.4. 방어법



1.4.4.1. 내략(內掠)

GIF(우내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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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해진 자세가 아니라 지검대적세에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며 다음의 동작으로 연결시키는 것으로, 방어법으로는 다른 나라의 검술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것이다.
칼날을 밑으로 하여 안으로 스쳐 몸을 돌리며 그 힘의 반작용을 이용하여 곧 공격한다.

1.4.4.2. 외략(外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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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략(內掠)과 대조되는 자세이다. 밖으로 스쳐 막되 칼끝을 밑으로 하여 막는 것이 아니고 칼끝이 어깨에서부터 거의 수평이 되게 하여 돌아서며 옆을 후려치듯 하면서 왼발을 들고 다음 동작으로 들어간다. 향우방적세(向右防賊勢)라고도 한다.

2. 소설 '본국검법'


안병도가 쓴 동양 판타지 소설(작가 본인의 표현). 본국검법을 소재로 일본 전국시대(1부-1559년 2부-1560년)를 배경으로 기억을 잃은 조선 소년 준과 일본최강의 3대검객중 한명인 하나기리의 이야기. 전체적으로 시바타 렌자부로나 요시카와 에이지 스타일의 사무라이 소설과 비슷해 보이지만, 음양사무녀의 술법 등도 등장하며 후에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본국검법이란 이름을 달아놓다보니 다들 '''본국검법으로 칼부림 하는 이야기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전쟁소설이 나왔습니다.
통신시절 연재한 본국검법 신라시대 이야기는 무협의 배경을 한반도로 바꾸면서 로컬라이징을 확실하게 한 명작이었지만 출판된 본국검법은 무협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고 가상역사도 아닌 어정쩡한 소설이었다.
평행세계란 설정으로 시대에 맞지 않게 야구가 등장하고 유럽군대가 사카이를 점령하고 혼간지와 싸우기도 한다. 게다가 혼간지 수장은 이미 죽은지 오래인 렌뇨다.
하나기리와의 관계가 우정 이상이라 BL커플 설도 나돈 적이 있었다. 문제는 작중의 하나기리의 묘사를 보면 여성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작가 본인도 하나기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정을 못했다고 한다.(작가 후기에 "하나기리의 성별을 확실하게 정할까말까 고민했지만 그냥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걸로 할게요"라고 적혀있다.) 한때 하나기리와 준의 자식이 등장하는 소설도 구상했다고 하는데?
나쯔히메라는 정히로인도 있긴 한데 하나기리의 포스가 워낙 강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심지어 '''작가 본인'''이 하나기리x준 지지자라 한다. 틀렸어 꿈도 희망도 없어.
달과별 출판사에서 1부라는 이름으로 4권까지 나오고 연중되었다가 자음과모음에서 다시 처음부터 '''1부포함''' 재출간되었다. 2부라는 이름으로 8권까지 나오고 연중된 상태. 완결될 가망이 거의 희박해 보이는 연중작에 속한다.
위에 쓰여진 통신시절 연재된 본국검법 신라시대 이야기는 본국검법 출판 소설내에서 나오는 검술 류파인 '청풍무심류'의 개조가 되는 시라기 료가미(新羅狼神)의 이야기 '해룡승천의 장'으로 2000년 두리 출판사에서 '만월의 나라'란 이름으로 2권짜리로 발간되었다. 시대배경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그리고 2006년에 본국검법의 주인공인 성준의 아버지인 성진천이 나오는 '폭풍의 검'이 발해 Books에서 6권 완결로 발간되었다. 내용은 본국검법보다는 앞선 시대의 이야기. 잃어버린 백제의 검법 제현검법을 둘러싸고 중원과 조선, 일본의 무사들이 격돌하는 상황에서 이세란이란 이름의 소년이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1] 해당 해석은 대한검도회의 해석이다.[2] 위와 마찬가지로 대한검도회의 해석이다.[3] 물론 이정도의 고대 유물 자체가 굳이 한국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귀한 대접 받는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국은, 특히 무기쪽은 심하게 안 나오는 편이다.[4] 해당 해석은 대한검도회의 해석이다.[5] 검술의 기본을 특정 파의 방식으로 제한하는 문제는 넘어가더라도 애초에 현대 검도와 본국검법은 다른 나라의 다른 유파고 현대 검도의 정안 역시 직접 칼 쓰고 대련 하는 쪽에서 나름 다 자기들이 써보고 이거다 하고 정립한 방식이다.[6] 닭의 일종.[7] 본국검총도의 그림이나 다른 검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8] 위와 마찬가지로 대한검도회의 해석이다.[9] 전설상의 용으로 때를 얻지 못하고 물속에서만 지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