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 小說
- 관련문서 : 소설 관련 정보
小說 / Novel, Fiction[1]
작가의 상상력 또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주로 허구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 분량에 따라 장편 · 중편 · 단편 · 엽편으로, 내용에 따라 과학 소설 · 역사 소설 · 추리 소설 따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옛날의 설화나 서사시 등의 전통을 이어받아 근대에 와서 발달한 문학 양식이다.
1.1. 역사
소설은 대표적 산문 문학으로서 근대 이후 많이 사랑받고 있는 문학의 장르이다. 그 종류만 해도 무척 다양하며, 그 만큼 읽고 즐기는 사람들의 계층도 매우 다양하다.
사실 '소설'이라는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작은이야기'이고 이는 그대로 중국 고대 문학의 한 양식, 혹은 보잘 것 없는 이야기 를 일컫는 말이었다. 대강 때려맞추면 중국의 소설小說이란 본래 고대 시기에 왕이나 황제를 비롯한 궁중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궁중문학을 비롯해서 유교 경전은 아닌 온갖 잡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현대적으로 분류하자면 문학에 가까웠던 소설가들의 작품은 목록이야 많이 전해지긴 하지만 그 실제 내용은 소실되어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일본의 한 소설가가 'novel'을 소설로 번역하면서 지금의 의미가 되었다. 참고
일반적으로 최초의 소설(novel)로 평가 받는 작품은 11세기 초 헤이안시대의 궁녀였던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장편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초의 소설이란 근대적 산문 문학의 요건을 충족했느냐로 따진 기준으로써, 겐지모노가타리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행위만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심리 묘사와 발전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동기에 중점을 둔 산문 문학은 과거의 산문 문학과 비교하여 "근대적"이라고 일컬어진다. 현재도 대다수의 소설들은 캐릭터들의 내면과 행위 모두를 골고루 묘사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 있다.
1.1.1. 대한민국의 소설
한국 소설의 기원은 패관 문학이다. 패관 문학은 지금으로 치면 통속문학이었고 성리학이 뿌리 깊었던 조선에선 그냥 공부나 가정일할 시간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데 쓰게 만든다해서 좋은 대우를 못 받았다. 종종 허무맹랑한 소설들이 해악을 끼친다고 하면서 사회적 문제거리로까지 여겼고, 실제 소설 내용도 진지하게 다루는 작품보다는 흥미본위 내용을 다룬 소설이 많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별 의미없이 재미로 읽는 인터넷 소설, 무협 소설, 라이트 노벨, 판타지 소설 같은 개념이었다. 조선후기에 저술된 소설 가운데 작자가 미상인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러한 인식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대에는 문맹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특히 한문의 경우 실질적으로 사대부 계층이나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소설은 문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한문 소설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근간이 사대부 계층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식자층이어야 향유할 수 있기에, 받는 취급에 비해 고등한 축에 속하는 유흥거리이기도 하였다. 이후 '언패(언문 소설)'가 등장하면서 커트라인이 낮아지긴 하였으나, 언문도 배우지 못하는 평민들도 많았고, 책값이 일반인들에게 매우 부담이 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소설책도 아무나 사서 읽지 못해서 시장판이나 길거리에서 전기수들이 낭독하는 소설을 듣기도 했다. 애당초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된 것이니 사대부들도 당연히 봤었고, 사대부 여인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소설책을 빌리는 일도 흔했다. 그리고 소설책을 대놓고 천시한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긍정적으로 본 고위층들도 적지는 않아서 영조는 소설책을 대놓고 즐겨보았고, 일부 사대부들도 손수 소설책을 창작하기도 했으며, 개중에서 용돈벌이용으로 소설을 창작한 경우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김시습과 김만중, 박지원이 있으며 세도정치의 문을 연 것으로 유명한 김조순도 소설책을 즐겨봐서 정조에게 혼이 났던 일화도 있고, 소설책을 손수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구한말 들어 신소설이라는 장르가 도입되면서 계몽성 소설들이 대거 출판되었고 그 이후로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6.25 전쟁, 군사독재정권 시기를 지나게 되면서 리얼리즘 소설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으며 사회참여나 자기반성 등 심각한 의미를 담은 것들이 많았다. 사회에서 도피해서 개인적 일상과 소비문화를 즐긴다는 소설도 많았으나, 그런 소설들조차 암울한 식민지 현실 때문에 결국 그 내용이 우울하고 무거우며 죄책감의 정서를 잔뜩 담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광복 이후 독재정권이 이어지다 보니 사상 학문 언론 출판의 자유가 위축되고, 그나마 문학이 체제의 탄압과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중시하는 쪽으로 무겁게 변하게 되었다. 즉 지식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학술과 언론이 아닌 소설을 통해 돌려 말하게 되고, 이에 따라 소설은 사회담론을 형성하는 견인차가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문학이 '''사회적 주장을 담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결과 현대에는 독자들이 문학이라는 것을 무겁고 어려운 것으로 치부하거나, 소설을 자기계발서처럼 무엇인가 배우거나 얻으려는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물론 당대라고 해서 소설이 무조건 교양적인 부분만 부각되었냐면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었고 오락적인 용도의 소설도 여전히 잘만 나왔다. 소설을 원작 삼거나 각색하여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경우는 흔히 이루어졌던 일이었는데, 만약 소설에서 단순히 교양이나 사회 참여 부분만 부각되었다면 대중 매체 차원에서의 이러한 각색도 흔히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 중엔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도 적지 않았으며,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사에서 드라마를 제작할 때 웬만한 흥행소설들은 드라마로 제작했을 정도.
소설의 영상화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없진 않았는데 판권료가 많이 쌌던 시절이고 100% 창작보다는 소설을 원작 삼아 제작하는 것이 작품을 만들기에 훨씬 쉬워서이기도 했다.[2] 물론 판권료 상승으로 이러한 관행은 줄어들었지만, 어쨌든 이 당시의 소설을 원작 삼은 소설이라고 해서 TV 문학관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라는 얘기. 장르소설이 없지는 않아서 무협지가 만화방에서 흔하게 읽히기도 했다. 물론 무협지나 노상에서 팔았던 소설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저급하게 취급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교양 일변도도 아니었다.
영화계에선 천만 관객 영화가 흔하게 나오지만, 문학계에선 백만부 판매의 소설이 거의 기적처럼 드물게 나올 뿐이다. 소설시장 자체가 매우 작아졌고, 소설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커뮤니티도 별로 없다. 소설이 메시지 전달의 도구였던 시절의 소설들이 공교육을 통해 마치 소설의 전부인 것처럼 교육되고, 대부분의 한국 소설가들이 사회성, 역사성, 언더도그마, 계몽성, 문장미학에 골몰한 나머지 이야기 자체의 재미와 감동을 놓쳐버린 경향도 한국 소설의 쇠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소설이 영상매체나 스마트 기기 등에 밀려 대중문화의 첨단에서 물러나고, 국민의 독서열이 시들었다. 다시 독서시장을 키우기 위해선 대중에 잘 통하는 대중(장르)문학을 키워야 하는데, 한국의 순수문학계는 배타적인 탓에 대중문학 작가들을 키우지 않고, 기성 순수문학 작가들의 친목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독자들이 줄고 문단은 그들만의 리그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 독서시장에서 스릴러 SF 추리 등의 장르소설 분야에는 예전부터 일본 소설들이 지배력을 가진 상황이고, 할리우드 영화의 원작소설들이 인기를 누리는 등 영미권 소설들도 이에 가세하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넷 소설이 등장하면서 나도 소설을 한번 써보자는 작가와 작가지망생이 늘어나는 중이다. 국내 소설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게 된 양판소와 귀여니류 연애소설은 불쏘시개라는 평가를 자주 받지만, 만만찮은 독자군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리 까인다한들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쓰고 출판되는 것이다. 특히 귀여니의 소설들은 인터넷 소설이 본격적으로 출판되는 시발점이 되었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온라인의 글이 이모티콘을 주렁주렁 달고 맞춤법을 안 지킨 채로 활자화 된 것은 출판계에 충격을 던진 것이다.
이 쪽 방면에서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소설로는 절세무공이나 아름다운 천사, 해리와 몬스터 등의 소위 봉인소설들이 있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투명드래곤의 경우 이 바닥의 오감도라 할 만큼 연재 당시의 충격이 컸던 탓에 오히려 재평가까지 나오기도 한다.
2014년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교보문고의 2003~2013년 집계에 따르면 추리 및 공포 소설 분야는 일본 소설 등 외국소설이 장악했다. 이 분야 한국소설의 점유율은 5퍼센트대에 불과하다고 한다.
2010년대 이후로는 웹소설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1.2. 소설의 정의?
기본적으로 소설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히 문학을 위한, 더 정확히는 재미를 위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 시와는 달리 작가의 생각이 보다 구체화하여 서술되기에 시처럼 문맥이나 단어에 담긴 뜻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 없이 단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물론 복선 같은 경우는 돌려서 표현하지만 면밀하게 말하자면 이건 시적 해석과는 다르게 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재미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일부러 어렵게 꼬아봐도 무방하다. 그런 부분에서 정점에 위치한 책이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요컨대, 문학이라는 장르 중에서 쉬운 축에 속하는 것이 이 소설이다. 하지만 문학적 측면에서 쉽다고 하더라도 쓰는 것 자체가 쉽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듣보잡들이 소설을 쓰겠다고 난리치는 경우가 다반사며, 연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가장 많이 나오는 경우가 바로 양판소니 뭐니 하는 그렇고 그런...
스티븐 무어(Steven Moore)라는 학자는 소설을 "작가 혼자서 모든 배역을 맡는 오페라"라고 묘사했다. 이런저런 인간군상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니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그 중에는 판타지[3] 나 SF 같이 현실적이지 않은 어려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도 존재하지만 사실 이와 같은 장르들 조차도 그 세계관만 이해한다면 원래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소설은 보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지만, 사회적 문제나 풍자성을 담고 있는 블랙코미디 류의 소설이나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조금도 웃기지 않은, 다소 이해가 힘들거나 불편한 소설들도 즐비하게 존재하고 있다.
글의 질은 작가마다 천차만별이다. 한국에서는 "등단"한 작가들이 쓴 소설을 순수문학이라 부르며 왠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취급을 해주는 경향이 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순수소설과 대중소설의 차이가 뭔지도 제대로 설명 못하며,[4] 개중에서도 정말 못쓴 것은 양판소나 노루표 무협, 불쏘시개 등으로 취급받긴 하지만, 가끔 야설보다 더 야설 같은 소설이 있기도 하다. 마광수 교수까지 가면 문학이냐 외설이냐까지 가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소설에는 방송금지용어가 많이도 등장한다.
아래의 일화에 나오는 소설은 단 여섯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명작을 쓰기 위해서는 소재선택도 중요하지만 글을 쓰는 능력, 즉 '필력'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비평이나 리뷰 등을 찾아보면 의외로 소재 자체는 다 어디서 많이 본 것 인데, 단순히 글 자체가 엄청나게 재밌어서 명작으로 불리는 것들도 많이 있다. 영화 중에서도 소재는 흔한데 각본과 연출이 잘 짜여져서 굉장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인터넷 상의 리뷰나 누군가의 소개 등을 통해 접하게 된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클리셰로 점철된 듯한 뻔해 보이는 내용인데도 상당히 잘 나간다고 한다면, 일단 한번 구해서 읽어보자. 소재와 설정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인기 요인이 원본 글에는 있다. 적어도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로 글을 쓰는 능력이 다소 떨어져도 독창적인 소재와 설정으로 커버되기도 하는 등 소재의 중요성도 무시할 순 없다. 개중에는 사회 전반의 도덕에 어긋나거나 그 막장스러움으로 뭇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법 한 설정을 지닌 소설도 등장하곤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런 유형의 소설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감정의 폭발(카타르시스)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한다. 단순히 분노를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감정과 흥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읽는다는 설. 쉽게 말해서 몰입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막장 드라마가 흥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이러한 소설 자체가 행복한 이야기로 점철된 과거의 소설들에 대해 안티테제라서 흥미를 끄는 것이라고도 한다. 즉 옛날의 소설들은 별다른 반전이 없었거나 뻔한 전개인데 비해 근래의 소설들은 틀을 깨는 형식이 많다는 것. 과거에는 가난뱅이끼리도 잘 살 수 있었는데 현실은 꿈도 희망도 없다든가, 옛날엔 순도 100% 착한 사람이 악을 징벌했지만 근래엔 차악이 최악을 징벌한다든가.
소설은 종종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괴테의 파우스트나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처럼 자기 일생을 소설 하나에 쏟아부은 위인들도 존재한다.
소설가들에 대해서는 작가/목록 문서 참조.
1.3. 만화와 소설
스토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만화와 함께 자주 이야기되곤 한다.
- 만화는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 소설은 이미지를 글자로 변환&전달하기 위해 상상력과 표현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모된다.
- 만화는 작품을 연재하며 진행시켜나가는 것 자체가 창작자에게 좋은 연습이 되기 때문에 점점 갈수록 다듬어지며 작품이 나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실력이 늘어난 만큼 창작자 입장에서는 '조금만 더 투자하면 퀄이 나아질 것 같은'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더 매달리게 되고, 그 이후로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무한 루프가 발생한다.
- 소설은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완결내기 전까지 창작자가 가진 기량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원고 기간이 길어지면 문학적 기량을 다듬기 위한 수양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집필 중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창작자는 드물다. 따라서 작품을 시작했을 때에 축적되어 있던 기량만큼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막혀버리면 이어나가기 힘들고, 심지어는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설사 쓴다 해도 능력자가 아닌 이상 갈수록 분량이나 질적인 문제로 막장 글이 돼 버린다.
이 때문에 글을 쓰는 처음에는 그림을 안 그려도 되니까 쉬워 보여도 가면 갈수록 이러한 것들을 표현해야 할 수고가 더해지므로 전혀 쉽지 않다. 게다가 쓰다 보니 이전에 썼던 소설의 줄거리를 까먹는 경우도 발생하고, 더 나아가 설정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반면 그림은 선의 안정이나 비율을 맞추는 것들이 꽤나 빡세지만 선이 안정을 되찾을 시점에선 비교적 수월해진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으나 실력이 좋아진 그 이후의 과정도 절대로 쉽지 않고 고생길이 훤하다는 점을 보면 둘다 난이도는 비등비등하다.
결론은 만화 그리는 사람에게는 만화가 더 어렵고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소설이 더 어려운, 상대적인 것이다. 다만 만화는 육체노동적이고 소설은 정신노동적 측면이 크다. 원래는 소설도 육체노동이었는데 타자기가 개발되면서부터... 아직도 육필작성을 고집하는 소설가가 몇분 계시는데, 그분들에게는 만화가 뺨치는 수준의 육체노동이 된다. 과거 사례로는 그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 정도가 있으시겠다.
한 편의 만화작품을 글작가 그림작가가 함께 힘을 모아 연재해 나가는 경우에는 만화와 소설의 부담을 반반씩 떠맡은 형태가 된다. 그림작가는 스토리구상의 압박에서 상당부분 벗어날 수 있으며, 글작가는 스토리를 종이 위에 표현하는 부담을 덜 수가 있다. 이러한 연합체제가 이상적으로 이루어지면 시너지를 일으켜서 1+1=3 의 기적을 만들 수 있지만[5] , 서로 소통이 안되고 조율도 안 돼서 삐걱거리게 되면 작품 활동 기간 내내 영원한 고통만이 기다릴 뿐.
여담으로 위와 같은 글+그림 2인조 팀의 경우, 글작가가 상대적으로 편할 거라 보는 선입견이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 그림작가는 눈물겹게 육체노동을 하지만 글작가는 어쨌든 머리를 쓰는 쪽이니 몸은 편하지 않느냐는 인식이다. 하지만 글작가의 스토리 구상을 위한 정신노동은 그야말로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 하다못해 그림작가가 원화를 완성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똑같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작품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면 그림작가의 작풍과 스타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이야깃거리로 삼는 건 십중팔구 '스토리'다. 독자들이 스토리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 글작가의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10번 들어도 악평 하나가 기억에 오래 남게 마련. 그리고 글작가는 해당 연재분 스토리구상을 해놓고 '와 끝났다 휴식!' 하고 노는게 아니라 향후 전개도 생각하고 그림작가랑 이야기도 해야 하고 콘티를 수시로 체크하며 감수도 해야 하는 등등 할 게 많다. 간단히 말해 '''소설(스토리)이 키잡이(방향을 정하는 사람)이라면, 만화는 뱃사공(노를 젓는 사람)이다.''' 방향 없이 배를 몰 순 없고, 노를 젓지 않고선 나아갈 수 없다. 즉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누가 더 편하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며 작업에 도움도 안 된다.
1.4. 잘 쓰는 방법?
소설작법 문서 참고.
1.5. 소설의 분류
1.5.1. 소설의 장르별 분류
- 고딕 소설
- 성장소설
- SF
- 라이트 노벨 - 신전기
- 로맨스 소설
- 무협소설
- 사변소설
- 야설
- 공안소설
- 역사소설
- 전쟁소설
- 추리소설
- 판타지 소설
- 게임소설
- 전기소설
- 호러소설
- 피카레스크
- 영웅소설
- 범죄 소설
사실 범죄소설과 추리소설, 하드보일드는 아직 명확한 구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은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하드보일드는 '범죄가 왜 일어났는지'에 관한 소설이며 범죄소설은 양자+α로 본다. 하드보일드의 경우 범죄의 트릭에 치중하는 추리소설과 달리 피해자/가해자의 심경이나 사법제도 등 범죄 일반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첩보소설 등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분량이 극히 짧은 소설로 보통 1000단어 미만이지만 10단어 미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썼다는 6단어 소설이지만, 지금은 더 짧은 소설도 남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 소설은 후안 페드로 아파리시오가 쓴 Luis XIV로 'Yo.(짐은)'의 1단어. 더 짧은 소설은 멕시코의 기예르모 삼페리오의 유령인데, 글자수가 "아예 없다."
1.5.2. 기타 관련 분류
1.6. 관련 문서
1.7. 시험 스킬
보통 '''소설을 쓰다'''라고 표현.
서술형으로 출제되는 문제를 풀 때, 기억이 나는 관련단어와 아는 단어를 몽땅 투입하여 그럴싸해 보이는 답안을 작성하는 스킬을 의미한다. 물론 정확한 답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짓이다. 소설을 쓰기 싫으면 공부하자.
딱히 답이 정해지지 않은 서술형 문제가 자주 출제되는 대학교에서 유용한 스킬이며, 짬을 많이 먹을수록 경험이 쌓여서 뭔가 이상함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소설을 잘 쓴다. 특히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출신들이 이 스킬에 '''매우''' 능하다. 문제가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도 몇 개의 핵심 단어들을 짜내서 몇 줄을 써내려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정직하게 백지로 내는 경우가 많다.
결과는 교수님들 성향에 따라 다른데, 주요키워드를 바탕으로 '그래도 공부 좀 했구나'라고 하시면서 점수를 주는 교수님이 있는 반면[6] , 어쨌든 원하는 답이 아니므로 점수를 안 주는 교수님도 있다. 후자의 경우면 학점은 당연히 망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인문계열에서나 통하는 스킬이고 이공계에서는 택도 없다. 인문학 계열의 경우, 사람들의 각자 생각이 다 다르고 철학이나 사회에 대한 견해도 천차만별이겠지만, 비교적 논리가 정형화되고 각종 법칙들이 난무하는 이공계에서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겠는가. 학점테러를 당하는 선에서 끝나면 다행이고, 심하면 교수와 면담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 이공계에서는 유사하지만 반대되는 개념으로 '''논문을 쓰다'''라는 표현이 있다. 문제가 매우 쉽고 풀이를 완벽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엄밀성을 추구하기 위해 답안을 최대한 자세히 작성하는 스킬이다. 이 경우 보통은 높은 점수를 받는데, 후반부에 답지의 공간이 부족하여 답을 못 쓰는 경우도 있다.
1.8. 관용적 표현
바로 위 문단에서 파생된 형태로, 주로 토플 등의 어려운 시험에서 사용된다. 본인은 잘 본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실제로는 개판 5분 전인 상황일 경우, '소설을 쓰고 나왔다'라는 표현을 사용.
또한 정치권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허구성'을 이용해 비유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논란이 되기 쉬운 표현.
2. 小雪
24절기 중 하나. 황경이 240도가 되는 시기다.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맥질하기
수숫대로 터울하고 외양간에 떼적 치고
우리집 부녀들아 겨울 옷 지었느냐
- 농가월령가
양력 11월 22일 경으로, 이 때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며 얼음이 얼고 첫눈이 내리는 등 첫겨울의 징후가 보인다.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기 때문에 소춘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서울과 경기남부, 충청도, 경북지역에서 보통 이 시기에 겨울이 시작된다.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라고 할 정도로 월동준비에 만전을 기해야하는 시기다. 시래기를 엮어서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고 목화를 따서 손을 보며, 또 겨울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둔다. 소설에는 날씨가 추워야 보리 농사가 잘 된다고 하며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에는 배를 잘 띄우려 하지 않으며 이와 관련해 다음의 손돌바람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제철 음식으로는 채소류, 어류, 갑각류 등이 있다.
1번 문단과 엮어서 개그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1] 현대에는 노블이라는 낱말보다 픽션이라는 낱말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2] KBS 대하드라마같은 경우에는 대다수의 작품이 소설 원작이다.[3] 문서 중 1번항목의 판타지는 소위 양판소같은 불쏘시개가 아니다. 왠지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면 그 쪽을 생각하게 만드는 미묘한 무엇인가가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도 한다.[4] 순수문학에는 원래 소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저 등단한 작가들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거의 다 특정 장르의 소설을 쓴다. 그게 판타지나 무협지, SF가 아닐 뿐. 장르문학 문서의 논쟁도 참고하자.[5] 글만으로 정밀묘사가 어려운 경우 그림이 부족한 묘사를 보조해줄 수가 있다.[6] 물론 이 경우에도 점수는 그렇게 썩 좋게 나오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B나 C+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