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캐벗
John Cabot(영어)
Giovanni Caboto(이탈리아어)
Zuan Chabotto(베네토어)
1450? ~ 1499?
이탈리아 제노바 혹은 나폴리 출신의 탐험가. 영국에서 활동한 탓에 이탈리아식 이름인 조반니 카보토보다는 영국식의 존 캐벗이 훨씬 더 알려져 있다. 정작 본인은 주안 샤보토라고 베네치아 사투리로 이름을 사용했다.
1476년 베네치아의 시민권을 획득한 후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 그는 중동지역에서 노예무역에 참여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지식을 얻어나갔다. 1484년 결혼하였으나 곧 재정난에 빠졌고, 1488년 발렌시아로 이주했다. 이주 후에는 항구 개선에 대한 안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되었고, 1494년에 세비야로 이주했다. 세비야에서 다리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의회의 거부를 맞고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이러한 각종 사업의 실패를 이유로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이주 후에는 브리스톨에 머무르며 항해 준비에 나섰다. 캐벗은 '''위도가 높을수록 항해거리가 짧아질 것'''[1] 으로 믿었기에 영국은 그의 항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당시 영국은 켈트족 전설에 있었던 브라질 섬[2] 을 찾기 위한 함대를 약간씩 보내고 있었는데. 이 함대들의 출발지도 브리스톨이었다. 그는 이탈리아계 상인들의 추천장과 함께 헨리 7세의 지원을 받아 1496년경부터 항해에 시작하게 된다.
그의 첫 항해는 기상악화와 보급품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후 두 번째 항해는 브리스톨을 출발, 아일랜드를 거쳐, 1497년 6월 24일 뉴펀들랜드의 보나비스타 곶에 도착했다. 이로써 그는 바이킹 이후 북아메리카에 당도한 첫 유럽인이 되었다. 다만 이 때 사람의 거주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깊은 탐사를 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조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도'에 도달했다고 착각했던 콜럼버스보다 북쪽으로 왔으니, 이곳이 중국의 일부라 믿었다. 어쨌든 그들이 New Found Land라 불렀던 그 곳은 곧 지금의 지명이 되었다.
이후 1498년에 세 번째 항해를 실시했으나 기록이 많지 않아 그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대략 1498년 출항 후 1500년에 런던으로 귀항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 이후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존 캐벗의 업적을 기려 브리스톨, 뉴펀들랜드, 런던, 몬트리올, 피닉스 등에 캐벗 거리, 캐벗 광장 등이 존재하며, 뉴펀들랜드 보나비스타 곶과 브리스톨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편 존 캐벗의 아들 서배스천 캐벗 역시 탐험가로 북서항로를 찾으려 노력했다.
대항해시대 3에서는 주인공의 경쟁자로 등장하여 이누이트를 발견한 인물로 나온다. 역사대로 북해 인근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칠 수 있다.
Giovanni Caboto(이탈리아어)
Zuan Chabotto(베네토어)
1450? ~ 1499?
이탈리아 제노바 혹은 나폴리 출신의 탐험가. 영국에서 활동한 탓에 이탈리아식 이름인 조반니 카보토보다는 영국식의 존 캐벗이 훨씬 더 알려져 있다. 정작 본인은 주안 샤보토라고 베네치아 사투리로 이름을 사용했다.
1476년 베네치아의 시민권을 획득한 후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 그는 중동지역에서 노예무역에 참여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지식을 얻어나갔다. 1484년 결혼하였으나 곧 재정난에 빠졌고, 1488년 발렌시아로 이주했다. 이주 후에는 항구 개선에 대한 안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되었고, 1494년에 세비야로 이주했다. 세비야에서 다리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의회의 거부를 맞고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이러한 각종 사업의 실패를 이유로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이주 후에는 브리스톨에 머무르며 항해 준비에 나섰다. 캐벗은 '''위도가 높을수록 항해거리가 짧아질 것'''[1] 으로 믿었기에 영국은 그의 항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당시 영국은 켈트족 전설에 있었던 브라질 섬[2] 을 찾기 위한 함대를 약간씩 보내고 있었는데. 이 함대들의 출발지도 브리스톨이었다. 그는 이탈리아계 상인들의 추천장과 함께 헨리 7세의 지원을 받아 1496년경부터 항해에 시작하게 된다.
그의 첫 항해는 기상악화와 보급품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후 두 번째 항해는 브리스톨을 출발, 아일랜드를 거쳐, 1497년 6월 24일 뉴펀들랜드의 보나비스타 곶에 도착했다. 이로써 그는 바이킹 이후 북아메리카에 당도한 첫 유럽인이 되었다. 다만 이 때 사람의 거주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깊은 탐사를 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조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도'에 도달했다고 착각했던 콜럼버스보다 북쪽으로 왔으니, 이곳이 중국의 일부라 믿었다. 어쨌든 그들이 New Found Land라 불렀던 그 곳은 곧 지금의 지명이 되었다.
이후 1498년에 세 번째 항해를 실시했으나 기록이 많지 않아 그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대략 1498년 출항 후 1500년에 런던으로 귀항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 이후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존 캐벗의 업적을 기려 브리스톨, 뉴펀들랜드, 런던, 몬트리올, 피닉스 등에 캐벗 거리, 캐벗 광장 등이 존재하며, 뉴펀들랜드 보나비스타 곶과 브리스톨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편 존 캐벗의 아들 서배스천 캐벗 역시 탐험가로 북서항로를 찾으려 노력했다.
대항해시대 3에서는 주인공의 경쟁자로 등장하여 이누이트를 발견한 인물로 나온다. 역사대로 북해 인근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