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1. 개요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산성으로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 웅진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공산의 산세를 그대로 살려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들쭉날쭉한 외형이 특징이다.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서쪽 문 금서루 말고도 성 곳곳에 크고 작은 정자들이 남아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북문인 공북루 인근의 땅에 마을이 조성되었고, 이 마을은 '성안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안마을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1997년까지 같은 곳에 있었으며, 마을은 이후 진행된 문화재 발굴 및 관광지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이후 발굴 및 정비작업이 진행되었고, 2015년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인근의 다른 백제시대 유적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건축물
2.1. 금서루
공산성의 서문. 사실상의 정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2.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
2.3. 연지, 만하루
2.4. 영은사
2.5. 임류각
2.6. 광복루
2.7. 영동루
공산성의 동문. 본래는 현판이 없었으나 2009년 공주시에서 이름을 공모하여 선정된 것을 현판으로 만들어 달았다.
2.8. 진남루
공산성의 남문.
2.9. 쌍수정
3. 발굴, 조사 내용
3.1. 성벽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다.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난 후 급하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하다.[1]
석성은 대부분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지만 일부는 백제 초축 당시의 성벽도 확인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아예 토성으로 형성된 구간이 있기도 하다.[2] 더군다나 공산성은 복원정비를 70~80년대에 이미 다 완료하였기 때문에 백제가 사용하였던 성벽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원래 백제시대에는 흙과 모래를 쌓아 건축한 판축식 건설로 만든 토성이었다. 일부 성벽을 절개한 조사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성의 남동쪽을 조사했다. 해당 조사에서는 토성이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삼은 당시 사용하였던 성벽이고, 지금의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축하면서 축소되어 남았다고 보았다.
비교적 최근인 2015년에 집중호우로 인해서 공산성의 북쪽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원인 분석 및 복원 정비조사와 더불어 백제 초축 당시의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조사로써 판축 기법으로 만든 토성임을 구체적인 증거로 알 수 있었다.
다만 웅진 천도 이전의 한성기 백제의 전형적인 축조방식과 비교해보면 공산성의 판축에는 잡석이 많이 포함되었고, 영정주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풍납토성#S-3.2이 대표적인 한성기 백제의 판축토성으로, 영정주공을 비롯하여 아주 깔끔한 판축으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비교하기에 적절하다. 또 사비기의 성곽들에서도 한성기의 판축기법들과 유사한 방법들이 정연하게 나왔는데, 사비의 외곽의 경계선인 나성이 대표적인 성곽이다. 공산성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의문점이 남았다.
그러한 이유로는 긴박했던 천도 당시의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또 조선시대에 공주 일대를 관리하는 관아를 두어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던 바 있어 그 당시의 성벽 개축 등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3.2. 추정 왕궁지
공산성에서는 성 내부에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건물지들이 발견되어 이 곳이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로 기능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벽건물지와 초석건물지를 비롯하여 전형적인 백제 목곽고, 비교적 큰 규모의 저장시설 등이 존재하고 있어 일단은 왕궁지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왕궁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추정 왕궁지의 범위 자체도 그렇고 규모가 굉장히 작다. 물론 백제가 한참 힘들던 시절의 임시수도인만큼 규모가 작을 개연성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제만한 규모의 나라의 궁성이 있었다기엔 너무 좁아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공산성의 왕궁지가 진짜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도 굉장히 많았으나 이렇다할 대안이 마땅치 않은 현실이다.
추정 왕궁지에 대해서도 왕궁이 맞다라는 견해와 임류각지가 왕궁이 있던 곳이라는 견해, 왕궁이 공산성 내부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공산성 내부라는 견해는 삼국사기에 "임류각의 동쪽에 궁궐이 있다"라는 기록에 기반하여 무왕 30년 사비도성 중수를 위해 임시로 웅진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통해서 궁궐은 공산성에 있다고 추정하였다. 더군다나 공산성 아래의 공주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인 제민천이 삼국사기에 범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당연히 공주 시내에서도 높은 곳인 공산성 내부에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였다.
하지만 반론으로 꼭 공산성 내부에 궁궐이 없더라도 기사 내용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며, 당장 사비의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의 관계를 비롯하여 고구려의 위나암성, 안학궁성, 평양성 등 산성 내부에 왕궁이 꼭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특히나 추정왕궁지를 왕궁으로 본다면 왕궁으로써 갖추어야할 제반 시설이 입지할 공간 자체가 부족한 문제를 비롯하여 임류각보다도 작은 크기의 추정왕궁지의 건물지들의 문제 등이 산적해 있으므로 지금의 공산성 내 추정왕궁지를 웅진기의 궁성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한편 이러한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로는 공산성의 남록 및 인근의 발굴이 실질적으로 어려운 점이 작용한 것도 있다. 공산성 남쪽 아래에서 행한 조사도 공산성 아래의 제민천이 과거 주된 범람으로 인해서 복개 및 관련 정비가 완비되어 실질적인 발굴조사가 어렵고, 범람원에 왕성이 들어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송산리 고분군이나 정지산 유적, 대통사지 등의 백제 왕실과 관련된 유적이 많기 때문에 공산성이 왕성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추정왕궁지를 놓고 보면 아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추정왕궁지가 정말로 왕궁이냐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입지가 여러모로 안습한 공산성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은 백제가 475년 고구려 남하로 일어난 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상황을 대변한다.
2019년 12월 27일에는 추정왕궁지 인근에서 궁궐의 문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이뤄진 흔적이 발굴되었다. 이 궁궐문의 발견으로 인해 웅진시대 왕궁성이 공산성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공산성은 왕의 피난처가 아닌 거주 왕성일 가능성이 커졌다. #
3.3. 성안마을
한편 북벽 안쪽의 평탄지는 수차례의 조사를 통해 백제, 신라,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반인들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칭 성안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물론 지금은 거주인구는 모두 성 밖으로 나갔으며 이 부지에서 주거지, 건물지, 우물지, 공방 등이 조사되었다.
성안마을의 우물지에서는 주칠된 명문이 써진 찰갑[4] 이 출토되어 백제의 특산품 중의 하나인 명광개의 실물이 출토된 것이라고 주목받았던 바 있다. 찰갑인지라 명문의 내용이 연속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였으며 출토된 몇 조각 조각마다 명문이 기록되었다. 명문의 내용은
로써 대략적인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정관 19년(645년)에 만들어진 것, 참군사 등의 관직명으로 추정되는 것들과 "이□은"이라는 이름이었다. 연대가 기록된 유물로서 백제의 멸망 시점과 관련된 유물이고 공산성에서도 치열한 전투 내지는 그 흔적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명문의 내용을 통해 주칠찰갑의 주인이 당나라인지 백제인지의 문제, 즉 소유주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백제에서 수출하던 명광개(양광개)로 당나라 연호가 쓰인 것이라는 견해[5] , 당나라 장수의 갑옷이기 때문에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다는 견해, 서체의 자유분방하므로 당이 아닌 백제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 새로 발견된 공노(孔奴)라는 글씨를 근거로 포획된 당나라 장수의 갑옷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가 개진된 바 있다.'□□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參軍事', ‘□作陪戎副', ‘□人二行左 ‘近趙□'
('□□행정관십구년사월이십일일’ ‘왕무감’ ‘대구전’ ‘□□서’ ‘'이□은□', '참군사', ‘□작배융부', ‘□인이행좌', ‘근조□')
그 밖에도 성안마을의 동쪽의 능선 위에서는 백제 특유의 저장시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성안마을과 왕궁지 말고도 성 내부에는 큰 규모의 조선시대 연지(우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그 내부에서는 금동여래좌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특히나 연지의 바로 뒤에는 영은사라고 하는 조선시대에 창건된 절이 아직도 남아 관련성이 돋보인다.
4. 기타
- 성곽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공산성 붕괴 사고 이후 잠시 통제되었다가 정비가 완료되면서 통행이 가능해졌다. 성곽의 경사가 생각보다 심하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 공주시민과 세종시민은 신분증을 지참하면 무료로 입장이 가능한데, 그래서인지 근처 시민들은 성곽길을 운동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 2019년 3월 주차장 자리에 관광안내소와 휴게실, 역사관 역할을 수행하는 방문자센터가 건립되었다. 본래 2020년 2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좀 늦어져 같은 해 7월 30일에 개관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갔다.
-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릴 즈음에 수문병 교대식 행사가 진행된다.
5. 관련 유적 및 주변 유적
- 공주 송산리 고분군 - 웅진 천도 기간 동안 형성되었던 백제 왕들의 무덤들. 아래의 무령왕이 이곳에 묻혔음이 확인된 바 있다.
- 정지산 유적 - 무령왕의 빈(殯)[6] 을 위해서 빈전을 설치하였던 장소. 실제로 발굴조사를 통해서 공산성 추정왕궁지에서나 보이는 대벽건물지를 비롯한 여러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의 북쪽에 위치한다. 최근에는 정비를 하면서 진입용 계단과 쉼터, 전망대를 조성했으며, 송산리 고분군과는 산의 능선을 통해 이어 놓았다.
- 수촌리 고분군 -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던 지방 세력의 고분군. 공산성과의 거리는 북쪽으로 약 수 km정도 떨어져 있다. 수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막대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유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서 전시 중에 있다. 왕도가 입지하기엔 비교적 협소한 공주를 택한 이유는 재지세력의 입김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근거 중에는 바로 공주 수촌리 고분군을 축조했던 재지집단의 문제가 있다. 문헌상으로도 웅진 천도 이후부터 대성팔족 중 해씨가 위세를 떨친다는 내용이 있고 문주왕이 살해당하기도 하는 등 웅진기 백제의 약해진 왕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대전광역시 월평동 유적 - 공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전에 위치하는 백제의 유적. 월평동 산성[7] 이 있는 같은 능선 상에서는 목책성이 확인되었다. 목책성의 초축은 백제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나 이후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는 점을 통해서 475년의 남하가 공주의 인근까지도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청원 남성골 산성[8] - 위의 월평동 유적과 성격의 거의 동일한 유적이라고 볼 수 있는 유적으로 마찬가지로 목책성이며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어 475년 고구려 남정이 청원 일대까지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월평동 산성, 남성골 산성과 더불어 공산성이 있는 공주 일대까지도 안정권이 아니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연기[9] 나성리 유적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었다.
- - 가루베 지온이 제시한 내용으로써 공주 공산성에서 이어지는 나성(羅城)[10] 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의 공주 구 시가지를 모두 애워쌓는 구조로써 고분들은 공주 나성의 외곽에 자리하고 내부로는 공산성을 비롯하여 사찰이나 주거지가 위치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지금은 실체 없는 헛소리임이 밝혀졌지만.. 다소 의외인 것은 가루베 지온은 공주 말고도 부여의 부여 나성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여 주장하였고 실제로 부여 나성이 도성의 생활공간과 망자의 묘역인 능산리 고분군과 그 주변 고분군을 구분하는 경계지점이기도 하였다. 더 첨언하자면 가루베 지온은 공주 교촌리에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로 만든 전축분을 조사[11] 하였는데 그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한동안 당연히 알못의 헛소리였구나 생각하였으나... 최근에 교촌리에서 실제로 전축분이 발견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 은개골 - 공산성과 옥녀봉성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기존에는 불법 건축물들과 농경지가 조성된 흉물이었지만 시에서 지역 전체를 문화구역으로 지정하고 2016년까지 토지매입을 완료, 이듬해부터 발굴조사를 시행했는데, 그곳에서 백제시대 나무방식창고(목곽고) 1동, 움집 4기, 기둥식 건물 2기, 움터(수혈유구) 2기, 고려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 3기, 주춧돌(초석)건물 1동, 조선시대 움무덤(토광묘) 1기 등 총 43기의 유구가 출토되었다. 이에 시는 유적을 정비하는 한편 이 지역을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하여 2018년 4월부터 2019년 5월까지 작업이 이뤄졌고, 같은 달에 은개골 역사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6. 같이 보기
[1] 천도하면서 쌓았다고 보기도 하지만 원래 있었던 산성을 활용했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나 공산성의 바로 서쪽에는 옥녀봉 산성이라는 작은 성이 있는데, 이 산성을 한성기에 먼저 축조된 성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2] 이 토성 구간으로 인해서 공산성은 2중성의 형태이기도 하다.[3] 출처 #뉴스기사[4] 주칠로 글씨가 써진데다가 옻칠이 되어 있어 칠갑이라고도 한다. 보고서가 아직 간행되지 않아 정확한 명칭은 없고 주칠칠찰갑, 칠찰갑 등으로 불린다.[5] 백제는 당시에 연도표기를 60갑자로 했다.[6] 금수산태양궁전에 놓인 김정일 시신마냥 빈전을 짓고 안치하여 염을 하고 몇년간 제사를 지내는 것. 당시에는 빈을 위해서 얼음을 사용했다고 한다. 빈전(殯殿)은 하는 것은 빈을 위해 만든 전각을 뜻한다.[7] 월평동 산성과 월평동 유적은 성격은 성곽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엄밀히 다른 유적이다. 월평동 산성은 석축 산성이고 월평동 유적은 월평동 산성이 있는 산의 능선 남쪽에 있는 백제의 목책이 확인된 복합유적이다.[8] 현재는 세종시지만 보통 청원 남성골 산성이라고 표기하여 이를 따라 표기함.[9] 역시 지금은 세종시다.[10] 도성(도성)의 최 외곽을 구성하는 성벽, 대표적인 예로 부여 나성이 있다.[11] 이 역시 자신이 주장한 공주 나성의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망자와 생자의 공간을 구분하는 공주 나성의 주요한 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