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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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일대의 위성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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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의 위치한 부소산의 산성.
600년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 부소산성 일대는 당시엔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고 불렸다.
2. 조사내용
백제 사비기 수도의 배후산성이다. 사비성이라고 하지만 웅진시기 공산성[2] 과는 달리 배후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소산성 자체만을 사비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전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관리하던 부소산성 남쪽의 관북리유적이 새롭게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는데 관북리 유적이 바로 수도 사비의 주요 왕궁 시설들로 추정되는 건물지들이 발견된 유적이었다.
사실상 사비성의 주요 시설이 관북리 유적에 있기 때문에 부소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때도 관북리유적과 함께 묶여서 지정되었다.
2.1.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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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의 성벽과 사용시대
부소산성의 성벽 구조에 대해서는 발굴이 있기 이전에는 백제의 왕성 특징으로 이중성의 구조를 취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부소산성을 조사하여 내부의 내성 구간의 축조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이고 일부 구간은 조선시대임을 확인했다. 그래서 백제 왕성의 특징이 이중성 구조라는 견해는 사장되었다. 참고로 웅진기의 왕성인 공산성 역시 초창기에는 이중성이라고 추정하였지만 발굴조사를 해보니 원래 백제 토성(또는 토석혼축성)이 있었다가 조선시대에 작게 개축하는 바람에 이중성처럼 보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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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의 남벽의 판축
부소산성에 남은 사비기의 성벽구간에서는 한성기 이래로 내려오는 백제 특유의 판축구조가 확인되었다. 백제 토성(동음이의어)#s-2의 특징 중에는 영정주(永定柱)를 사용했다는 것이 있다. 부소산성에서는 그러한 영정주, 다시말해 판축을 위한 틀을 만들고 고운 점토로 판축하는 기법이 남아 백제의 성곽 축조 방식을 추정할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사실 영정주를 박은 흔적(영정주공永定柱孔)이 있는 것은 판축으로 쌓았다면 당연하다. 다만 고구려나 신라의 판축에서는 영정주의 흔적이 있는 곳도 있지만 없는 곳도 많다. 그래서 위 사진처럼 비교적 굵직한 영정주가 횡, 종방향으로 박혀있는 점토로 판축한 성을 흔히 백제의 토성으로 추정한다. 비단 부소산성 뿐만 아니라 한성기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백제 고지의 여러 백제와 관련된 여러 토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도 이러한 기법들을 사용한 흔적이 나왔다.
특히나 부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주요한 거점으로써 재사용되면서 아예 신라가 쌓은 구간이 있는데 축조 방식은 편축기법[3] 의 석성으로써 면석의 뒷채움부 판축양상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기본적으로 토성과 석성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뒷채움부만 보더라도 사질계의 밝은색 점토로 비교적 대충 채워넣은 점에서 백제와 신라의 축성기법은 눈에 띄게 다르다.
백제가 시종일관 토성만 쌓은 것은 아니다. 토성에 가깝지만 성벽의 외면에 석성처럼 돌을 쌓은 경우도 꽤나 많다.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바로 부소산성과 연접한 부여 나성이 대표적이다. 체성부 자체는 토성의 축조방식에 충실하지만 외면만 가공한 돌을 면석으로 삼아 쌓아 올렸다. 단순히 면석만 대략 가공하여 쌓은 것은 아니었다. 발굴해보니 면석+잡석 뒷채움+토축체성부 구조로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
2.2. 관북리 유적
관북리 유적에서는 특히 이중 주춧돌을 사용한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다양한 건물지와 연못(蓮池), 전형적인 백제식 대형목곽고 등 저장시설이 있던 흔적이 나왔다. 하지만 관북리 유적의 유구들이 비교적 양이 적고 위계가 있는 유구라고 해봐야 이중 주춧돌 건물지 말고는 없다. 관북리 유적이 왕궁 터로 추정하긴 하지만, 완벽한 궁전의 건물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서 다소 아쉽다.
3. 사비 도성
이 성은 사비천도 이전부터 있었다고 추정한다. 부소산성 내에서 발굴된 기와에서 대통(大通)이란 중국 양나라 연호의 명문이 나왔는데, 대통은 527~529년에 사용했다. 그런데 사비천도는 538년에 했다. 무덤에 묻힌 유물들이야 다시 꺼낼 일이 없으므로 해당 연대가 빼박 유적과 유물의 연대가 될 수 있지만 기와는 527년에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538년 천도하며 다시 쓱 옮겨서 쓰면 그만이기 때문에 연대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다.
기와의 연대를 신용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웅진 천도 당시의 도성의 면모를 보더라도 이곳 부소산성을 비롯한 사비도성의 유적들을 살펴보면 계획적으로 천도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성왕의 사비 천도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이전 도읍인 웅진은 실로 안습한 환경이었다. 역시 475년 고구려 기습남침(?)에 수도가 함락되면서 어쩔 수 없이 천도해야 했던 정황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이야 치수방재가 체계화되었지만 과거에는 치수는 주요한 문제였다. 공주 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제민천은 범람과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공산성 자체도 왕궁의 여부가 문제시될 정도로 왕성으로서는 안습한 형태인 데다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웅진을 택한 것은 지방세력의 영향력이 덜한 곳이었기 때문이며 웅진기 내내 백제 왕권의 제 1 과제는 귀족층과의 주도권 싸움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웅진기의 안습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동성왕과 무령왕에 이어 성왕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의 첫 발로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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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 도성의 계획성
부소산성이 소재한 부여군 일대는 사실상 사비기 백제와 관련된 유적의 밭인데, 부여군 내의 발굴조사를 종합해보면 대부분 유적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유지했다. 특히 불교가 성행했던 당시 상황처럼 부여에서는 정림사지, 능사를 비롯한 많은 절터들이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정림사지만 보더라도 가람배치의 방향이 굳이 어디가 앞쪽이고 뒤쪽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남북의 축선에 맞추었다. 그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도로유구들이 굉장히 많은데 중국식의 완벽한 도성제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동서남북 방향의 축선에 맞추었고, 건물지나 구획선 등도 다 정렬되었으므로 백제 특유의 도성제를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하 사비도성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나성(羅城)을 두어 도성으로서 구성을 갖추었고, 도성 내부는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구성하고 나성의 동쪽 바깥으로는 망자의 공간으로 능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사비기 석실 고분군들이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도 장축방향의 축선은 남북방향이다. 몇가지 도성의 구성요소들은 웅진기 시절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들을 통해보면 사비로의 천도는 매우 계획적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다면 부소산성, 그리고 제반 도성과 관련된 시설은 성왕 대의 기록인 538년 천도 당시에 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진작부터 계획을 세워 축성하다가 538년을 즈음하여 이미 완성된 곳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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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리 유적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 관북리 유적의 관북리 구역이라는 곳에서는 일종의 주작대로와 같은 대로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마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크기라는 점이 함정일 뿐.
4. 기타
부소산성은 매표소에서 2000원을 내야[4] 들어갈 수 있다. 내부에는 삼천궁녀가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낙화암이 있다.
관북리 유적 내부에는 구 국립부여박물관#s-6이 있던 건물이 남아있으며 현재는 부여군문화재사업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의 외관이 독특한데 김수근#s-2이 디자인한 건물이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나치게 일본풍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더 상세한 내용은 각 문서에 서술되었다.
여담으로, 부여여고 학생들이 종종 올라가고는 한다. 학교 내에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내려갈 때도 그 길을 통한다.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학교 내를 통해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