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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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의 동쪽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3개의 무덤군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사비 시대의 백제 왕릉원으로 알려져 있다. 총 7기의 왕릉급 고분과 동쪽에 5기 서쪽으로 몇 기의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모두 도굴당하여 소수의 금제, 금동제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익산시 쌍릉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무왕과 선화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비시대 백제왕들은 이곳에 묻혔다고 추정하고 있다. 물론 무령왕릉의 지석처럼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무덤의 시대별 양식 변화나 출토품의 양상을 연구한 결과 정황상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바로 옆에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사지와 사비의 외곽성인 나성이 있다. 능산리 고분군 입장료를 내면 세트로 구경이 가능하다.
2. 발굴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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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 고분분포도[출처]
현재 능산리 고분군은 사적으로써 정비된 능산리 고분군과 그 서쪽의 의자왕의 가묘 뒤쪽으로 확인된 능산리 서고분군, 능산리 고분군의 동쪽 편에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해서 알려진 능산리 동고분군으로 구분되어 진다.
먼저 가장 중앙의 '''능산리 중앙고분군'''이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알려진 고분군으로 처음에는 6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6기가 2×3으로 정돈되어 분포하고 있어서 '''서·중·동 + 상·하'''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 능산리 중앙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구로이타 가쓰미,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서 동하총, 중상총, 서하총이 조사되었다. 2년뒤인 1917년에는 야쓰이 세이치, 오바 츠네키치, 오가와 게이키치 등이 동하총, 중상총, 동상총을 조사하였다. 해방 이후인 1971년 사적 정비 과정에서 가장 뒤쪽에 혼자 입지하고 있는 7호분이 추가로 정비되었다.
'''능산리 동고분군'''은 이후 1937년에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이미 완전히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에 유물은 관파편, 관못, 금조각 등 극소량의 유물만이 수습되었다. 현재는 민가가 들어서 있지만 이 역시 정비 복원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서고분군'''은 비교적 늦게 조사된 편이다. 중앙 고분군의 조사 보고가 이루어진 1917년도의 조선고적도보에서는 서쪽에도 4기의 왕릉급 고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백제 석실의 특성상 봉분이 뚜렷하지 않아서[1] 명확히 찾고 있지 못하다가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대적인 백제, 신라의 왕도 유적에 대한 국책사업이 정해지면서 일련의 조사들이 실시되었다. 2016년에 서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서 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참고
3. 출토유물
조사 이전 이미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은 거의 없다. 중상총(5호분)에서 당시의 옷조각, 목관파편, 금동투조금구, 금동 꽃무늬 모양금구, 중하총(2호분)에선 금동관못 등, 7호분에선 관장식용 금조각, 금박못, 쇠못, 금사, 관파편, 불탄 나무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극히 소량만이 발견되었지만 관못과 금동유물등을 볼때 이 곳 무덤에도 공주 무령왕릉 못지않은 많은 유물이 묻혀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4. 조사 내용 및 주요 고분
송산리 고분군이 축조되는 시점부터 점차 중국, 특히 남조의 묘제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무덤 형태를 송산리형 석실이라고 하는데, 능산리 고분군이 형성되는 시점부터는 능산리형 석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실의 길이, 연도의 길이, 전체적인 무덤의 폭, 석재의 가공 방식, 현실의 단면구조 등이 바로 위의 중상총의 도면처럼 표준화된 규격을 갖는 형태를 '''능산리형 석실'''이라고 한다.
고고학적인 정황으로의 능산리 고분군의 특징은 체계화된 도성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능산리 고분군이 입지하는 고분의 방향 자체도 남북방향이며 실제로 묘도의 입구도 남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능산리 중앙, 동, 서 고분군이 모두 해당하는데, 왕묘역인 능산리 고분군의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염창리 고분군, 능안골 고분군 등의 왕 및 왕족 아래의 귀족계층의 무덤들도 능산리 고분군처럼 동일한 입지에 형성되어 있다.
부여 나성의 동문 밖으로 능사를 비롯하여 능산리 고분군,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고분군 등의 배치상은 가도(가도)를 따라 배치된 것으로 도성의 동쪽을 묘역으로써 의도적으로 규정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무덤이 갖는 함의가 망자의 위세를 후대에 표출함이 목적이듯 도성의 동문으로 출입할 때에는 왕 및 상위계층의 무덤이 산을 따라서 잘 조망되었을 것이다. 일정한 의도와 계획 속에서 부소산성, 부여 나성, 능산리 고분군 등이 조영되어 사비기의 도성의 체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4.1. 능산리 중앙 고분군
4.1.1. 동하총(1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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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총의 도면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유명한 고분이다. 바로 능산리에서 유일하게 사신도 벽화가 그려진 무덤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송산리 6호분과는 다르게 굉장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채색되어있어 백제 그림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신도는 천수백년간 밀폐된 무덤에서 보존되어왔지만 고분을 개방함과 동시에 빠르게 퇴색되어 현재는 많이 손상되어 있다. 이에 고분을 영구폐쇄하고 능산리 모형 전시관에서 동하총의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송산리형 석실의 특징으로써 전실묘에다가 사신도를 그려 장식하는 것이 동하총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또한 능산리형 석실의 전개 과정상 석실의 단면이 사각형에서 육각형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견해가 많다. [2] 그렇기 때문에 동하총의 상대적인 순서는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도 비교적 빠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사비시대 중후반의 굴식돌방무덤 형식이라는 점과 사신도가 그려져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위덕왕릉으로 추측하고 있다. 맨위의 전경 사진 중 고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보이는 곳이 바로 이 동하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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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중하총(2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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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하총의 도면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송산리 고분군의 천장을 아치형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이 무덤에 남아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축조되었으리라 생각되고있다. 단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재료가 벽돌에서 돌로 바뀌었다는 것이다.(벽은 장대석으로 만들었다) 제일 먼저 축조됐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사비로 천도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성왕릉으로 추측하고있다.
4.1.3. 서하총(3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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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총의 도면
능산리형 석실의 전형적인 형태로써 치밀하게 가공된 대형의 판석 1~2매로써 벽을 구성하고 묘도도 매우 짧아진다. 아래의 ㅇㅇ총의 도면과 비교해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4.1.4. 서상총(4호분)
4.1.5. 중상총(5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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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총의 도면
4.1.6. 동상총(6호분)
4.1.7. 7호분
원래 능산리 고분군에는 왕릉급고분이 6기밖에 없는 줄 알았으나 후에 7호분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7개로 늘어났다. 위치는 이전에 알려진 6기의 고분들보다 북쪽으로 몇 m정도 떨어져서 위치하고 있다. 다른 무덤들과 크기가 똑같은 것으로 보아 왕 또는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조사 이전 도굴당해 유물은 얼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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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중상총, 쌍릉 소왕릉, 능산리 7호에서 출토된 도금 투금구
4.2. 능산리 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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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분군 1호분의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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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분군 4호분의 도면
능산리 동고분군 4호의 경우 전형적인 능산리형 석실과는 작은 차이점이 있다. 바로 천정부의 형태인데, 전형적인 능산리형 석실들은 판석(板石) 3~4매 정도를 사용하여 평편한 천장의 형태이다. 반면 동고분군 4호분은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서 천장을 마감한 형태다. 사소한 차이이지만 송산리형 석실의 특징을 일부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능산리 동고분군 4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능산리 고분군 가운데서도 비교적 빠른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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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분군 5호분의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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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분군 2호분의 북벽. 동고분군 2호분은 도면이 제작되지 않았다.
4.3. 능산리 서고분군
4.3.1.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
이 ( )은 능산리 고분군 입구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다보면 나온다. 이곳엔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가 있는데, 이 고분군에 있는 무덤 중 백제 당대가 아닌 현대에 백제 양식을 참조해 새로 만든 둘뿐인 무덤이다. 북망산에 묻힌 이들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유해 귀국하려고 시도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다.[3]
의자왕이 이곳에 돌아와 다시 잠들기 전까지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의자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의자왕 참조)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낙양성 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한다. 1920년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이 먼저 출토되었고 후에 1995년 부여군은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찾고자 하였다. 결국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시신, 목관의 흔적과 지석은 찾을 수 없었다. 의자왕 묘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북망산은 이미 오랜 중국의 혼란기를 거치며 도굴로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중국은 동릉 도굴 사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당장 관리인력이 상주하고 있던 청나라 황제릉도 군벌이 폭탄을 동원해 도굴할 정도로 극심한 혼란기를 거쳤다. 의자왕 바로 옆에 묻혔다던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나,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의 무덤에 도굴갱이 훤히 뚫려있었으니 진짜 의자왕릉은...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하다.
결국 중국으로부터 부여융 태자의 묘지석 복제품과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퍼서 2000년에 한국으로 가져왔다. 이후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능산리 고분군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백제의 장례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을 관과 함께 각각 의자왕릉과 부여융묘에 매설하였다. 의자왕이 백제를 떠난 지 1,340년만에 선대 왕들과 나란히 같은 장소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의자왕의 무덤에는 '''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라는 비석이, 그 옆에 있는 부여융의 무덤에는 '''백제국부여융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두 사람의 간략한 일대기가 써 있다.
4.3.2. 능산리 7~10호분
최근에 들어 의자왕의 가묘 뒤의 구릉에 산지의 경사면을 따라서 4기의 백제 석실이 조사되었다. 이중 2기는 왕릉급으로 추정되며 치밀하게 가공된 석재로 축조된 능산리형 석실이다. 게다가 무령왕릉과 같은 금송목관파편이 발견되어서 분명한 왕족의 무덤일 것이라 생각된다.
능산리 고분군은 지금의 메인 고분군 말고도 일찍이 의자왕의 가묘라는 식으로 서쪽의 고분군에 대해서도 존재가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 그 밖에도 소위 "동구릉"이라고 부르는 능산리 동 고분군의 존재도 전해져 왔으나 해당 지역에 민가가 있어 조사의 난점이 있어왔다. 이후 2017년 박근혜 정부에 의해서 백제왕도 복원정비사업이 진행되면서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도 체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동쪽 고분군에도 능산리 중앙 고분군과 같은 양상의 왕릉급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현재 능산리 고분군은 알려진 능산리 고분군만이 아니라 그 양 옆 동서로 배치된 동·서 고분군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참고
4.4. 능산리형 석실
공주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대표적인 송산리형 석실로써 벽돌로 만들었다는 의미의 전실분이라고도 한다. 무령왕릉은 묘지명이 출토되어 왕비가 사망할 때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시간적인 기준이 된다. 석실의 형태 또한 양나라의 형태를 따르는 무덤이기도 하다. 송산리6호는 무령왕릉과는 달리 연도(묘도, 무덤길)가 이중의 형태로 구성된 것으로 무령왕릉에 비해서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6] 꼭 벽돌로 쌓는 것이 아닐지라도 위와 같은 형태의 양상으로 만들어지는 석실을 송산리형 석실이라고 한다.
송산리형 석실이 웅진기의 석실을 대표한다면 능산리형 석실은 사비기의 석실을 대표하는데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송산리형 석실에서 능산리형 석실로 변화한다는 순서를 설정하였다. 그러한 근거들로는 송산리 6호분에서 확인되는 이중의 연도, 연도의 높이보다 높은 현실의 높이가 있으며, 능산리 1호분인 동하총은 시상대(屍床臺, 시신이 안치된 관을 올려두는 곳)가 벽돌(塼)으로 구성된 점, 송산리 6호분처럼 사신도의 벽화가 장식된 점 등을 통해서 송산리형 석실에서 능산리형 석실로 계기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능산리형 석실의 송산리형 석실과 구분되는 특징으로는 앞선 송산리형 석실에 비해서 묘실의 크기가 작아지고 대부분 묘실의 단면이 육각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후 완연한 능산리형 석실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시점부터는 묘실의 벽을 만드는 가공방식이 점차 정교해져서 길다란 돌(장대석)로 묘실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거대한 몇 매의 판석으로 벽 전체를 만드는 것으로 변화한다.
연도 또한 위에서 서술한 2중 구조의 연도는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나중에는 묘도의 길이가 현실의 길이보다도 훨씬 짧아진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능산리형 석실은 사비기 백제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주요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6세기를 전후한 이 시점부터는 이전 한성기, 웅진기 시절에 각 지방마다의 다양한 묘제와 장법 등을 사용하던 지역이 모두 이러한 형태의 능산리형 석실로 규격화되고 통일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위의 본문에도 짧게 나오지만 능산리형 석실 자체가 갖는 계층성 및 출토유물, 특히 은화관식(銀花冠飾)이라고 불리는 신분을 표징하는 장식품 등이 능산리형 석실에서 출토되면서 고고학자료를 통한 정치사회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한 주요한 내용은 요약하면 사비기로 옮겨오면서 백제의 각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가 통일화되었다는 증거로보아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앞선 시기에 비해서 현격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구 마한지역은 고유의 장례법 및 묘제를 사용하는 전통을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능산리형 석실의 마한 고지에서의 등장은 그러한 전통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백제 중앙의 왕족 및 귀족, 신하계층이 사용하는 장례방식을 강제한 것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에서는 능산리형 석실을 채용하면서도 각 지역마다의 독특한 지역색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사비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기도 하다.
능산리형 석실은 이 능산리 고분군 말고도 부여군 염창리, 능안골 등지에서도 넓게 확인이 되며 그 수량도 매우 많고 고분군 전체가 능산리형 석실을 채용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이처럼 능산리형 석실은 통일화, 제도화, 규격화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능산리형 석실이 사비시기의 백제의 행정력 및 정치력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써 매우 중요하다.
5. 관련 주변 유적
- 능산리 사지, 능사
능산리 고분군의 서편에 위치한 절터로, 정릉사처럼 왕족의 혼을 기리기 위한 능사로 지어진 절로 추정된다. 가람은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을 취하고 있으며, 강당 옆 서쪽 부속건물지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절터 가운데의 목탑터에서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발굴되었다. 본래 이 절터위에 능산리 사지를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여러가지 사정때문에 백제문화단지에 1:1 사이즈로 복원을 해놓았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 부여 나성(동문)
사비도성은 크게 2개의 성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왕성인 부소산성(+관북리 유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비도성 전체의 동쪽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이다. 참고로 서쪽은 백마강이 돌고 있기 때문에 천연 해자기능을 하고 있어서 나성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편 북망산처럼 왕들을 비롯하여 귀족층의 무덤들이 사비도성의 동문으로 들어오는 길의 북쪽 산의 남사면을 따라서 능산리 고분군처럼 균일하게 입지하고 있다. 특히 능사 및 능산리 고분군은 나성의 동문의 바로 앞인데, 고대의 경관을 추적해보면 동문을 통해서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람들은 왕가의 계곡마냥 형성된 여러 능산리의 왕묘들을 항상 보아야하는 구조이다. 사비도성의 경관에 대해 분석해보면 이러한 계획적인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6. 같이보기
[출처] http://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327734[1] 지금의 봉분들은 정비과정에서 약간 크게 만든 것으로 원래의 백제 석실들의 봉분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2] 반대로 육각형에서 사각형으로 변화한다는 견해도 있긴 하다.[3] 원래 보훈대상자 중 해외에 안장된 인물들을 국내로 유해귀국 시키는 주체가 국가보훈처인데, 독립운동가와 6.25 참전용사 챙기기도 바쁜 정부부처가 북망산에 묻힌 역사적 인물까지 신경쓸 수 없다. 게다가 역사적 인물들은 대한민국 법률에 의한 보훈대상자가 아니다.[4] 축척은 완전히 동일하진 않다는 점을 참고하고 도면을 볼 필요가 있다.[5] 山本孝文(야마모토 타카후미)의 논문을 참고하였으며 이 분류안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큰 틀에서는 동의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연구자마다의 다른 견해가 있기도 하다.[6] 무령왕릉도 연도와 묘실 사이에 구분되는 부분이 뚜렷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부분이 송산리 6호분에서는 더 크게 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의 도면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국립공주박물관에 무령왕릉을 복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