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우저 전쟁
1. 개요
웹 브라우저의 점유율을 두고 여러 회사가 벌인 치열한 경쟁을 가리켜 브라우저 전쟁(Browser Wars)이라고 부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20년 기준 구글 크롬의 압도적인 승리(전세계 점유율 평균 약 64%)로 끝났다.[1] 국내 또한 데스크탑 기준으로는 크롬의 점유율이 70%를 넘어섰으며, 모바일은 안방시장인 삼성 갤럭시 시리즈 스마트폰의 영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40%에 육박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2]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오늘날 JavaScript에 대한 기술이 통째로 바뀌었을 것이며 이는 HTML, CSS 등의 표준화 속도에도 큰 지장을 주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SCSS 등의 탄생은 꿈도 못 꾸고 범용성이 떨어진 결과 Sass 1~2만을 사용하는 등이라던가, MutationObserver, ServiceWorker 같은 고급 표준 기술들의 제정 역시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당장만 봐도 근래 인지도가 많이 상승된 Node.js가 탄생조차 안했을거라 생각하면 그 여파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적합한 예시로는 애드블록의 부재라던가, 사기업에게까지 판치는 액티브 X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브라우저 전쟁은 크게 3개 시기로 구분지어지며, 모자이크, 1차와 2차 브라우저 전쟁으로 나뉜다.
2. 배경
웹의 아버지인 팀 버너스 리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에 걸쳐서 개발하였다.[3] 그는 최초의 브라우저인 WorldWideWeb[4] 을 만들었으며, 이후 91년 NeXT에서 개발한 OS NeXTSTEP에 탑재하기 위한 버전을 개발한다.[5]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1992년 말을 기점으로 libwww, Line Mode Browser, ViolaWWW, Erwise, MidasWWW 등등 여러 브라우저들이 탄생함으로서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한다.
3. 추이
3.1. 모자이크 브라우저 전쟁(Mosaic Wars)(1994~1995 말)
1993년 후기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프로토타입을 비롯한 여러 브라우저들이 등장하였다. 곧이어 넷스케이프 사의 브라우저가 개발되었으며 이들은 IE 1.0을 비롯한 여러 브라우저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경우 이미 93년 당시 뛰어난 편의성과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전히 80%의 점유율로 경쟁자들을 압도하였다. 그래프 참조
3.2. 제1차 브라우저 전쟁(1996~2008)
섬네일의 브라우저는 IE4 ~ IE 5.5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사태를 그냥 두고 볼 빌 게이츠가 아니었다. 1995년 중순, MS는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고 IE 1.0을 개발하였으나[6] , 3개월 뒤 2.0을 출시하였다. 이 IE 2.0은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상업적 이용에 대해 비용을 청구했던 것과 달리, 비해 일반인들을 포함한 어떤 목적의 회사에게라도 무료 제공을 하였다.
이듬해인 1996년, 넷스케이프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더 강화시켜 3.0의 모자이크 브라우저를 출시한다. MS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방어를 하기 위해서 자바스크립트와 CSS를 구현하는 등 후발주자들과의 큰 격차를 두었다.[7] 특히 CSS의 등장은 당시 웹 개발에 있어서 가히 혁명이라 할만큼의 개발 생산성을 증진시켰다.
1997년 10월, MS에서 IE 4.0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표하며 출시하였다. 넷스케이프 72%, MS가 18%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4.0을 기점으로 해서 브라우저 전쟁의 방향을 크게 틀어버린다.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시장을 장악하게 된 것은 MS에게 어떤 기술적 강점이나 매력이 있던 것이라기보다 MS의 전략적인 행동 덕분이었다.
MS는 다음 3가지 자신의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는 넷스케이프의 결정적인 패착요인이 된다.
- 첫 번째, 회사의 자원(Resources)이었다. 넷스케이프는 비교적 작은 회사에서 시작한 것에 비해 MS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으며 Windows OS를 통해 OS 점유율 뿐 아니라 전세계 부를 쓸어담고 있던 중이었다. 가령 MS의 경우 브라우저의 완전 무료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었던 반면 넷스케이프는 브라우저 하나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작았다.
- 두 번째, Windows 시장점유율이 당시 90%에 육박했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MS는 기본 브라우저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탑재시켰고, 사용자들은 넷스케이프와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으니 IE를 사용했다. 사실 CSS라든가 JavaScript 등의 발전이 초기였던데다가, 편의성 측면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난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MS 역시 JScript로 어떻게든 격차를 줄이려고 했었다.[8]
- 세 번째, 기민한 임기응변이었다. MS에서는 빌 게이츠라는 비상한 인물이 있었던 반면, 넷스케이프 쪽에서는 그러한 리더십을 가진 이가 없었다. 흥미롭게도 1998년은 서로의 점유율 싸움으로 인해 둘 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은 해이다.
결과적으로 넷스케이프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2001~2004년 IE의 한때 점유율이 90%에 육박했었으며 2002년의 경우 96%의 시장 점유율에 육박하게 된다. 넷스케이프의 후계자들은 오픈소스 기반의 웹 브라우저를 세우고 MS 타도를 외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모질라 재단이며, 파이어폭스를 개발하였다. 파이어폭스 브라우저는 정당한 기술력에 의한 패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MS의 석권을 인정할 수 없었으며, 호시탐탐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회를 보게 된다. 제 1차 브라우저 전쟁 추이
하지만 제 2차 브라우저 전쟁은 98년 캘리포니아에 세워졌으며 까닥하면 야후!에 팔릴 수도 있었던 어떤 인터넷 검색 회사에 의하여 그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3.3. 제2차 브라우저 전쟁(2009~2015)
3.3.1. 모질라 파이어폭스의 대항
넷스케이프의 네비게이터 브라우저는 1차 브라우저 전쟁으로 인해 도태되었다. 그 하락이 시작되었을 시점에서 그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으며 비영리 재단인 모질라 재단에 의해 이 코드들은 계승된다. 커뮤니티를 통한 수 년간의 개발은 지속되었고, 그 대표적인 기능이 Search Bar의 개발이다.[9] 모질라는 이 브라우저의 이름을 처음에는 Phoenix 로 정했지만 상표권 문제로 FireBird로, 나중에는 결국 Firefox로 변하게 되었고 2004년 11월 9일 1.0을 발표하게 된다.
넷스케이프의 실패는 모질라 재단에 '비영리'라는 교훈을 주었다. 그리하여 0.x 버전부터 시작한 Firefox는 자본의 문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환경이 되었다. 특히 ECMAScript[10] 제정 정통성, 우수한 개발도구 지원 등으로 IE를 상대로 꽤 선전적인 대항을 해나갔다.
그러나 MS 또한 아웃룩 등과의 연계, 표준화 거부, XAML 의 웹 기술 제정, WPF(Windows Presentation Foundation) 의 설립으로 대항하였다.
파이어폭스는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었지만 IE에 길들여진 사용자층에게는 막강한 파급력을 미치기에는 힘들었다.[11] 2007년 아이폰의 등장으로 개발 표준에 대한 불안성이 증대되던 중... '''크롬이 등장한다.'''
3.3.2. 크롬의 등장
당시 CEO였던 에릭 슈미트는 1차 브라우저 전쟁을 두고 구글은 아직 덩치가 작아 타격을 크게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6년 간 반대했었다.[12] 결국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증명해야했다. 크롬 브라우저의 프로토 타입 개발을 위해 모질라 재단의 인재들을 고용했고, 에릭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도록 하였다.
모질라 재단에서는 크롬에 대한 발표(2008년 9월)가 나자, 격하게 반대하였다. 자신들은 MS에 대해 충분히 대항 중이고 크롬의 출시는 되려 파이어폭스의 점유율만 갉아먹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13]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질라가 2000~10년 동안 꾸준히 쌓아왔던 30%의 점유율을 구글은 2011년 11월 개발을 시작한지 불과 3년 만에 돌파했고, 2012년 5월을 기점으로 MS 의 점유율을 꺾었기 때문이다. IE 에 비한 압도적인 편의성, 경이적인 속도,[14] 날마다 혁신적인 개발 도구 제공 등으로 개발자부터 모든 사용자에 아우르게 되었다. ECMA 등의 표준을 충실하게 지켰고 그보다 더 나아가 실험적인 기술들을 적극 도입[15] 함으로서 모두의 지지를 받게 된다.
국내의 경우 2016년 4월을 기준으로 크롬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다.[16] 제 2차 브라우저 전쟁 추이(StatCounter 자료)
이렇게 제 2차 브라우저 전쟁은 모질라도, MS도 아닌 구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4. IE Tab 전쟁(한국 등 일부 지역에만 해당)
2차 브라우저 전쟁은, 무거운 Internet Explorer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었다. 세계시장에서는, 2차 브라우저 전쟁을 통해 IE의 점유율을 크게 떨어트렸다. 그러나, 2차 브라우저 전쟁을 벌이며 파이어폭스가 IE의 점유율을 점점 뺏고 크롬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할 동안, 한국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Internet Explorer vs 파이어폭스가 한창일 때 파이어폭스 개발 주체인 모질라 재단은 점유율에 대한 민감한 질문을 회피할 때 독일(파이어폭스 점유율이 가장 높았던 나라)과 한국을 거론하는 식으로 빠져나가기도 했을 정도.
다만 파이어폭스의 대한민국 점유율은 (전세계 점유율과 달리) 5%를 넘은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거의 단 한 번도 유의미한 수준을 기록하지 못했으나, 크롬은 단숨에 20% 초반으로 치고 올라간 후 몇년동안 15~25%에서 왔다갔다 했다. 크롬 등장 이전엔 IE의 90% 점유율이 단 한순간도 깨진적이 없는 거의 유일한 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저 정도도 대격변이긴 하다. 단지 외국에선 크롬 대세를 넘어 크롬 독점 수준으로 승기가 굳어지는 상황에서도 저 수치에서 정체되었던 게 특이했던 것.
2015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민관 사이트의 70%가 ActiveX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환경에 맞는 브라우저가 IE밖에 없었기 때문. 게다가 그 때는 인터넷 쇼핑을 할 때에도 ActiveX 사용이 필요한 공인인증서가 필요하여 더더욱 IE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현재는 많이 바뀐 편이지만 많은 한국의 사이트들이 Internet Explorer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한국에서는 IE를 포기할 수 없었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은 크롬 등의 다른 브라우저를 주로 사용하면서도 IE를 보조적으로 사용 중이며, 이는 아직도 IE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한민국에서는 IE를 대체하기 위한 각종 브라우저와 프로그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3년, 줌 인터넷에서는 IE를 대체하기 위해 스윙 브라우저를 출시했다. 스윙 브라우저는 크롬의 블링크 #s-9 엔진과, IE의 트라이던트 엔진을 탑재하여, 듀얼 엔진으로 작동한다. 크롬과 같은 패스트 모드와 IE처럼 ActiveX를 지원하는 모드를 번갈아가며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크롬과 IE를 완전히 통합하지 못했던 점, 스윙 브라우저의 기타 여러 단점에 더해, 대한민국의 여러 정부 사이트나 은행 사이트들에서도 ActiveX를 버리기 시작하며 스윙 브라우저는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2016년, 네이버에서 출시한 웹 브라우저인 네이버 웨일은, 아직 IE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한국의 상황을 감안해, IE에 맞춰져있는 사이트도 지원할 수 있도록 호환 모드를 적용시켰다. 또한 네이버 메인 상단에 눈에 띄는 배너를 강제적으로 표시하는 등 점유율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IE로 네이버를 접속한 유저에게는 ‘보안에 취약한 브라우저’라면서 웨일로 전환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외에도, 크롬에서 IE에 맞춰져있는 사이트를 열 수 있게 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IE를 빠르고 가볍게 만들어주는 프로그램도 등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2014년 1월 이후부터는 대한민국의 IE 점유율이 계속하여 떨어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2015년에도 작은 등락을 거듭하여 우하향 그래프를 그려오다가 2016년 1월을 기점으로 IE의 점유율이 드라마틱하게 급격히 떨어졌고, 드디어 2016년 4월 statcounter 기준 대한민국에서도 크롬이 1위가 되었다! 시기상 박근혜 정부가 소위 천송이코트 논란으로 ActiveX 폐지를 발표했고 이에 맞춘 최소한의 꼼수로 기존의 보안 프로그램들을 exe로 다운받아서 실행하는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대놓고 꼼수라서 액티브 EXE니 하고 욕먹었어도, 윈도우 한정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 독점이던 환경을 크롬 이거나 파이어폭스에서도 호환되는 등 개선된 점도 있기 때문. 자세한 건 Chrome의 점유율 분석 부분도 참고할 것. 다만, 스탯카운터 순위의 경우 트래픽 기반이라 실사용자수치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며, 특히나 국내 사이트에는 스탯카운터가 심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신뢰도는 굉장히 낮다.
그래도 IE가 HTML5 지원에 취약한게 드러나고 유튜브의 지원이 종료되자 크롬의 사용률이 예전보다 올라갔다.
2020년 9월 3일 국내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점유율이 네이버 웨일에게도 밀린다는 소식이 나왔다.
5. 관련 문서
[1] W3C 기준. 여기서의 C 는 Counter이고, W3Consortium 의 산하기관이다.출처[2]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현황 (2020년 최신)[3] HTTP 기술이 정식으로 명세된 것은 1999년 RFC2616에 의해서이다.[4] 후에 Nexus라고 불리게 된다.[5] 그 당시 팀 버너스 리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NeXT에서 일하고 있었다.[6] 영문 위키 Browser Wars의 근거 참조. Elstrom, Peter (22 January 1997). "MICROSOFT'S $8 MILLION GOODBYE TO SPYGLASS". Bloomberg Businesswee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9 June 1997. Retrieved 9 February 2011.[7] W3C에서도 CSS의 등장 이전에는 웹 문서 작성이 '악몽'Nightmare 라고 표현하고 있다. W3Schools의 CSS Intro 페이지 참고.[8] 이러한 기술은 나중에 개발자들에게 있어 악의 축으로 취급된다. attachEvent 등의 표준을 개무시한 API 등이 그러하다.[9] 오늘날 대부분의 브라우저들은 URL을 제외한 텍스트를 자동검색해주지만, 당시에는 URL 입력만 작동하였다.[10] JavaScript의 표준이다.[11] 그러나 이 파이어폭스가 없었다면 브라우저 자체가 MS의 횡포로 인해 유료가 되는 등의 막장 사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에 대한 견제장치로 모질라 재단은 그 역사의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12] 구글은 2000년 즈음 돼서야 텍스트 광고의 도입으로 재정 적자를 넘어 흑자를 창출했던 시기였다.[13] 그러나 파이어폭스 재단이 W3C와의 협력으로 WHATWG를 결성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어도 판세를 뒤집는데는 쉽지 않았고 특히 사용자층에 대한 돌파는 더더욱이 어려웠다. IE 가 툴바 도배 등으로 병크를 저지르는 상황과 모바일의 출현 등을 생각해보면 점유율이 굳혀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14] 멀티코어 프로세서 적극 지원이 대표적이다. 이후 타 브라우저도 멀티코어 프로세서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크롬의 멀티코어 효율이 독보적이다.[15] 대표적인 것이 console 객체이다. 파이어폭스의 경우 FireBug 등의 확장 프로그램으로 제공하였으나, 크롬은 이를 기본적으로 내장시킨다. 결국 편의성을 인정받아 표준화가 된다.[16] koreahtml5로나 statCounter로나 결과는 같다. 검색 점유율 역시 17년 기준 의심할 바 없이 구글이 1위이다. 대체적으로 국내 통계에 비해 해외 쪽이 더 공신력이 있다. 한 예로 피치원뷰 등의 통계사이트는 600% 의 상승이 이뤄졌다는 둥의 불안정한 데이터가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