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항로

 


1. 개요
2. 역사
3. 기대 효과


1. 개요


[image]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는 북대서양에서 북아메리카 북쪽 캐나다 부근의 해안을 따라 베링 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항로이다. 이에 대비해서 북대서양에서 유라시아 북쪽 러시아 인근 해안을 따라 베링 해협으로 이어지는 항로는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 북극해항로(Northern sea route) 또는 북극항로로 칭한다.
북서, 북동이라는 방위의 기준은 여러 탐험 및 항로 개척의 본거지였던 유럽 및 북대서양이다. 한국이나 북태평양 기준으로는 오히려 북서항로가 북동쪽, 북동항로가 북서쪽에 해당한다.

2. 역사


15세기 즈음에 영국에서 원활한 항로 개척을 위해 뱃길을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영국은 중국과 그 아래의 인도와 교역하려 했으나, 당시 영국 주변의 바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무역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헨리 8세[1]부터 16세기 말[2] 까지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존 캐벗, 길버트, 존 데이비스 등의 탐험가들이 나섰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데이비스는 그린란드의 서쪽 부근에서 데이비스 해협을 발견하는 등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을 탐험하여 더욱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헨리 허드슨은 북서항로 탐색 과정에서 허드슨 강을 거슬러올라 올버니까지 도달하고 이후에는 허드슨 만까지 도달했지만 1611년 선상반란으로 배에서 추방된 후 실종되었다.
한편, 태평양 방면에서도 존재할지도 모르는 항로를 찾기 위해 북아메리카 북서쪽 해안이 샅샅이 조사되었고 베링 해협과 밴쿠버 섬이 확인되었다.
1845년에는 존 프랭클린의 탐험대가 북서항로에서 실종되어 광범위한 수색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로버트 매클루어에 의해 대서양-태평양을 바다로 잇는 북서항로의 존재가 확인되고 최초로 일주가 이루어졌다. 단, 매클루어가 발견한 항로는 얼음으로 인해 통행이 불가능해 배에 고립되어 3년이나 구조를 기다려야 했으며, 결국 배를 버리고 썰매로 이동해야 했다.
이후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노르웨이의 전설적인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최초로 배를 통해 북서항로를 일주하는 데 성공했다.

3. 기대 효과


북동항로가 로테르담 등 유럽의 항구를 부산, 상하이, 요코하마 등 동아시아와 더 짧은 거리로 잇게 된다면, 북서항로는 동아시아와 뉴욕 등 북미 대서양 연안의 항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키게 된다. 부산-뉴욕 항로 기준으로 파나마 운하 경유의 기존 항로에 비한 단축효과가 약 2500해리에 이르며[3], 이는 수에즈 운하 항로 대비 북동항로의 단축효과인 약 3000해리에 근접한다. 또한, 로테르담 등 유럽과 샌프란시스코 등 북미 태평양 연안 사이의 항로 단축도 가능하다. 베링 해협을 거쳐야 하는 것은 북동항로와 똑같기에 북동항로 대신 유럽-아시아 운송 항로로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도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캐나다 북극 제도 주변의 해도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얼음도 북동항로보다 불규칙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등 러시아의 핵추진 쇄빙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북동항로에 비해 이용이 어려운 편이다. 인구밀도 또한 러시아 북극해 연안은 백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아르한겔스크, 무르만스크 등 나름 규모 있는 도시도 존재하는 반면 캐나다 쪽은 유콘, 노스웨스트, 누나부트를 다 합쳐도 12만 명에 불과해 근본적인 개발도에서 차이가 심하다.
[1] 1400년대 말[2] 1587년[3] Dongqin Lu et al., International Journal of e-Navigation and Maritime Economy, 2014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