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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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z Canal / قناة السويس
'''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완공된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로, 이집트 영토를 가로지른다.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1]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나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 →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 →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끄트머리 희망봉에 도착 → 인도양 도착 → 목적지 도착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배가 아프리카 대륙을 도는 데만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장소의 폭은 굉장히 협소하고 북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즉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바로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운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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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왕조 때도 필요성은 있다보니 운하를 파려고 했으나 당대 이집트가 전세계에서 최고의 건축 및 토목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술력으로는 지금처럼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을 파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위 사진처럼 나일강의 하류의 최동단 지류에서 투밀라트 계곡, 대염호수 등을 통해 동쪽으로 수에즈까지 연결하여 지중해와 간접적으로 잇는 방식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다만 바다와 강을 완전히 연결하지는 않았고 중간에 육지에서 배를 끌어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가장 처음 도전한 건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BC 19세기)로 실패했다고 하고, 하트셉수트(B.C.15세기)와 람세스 2세(B.C.13세기) 역시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측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코 2세(Necho II B.C. 8세기)가 B.C. 609년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나일강과 대염호수(Great Bitter Lakes)[2] 와 홍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도하였으며 12만 명의 인명피해 끝에 완공을 눈 앞에 두었으나, 이 운하가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포기하였다고 한다. 네코 2세는 또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걸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얼마 후에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시대에는 완공을 해서 페르시아로부터 원활하게 운용됐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3단 갤리선(Trireme)들이 노를 펴고 서로 교차통행이 가능한 넓이로 횡단에 4일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이를 기념하는 비석 5개를 남겼는데 지금도 4개가 남아있다.
이후 홍해와 만나는 운하 종점에 남겨진 비석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270~26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때 정비&재개통되었으며, 이후로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2세기 초) 시기를 거쳐, 정통 칼리파 우마르 시기까지 홍수와 침니(沈泥) 현상으로 운하가 막히거나 파괴되고 이를 재개통&운영하기를 반복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약 1000년간 운하는 이집트 농산물 등이 아랍 등지로 수송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알 만수르 치세이던 767년, 그의 삼촌 압달라의 반란 방어과정에서 이 고대 운하는 완전히 막혀버렸으며,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팔 때 작업자들의 식수 공급과 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Sweet Water Canal: 가장 위의 지도의 서쪽에서 팀사호수로 연결된 수로)를 뚫을 당시에 이 고대 운하의 잔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후 15~16세기에 운하를 다시 개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먼저 1488년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까지 다다르자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 것을 우려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섰지만, 맘루크 왕조와 협상이 벌어지는 단계에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1565~1579년까지 오스만의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다시 개통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계획 단계에서 불발됐다. 루이 14세나 나폴레옹도 운하 개설 조사를 했지만 포기했다.
오늘날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의 주도로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 공매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건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로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되어 있던 중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의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였고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총 40만 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이를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천주에 달하는 프랑스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기타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어할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 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감히 프랑스가 영국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것을 가만 보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와 사이드 파샤에 대한 직접적 압력은 물론이고, 형식적으로 이집트의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도 압력을 넣었으며 수에즈 회사의 주식구입 권유도 단칼에 거절하고 다른 나라들이 해당 주식을 사는 것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당대 최강 대영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다른 나라들(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등[3] ) 이 수에즈 회사 주식 구입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17만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쓰게 되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방법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때문에 레셉스가 "'''영국 니들도 인도에서 똑같은 짓 하잖냐!'''"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회사이며 이집트 소유이고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뉴포트(Newport).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 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용자짓을 저질렀고, 운하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뭐라 항의도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행위를 했다며 비판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놈들에게 대영제국 해군의 기상을 보여줬다며 칭찬받았다고.
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국제적 명성을 얻지만 1880년 파나마 운하 공사(문서 참고)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한다.
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만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프랑스가 이겼으면 모를까 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의 이집트 정부였으며, 그 이집트 정부의 최대 스폰서는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영국이 방해한 거였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수에즈 운하를 적극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퇴위했던 것이다. 뒤이은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기고, 또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사이드 파샤는 눈앞에 닥친 재정 폭탄을 피하고, 또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보유 지분 17만 주를 통채로 시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시장에 내놓은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 주를 통째로 매입한 건 '''영국 정부'''였다.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인도,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크게 단축되는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유사시 인도와 중국에 최대한 빨리 군사력을 투입할 수단이 필요해진 것이다. 다만 '''앙숙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를 지었고 그 운영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전쟁 여파로 프랑스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고, 수에즈 운하가 프랑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영국은 즉시 지분 확보라는 방법으로 운하 운영권을 노린 것이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주도했는데 이때 있었다는 야사가 유명하다. 디즈레일리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연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400만 파운드의 자금을 부탁했다. 이에 로스차일드 측에서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영국 정부입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의 주인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다만 영국도 운하 운영권 획득에서 타 열강, 특히 건설 당사자인 프랑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이집트와의 주식 양도 계약은 프랑스 몰래 이뤄졌다. 덕분에 의회에서도 사후 승인을 받아야했고, 의회가 어깃장을 놓으면 계약이 취소될 수 있었지만 '''영국 하원은 열렬한 박수갈채와 함께 주식 매입안을 통과시킨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1882년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벌어지자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그 뒤부터 수에즈는 영국의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는 영국이 수에즈 운하 통행을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개월의 여정을 해야 했고 결국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카더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 출처. 나중에 추가로 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잘 통과했다. 게다가 그 무렵 일본 해군이 보유한 전함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향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4] 출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군대 주둔을 합법화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은 이전 수에즈에 관한 조약을 모두 무효로 돌리고 완전히 운하의 소유권을 자신들의 손에 넣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수에즈는 커녕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막히고 만다.
종전 후 이집트가 완전히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뒤 이집트는 이전 조약에 따라 수에즈를 되찾기 위해 주식을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에즈 운하가 완전히 이집트에게 국유화된다. 이에 수에즈 운하를 얌전히 빼앗길 생각이 없었던 영국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5]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집트는 전쟁에서 졌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고 여타 중동국가들이 이쪽으로 기울자 중동에서 친소련파 정권의 득세를 경계하던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주저앉히고 이스라엘에도 경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물러나야 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으로 인해 서방 세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미국에게 빼앗겼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버려 운하가 폐쇄[6]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마지막 확장 공사는 2015년에 있었고,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2008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아덴 만 일대에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고 있지만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줄어들 기미는 없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는 루트는 워낙 거리와 시간 면에서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다만, 해적질이 더욱 기승을 부려 보험료 할증이나 보안업체 고용비용 같은 부가비용이 급증한다면 수에즈 운하 통행을 포기하는 선주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나 정작 최근에는 소말리아 해적의 활동이 위축된 반면에 서사하라 일대의 해적질이 급증하여 희망봉 우회가 반드시 안전한 루트가 아니게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세계의 해운업계와 무역업계가 부담한 추가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현재의 달러 가치로 하면 매년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2009년 한 해 동안 여기를 통과한 배만 해도 22,183척에 달하고 통과료로 받은 돈만 해도 54억 1천만 달러에 이른다. 척당 평균 통과비는 대략 25만 달러이다. 이는 이집트의 2009년 GDP $4,531억 달러에서 1.3%에 이른다. 과거에나 현재나 여전히 이집트의 돈줄인 셈이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북극해의 얼음이 계속 줄어들면서 이 곳과 말라카 해협을 거치지 않고 부산에서 베링 해협과 북극해를 통과해 유럽까지 가는 북극항로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배들이 늘고 있다. 유가하락[7] 과 운하 이용료 상승[8] 으로 아프리카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수에즈 운하 직원들의 횡포가 심각한데, 기념품을 강매하거나 세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배들이 이를 견딜수가 없어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13.5노트의 속도로 운항할 경우 11일 더 걸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껏 뚫은 운하 대신에 콜럼버스 시대의 항로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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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6일(현지시각) 제2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열렸다.이를 통해 수에즈 운하의 하루 통행량이 2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집트 정부는 물동량 증가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로 제2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다만 실제 사용은 2016년부터 했다. 2015년에는 준공식을 했지만 시범운행을 하고 2016년 9월 1일부터 제2 수에즈 운하에 외국 선박의 통항이 허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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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모두 확장공사를 통해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폭을 갖추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2016년 확장공사 완료 전까지 운하 폭이 33 m밖에 안 되어 통행 가능한 선박의 규격 제한이 있었던 반면 수에즈 운하는 그전부터 갑문이 없고 폭이 상당히 넓어 규격이 다소 느슨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규격은 수에즈맥스(Suezmax)라고 하는데 길이에 제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면 위 높이 68 m, 단면적 1006 m2(흘수선 20.1 m-선체폭 50 m 또는 흘수선 12.1 m-선체폭 77.5 m)로 넉넉한 수준이다.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박은 물론 항공모함도 통행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배가 수에즈맥스 이하인 것은 아니라 화물 적재량이 30만 톤을 넘어가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흘수선이 깊은 대형 광석운반선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톤수는 약 16만 DWT 정도에 해당한다.
또 수에즈 운하 양안을 잇는 수에즈 운하교가 2001년에 개통되어 운하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통과 높이 제한이 새로 설정되었다. 이 다리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 나머지 도로는 수에즈 운하 양안에서 끊겨 있고 끊긴 구간은 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선이 운하를 횡단한다. 수에즈 근처에는 하저터널로 건너는 구간도 있다.
이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지중해와 홍해의 바다 생태계가 만날 가능성이 적었지만, 개통 후에는 홍해의 생태계가 운하를 따라 조금씩 북쪽으로 이동하고, 결국은 지중해까지 이르러서 운하 근처의 지중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
1. 개요
Suez Canal / قناة السويس
'''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완공된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로, 이집트 영토를 가로지른다.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1]
2. 필요성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나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 →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 →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끄트머리 희망봉에 도착 → 인도양 도착 → 목적지 도착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배가 아프리카 대륙을 도는 데만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장소의 폭은 굉장히 협소하고 북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즉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바로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운하가 필요했다.
3. 역사
3.1. 고대 수에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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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왕조 때도 필요성은 있다보니 운하를 파려고 했으나 당대 이집트가 전세계에서 최고의 건축 및 토목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술력으로는 지금처럼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을 파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위 사진처럼 나일강의 하류의 최동단 지류에서 투밀라트 계곡, 대염호수 등을 통해 동쪽으로 수에즈까지 연결하여 지중해와 간접적으로 잇는 방식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다만 바다와 강을 완전히 연결하지는 않았고 중간에 육지에서 배를 끌어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가장 처음 도전한 건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BC 19세기)로 실패했다고 하고, 하트셉수트(B.C.15세기)와 람세스 2세(B.C.13세기) 역시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측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코 2세(Necho II B.C. 8세기)가 B.C. 609년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나일강과 대염호수(Great Bitter Lakes)[2] 와 홍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도하였으며 12만 명의 인명피해 끝에 완공을 눈 앞에 두었으나, 이 운하가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포기하였다고 한다. 네코 2세는 또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걸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얼마 후에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시대에는 완공을 해서 페르시아로부터 원활하게 운용됐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3단 갤리선(Trireme)들이 노를 펴고 서로 교차통행이 가능한 넓이로 횡단에 4일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이를 기념하는 비석 5개를 남겼는데 지금도 4개가 남아있다.
이후 홍해와 만나는 운하 종점에 남겨진 비석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270~26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때 정비&재개통되었으며, 이후로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2세기 초) 시기를 거쳐, 정통 칼리파 우마르 시기까지 홍수와 침니(沈泥) 현상으로 운하가 막히거나 파괴되고 이를 재개통&운영하기를 반복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약 1000년간 운하는 이집트 농산물 등이 아랍 등지로 수송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알 만수르 치세이던 767년, 그의 삼촌 압달라의 반란 방어과정에서 이 고대 운하는 완전히 막혀버렸으며,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팔 때 작업자들의 식수 공급과 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Sweet Water Canal: 가장 위의 지도의 서쪽에서 팀사호수로 연결된 수로)를 뚫을 당시에 이 고대 운하의 잔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후 15~16세기에 운하를 다시 개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먼저 1488년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까지 다다르자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 것을 우려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섰지만, 맘루크 왕조와 협상이 벌어지는 단계에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1565~1579년까지 오스만의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다시 개통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계획 단계에서 불발됐다. 루이 14세나 나폴레옹도 운하 개설 조사를 했지만 포기했다.
3.2. 건설
오늘날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의 주도로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 공매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건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로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되어 있던 중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의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였고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총 40만 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이를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천주에 달하는 프랑스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기타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어할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 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감히 프랑스가 영국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것을 가만 보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와 사이드 파샤에 대한 직접적 압력은 물론이고, 형식적으로 이집트의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도 압력을 넣었으며 수에즈 회사의 주식구입 권유도 단칼에 거절하고 다른 나라들이 해당 주식을 사는 것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당대 최강 대영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다른 나라들(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등[3] ) 이 수에즈 회사 주식 구입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17만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쓰게 되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방법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때문에 레셉스가 "'''영국 니들도 인도에서 똑같은 짓 하잖냐!'''"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회사이며 이집트 소유이고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뉴포트(Newport).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 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용자짓을 저질렀고, 운하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뭐라 항의도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행위를 했다며 비판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놈들에게 대영제국 해군의 기상을 보여줬다며 칭찬받았다고.
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국제적 명성을 얻지만 1880년 파나마 운하 공사(문서 참고)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한다.
3.3. 영국 지배
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만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프랑스가 이겼으면 모를까 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의 이집트 정부였으며, 그 이집트 정부의 최대 스폰서는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영국이 방해한 거였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수에즈 운하를 적극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퇴위했던 것이다. 뒤이은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기고, 또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사이드 파샤는 눈앞에 닥친 재정 폭탄을 피하고, 또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보유 지분 17만 주를 통채로 시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시장에 내놓은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 주를 통째로 매입한 건 '''영국 정부'''였다.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인도,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크게 단축되는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유사시 인도와 중국에 최대한 빨리 군사력을 투입할 수단이 필요해진 것이다. 다만 '''앙숙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를 지었고 그 운영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전쟁 여파로 프랑스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고, 수에즈 운하가 프랑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영국은 즉시 지분 확보라는 방법으로 운하 운영권을 노린 것이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주도했는데 이때 있었다는 야사가 유명하다. 디즈레일리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연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400만 파운드의 자금을 부탁했다. 이에 로스차일드 측에서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영국 정부입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의 주인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다만 영국도 운하 운영권 획득에서 타 열강, 특히 건설 당사자인 프랑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이집트와의 주식 양도 계약은 프랑스 몰래 이뤄졌다. 덕분에 의회에서도 사후 승인을 받아야했고, 의회가 어깃장을 놓으면 계약이 취소될 수 있었지만 '''영국 하원은 열렬한 박수갈채와 함께 주식 매입안을 통과시킨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1882년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벌어지자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그 뒤부터 수에즈는 영국의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는 영국이 수에즈 운하 통행을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개월의 여정을 해야 했고 결국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카더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 출처. 나중에 추가로 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잘 통과했다. 게다가 그 무렵 일본 해군이 보유한 전함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향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4] 출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군대 주둔을 합법화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은 이전 수에즈에 관한 조약을 모두 무효로 돌리고 완전히 운하의 소유권을 자신들의 손에 넣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수에즈는 커녕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막히고 만다.
3.4. 이집트로 귀속
종전 후 이집트가 완전히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뒤 이집트는 이전 조약에 따라 수에즈를 되찾기 위해 주식을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에즈 운하가 완전히 이집트에게 국유화된다. 이에 수에즈 운하를 얌전히 빼앗길 생각이 없었던 영국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5]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집트는 전쟁에서 졌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고 여타 중동국가들이 이쪽으로 기울자 중동에서 친소련파 정권의 득세를 경계하던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주저앉히고 이스라엘에도 경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물러나야 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으로 인해 서방 세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미국에게 빼앗겼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버려 운하가 폐쇄[6]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마지막 확장 공사는 2015년에 있었고,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3.5. 현재
2008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아덴 만 일대에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고 있지만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줄어들 기미는 없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는 루트는 워낙 거리와 시간 면에서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다만, 해적질이 더욱 기승을 부려 보험료 할증이나 보안업체 고용비용 같은 부가비용이 급증한다면 수에즈 운하 통행을 포기하는 선주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나 정작 최근에는 소말리아 해적의 활동이 위축된 반면에 서사하라 일대의 해적질이 급증하여 희망봉 우회가 반드시 안전한 루트가 아니게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세계의 해운업계와 무역업계가 부담한 추가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현재의 달러 가치로 하면 매년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2009년 한 해 동안 여기를 통과한 배만 해도 22,183척에 달하고 통과료로 받은 돈만 해도 54억 1천만 달러에 이른다. 척당 평균 통과비는 대략 25만 달러이다. 이는 이집트의 2009년 GDP $4,531억 달러에서 1.3%에 이른다. 과거에나 현재나 여전히 이집트의 돈줄인 셈이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북극해의 얼음이 계속 줄어들면서 이 곳과 말라카 해협을 거치지 않고 부산에서 베링 해협과 북극해를 통과해 유럽까지 가는 북극항로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배들이 늘고 있다. 유가하락[7] 과 운하 이용료 상승[8] 으로 아프리카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수에즈 운하 직원들의 횡포가 심각한데, 기념품을 강매하거나 세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배들이 이를 견딜수가 없어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13.5노트의 속도로 운항할 경우 11일 더 걸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껏 뚫은 운하 대신에 콜럼버스 시대의 항로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3.6.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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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6일(현지시각) 제2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열렸다.이를 통해 수에즈 운하의 하루 통행량이 2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집트 정부는 물동량 증가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로 제2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다만 실제 사용은 2016년부터 했다. 2015년에는 준공식을 했지만 시범운행을 하고 2016년 9월 1일부터 제2 수에즈 운하에 외국 선박의 통항이 허가되었다.
4. 영향
- 거리 단축: 종전에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까지 돌아가야 했으나, 이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거리가 최대 9,000 km까지 단축되었다.
- 범선 시대의 종식: 비록 기선이 등장하긴 했으나, 과거 희망봉을 돌아가야 했던 시절에는 범선이 기선에 비해 결코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 풍량과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를 낼 수 있는 기선은 운하 통과가 자유로웠던 반면, 풍량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던 범선은 운하 통과가 곤란하여 종전과 마찬가지로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굳이 범선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려면 기선으로 예인하면 되지만, 이러면 굳이 범선을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범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수에즈 루트와 희망봉 루트의 엄청난 거리차와 그에 따른 시간차를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대양 항해에서 범선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 지중해의 부흥: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 유럽의 해양 활동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겨가면서 종전의 중심인 지중해는 상대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그러다가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지중해의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기에 이른다.
5. 수에즈맥스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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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모두 확장공사를 통해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폭을 갖추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2016년 확장공사 완료 전까지 운하 폭이 33 m밖에 안 되어 통행 가능한 선박의 규격 제한이 있었던 반면 수에즈 운하는 그전부터 갑문이 없고 폭이 상당히 넓어 규격이 다소 느슨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규격은 수에즈맥스(Suezmax)라고 하는데 길이에 제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면 위 높이 68 m, 단면적 1006 m2(흘수선 20.1 m-선체폭 50 m 또는 흘수선 12.1 m-선체폭 77.5 m)로 넉넉한 수준이다.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박은 물론 항공모함도 통행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배가 수에즈맥스 이하인 것은 아니라 화물 적재량이 30만 톤을 넘어가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흘수선이 깊은 대형 광석운반선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톤수는 약 16만 DWT 정도에 해당한다.
또 수에즈 운하 양안을 잇는 수에즈 운하교가 2001년에 개통되어 운하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통과 높이 제한이 새로 설정되었다. 이 다리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 나머지 도로는 수에즈 운하 양안에서 끊겨 있고 끊긴 구간은 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선이 운하를 횡단한다. 수에즈 근처에는 하저터널로 건너는 구간도 있다.
6. 레셉스 이주
이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지중해와 홍해의 바다 생태계가 만날 가능성이 적었지만, 개통 후에는 홍해의 생태계가 운하를 따라 조금씩 북쪽으로 이동하고, 결국은 지중해까지 이르러서 운하 근처의 지중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
7. 등장 매체
- 대항해시대 온라인 - 2010년에 시리즈 처음으로 정식으로 구현되었다. 운하 발견 퀘스트를 해야 하는데, 선행 조건은 카이로와 수에즈를 발견(처음 방문)하는 것. 어차피 한 번은 희망봉을 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퀘스트를 끝내면 운하 이용이 가능해진다. 파나마 운하와 같이 시간제한 퀘스트를 가지고 있거나 교역품을 실은 상태에서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통과시간이 존재해서 오스만 국적은 1분, 그 외 국적은 5분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패치 이후에는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클릭 한 번에 바로 카이로-수에즈를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오스만 국적의 경우 수에즈에서 바스라까지 육로 이동이 가능해진다. 교역품을 싣고갈 수 없어서 상인보다는 모험가에게 유용하다. 이 또한 패치 이후 특정 조건[9] 을 만족시키면 수에즈 운하를 교역품을 싣고 건널 수 있지만 이 경우 조건 만족시키기도 까다롭고 시간 제한도 있는 데다 군인 레벨이 낮다면 NPC 해적에게 수시로 강습도 당하며 PK 서버의 경우 유저해적이 있을 수 있고 풍향 특성이 유럽으로 돌아오기는 좋지 않아[10] 시간 절약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힘들어 대항해시대 교역 유저들은 여전히 희망봉을 돌고 있다.
- 문명 시리즈 - 실제 세계 지도로 플레이할 경우, 실제 수에즈 운하가 있는 지역이 1타일짜리 지협이기 때문에 이곳에 도시를 세우면 도시가 항구의 역할을 하는 시스템상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여 통과할 수 있다. 이는 파나마 지협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통 수에즈 근처는 도시국가로 둘러싸여 방어에도 유리하고 근처 범람한 타일 덕에 인구 성장하기도 좋은 땅이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 파나마와 같이 건설가능 디시전으로 존재한다.
[1] 수에즈 지협을 최단거리로 관통하는 경로에 가깝고 근처에 다른 자연지형이 마땅치 않아 운하를 기준으로 대륙을 나누는 일이 많다. 지협의 가장 잘록한 부분은 운하보다 약간 동쪽이기는 하다.[2] 번역에 따라 대소태호수라고도 한다.[3] 프랑스가 이들 정부에 주식 매입을 타진한 이유는 당연히 영국의 방해에 맞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4] 당시 영일동맹으로 인해 영국에 군함을 발주, 구매했다.[5]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단순한 경제적 손실, 외교적 위신 하락 정도의 문제였을지 몰라도, 이집트의 인접국인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운하의 이집트 국유화는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더구나 당시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했던 압델 나세르는 반이스라엘 선봉장이었고, 때문에 이스라엘은 나세르의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여 자국 해상 운송을 봉쇄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또한 당시 이집트는 홍해 아카바 만의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고 해안포를 배치해 이스라엘의 아카바 항을 봉쇄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했다.[6] 운하 양편에서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이 대치하면서 국지적 충돌도 있었기에 운하통행이 불가능했다. 이때 재수 나쁘게 운하에 갇혀버린 선박들은 장장 8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갇혀서 분쟁이 종식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관련 영상[7] 2016년 3월 기준 싱가포르 현물시장가 400불이던 벙커유가가 150달러까지 하락[8]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척당 무려 평균 35만 달러로 한화로 '''4억''' 정도다.[9] 아크로폴리스 관련 조건이 있다.[10] 아라비아 해는 상시 역풍, 홍해는 계절 역풍이고 카이로에서 리스본까지 대부분 구간이 상시 역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