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디킨슨

 


'''브루스 디킨슨
Bruce Dickinson
'''
[image]
'''본명'''
폴 브루스 디킨슨 (Paul Bruce Dickinson)
'''출생'''
1958년 8월 7일, 잉글랜드 노팅엄셔 워크솝
'''국적'''
'''영국''' [image]
'''활동'''
1976~
'''소속'''
아이언 메이든(밴드)
'''직업'''
싱어송라이터
'''장르'''
하드 록, 헤비 메탈
'''악기'''
보컬, 기타
1. 개요
2. 생애
3. 보컬 스타일
4. 여담


1. 개요


[image]
아이언 메이든의 보컬리스트로,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장르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보컬리스트이다. 롭 핼포드, 로니 제임스 디오, 저프 테이트와 함께 80년대 메탈씬을 대표했던 보컬.

2. 생애


1958년 8월 7일 브루스 디킨슨은 밴드의 다른 멤버들과 비슷한 노동계급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군부대에서 정비공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신발 가게에서 파트 타이머로 일했다. 브루스 디킨슨은 공립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는데 중산층 출신 아이들로 구성된 학교에서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생각했다. 학업과 친구들에게서 멀어진 아웃사이더에게 위로가 된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딥 퍼플, 레드 제플린, 아서 브라운 같은 뮤지션들을 통해 록 음악에 열광했다.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공립학교를 그만둔 그는 이후 동네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친 후 6개월 남짓 예비역 군부대에서 보내기도 한 디킨슨은 명문 퀸 메리 대학교 인문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여 인문학사 학위를 받는다.[1] 대학에서 공부하는 와중에도 음악은 디킨슨에게 1순위였다. 이 시절 만나 사귄 여성은 보컬 트레이너였는데, 여자친구를 통해 디킨슨은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스스로도 발성 공부를 하는 등 점차 프로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러 밴드를 전전하던 디킨슨은 1979년 영국 근교를 무대로 활동하던 샘슨의 보컬로 영입되었다. 당시 샘슨과 한 무대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어울리던 그룹 중 하나가 아이언 메이든이었다.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악기를 잡고 지역 클럽에서 활동하는 멤버들이 많았던 당시 메탈 씬에서 단과대학이나 동네마다 있는 흔한 지역 예술대학도 아닌 퀸 메리 대학이라는 좋은 대학을 졸업한 브루스 디킨슨은 가방 끈이 긴 편이었다.[2]역사를 전공하고, 고전 문학과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았던 디킨슨은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밴드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만족하는 듯한 샘슨 멤버들에게 실망한다. 나중에 동료가 되는 스티브 해리스처럼 '큰 그림' 을 그릴 줄 알았던 디킨슨에게 폴 디아노의 탈퇴 이후 보컬을 찾던 아이언 메이든의 매니저 로드 스몰우드가 오디션을 볼 것을 권하고 브루스 디킨슨은 이를 받아들인다. 성공적인 오디션 후 팀의 공식 보컬이 된 브루스 디킨슨은 1981년 10월부터 정식 공연에 프런트 맨으로 등장한다.

3. 보컬 스타일



트레이드 마크는 높은 피치에서 터져나오는 어마어마한 출력의 파워와 꽉 싸서내는 단단한 중고음. 그리고 미칠듯한 리듬감이다. 테너치고는 배음이 거의 바리톤에 가깝다.
로버트 플랜트, 이안 길런, 프레디 머큐리 등 70년대 하드록 보컬리스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특히 피터 해밀[3] 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참고 특유의 어두운 느낌과 빼어난 작사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인이 직접 말했다. 또 이안 길런의 영향력도 컸는데, 특유의 오페라틱한 발성에서 이런 점이 크게 두드러진다. A4~C5에 해당하는 음역대를 쉬지 않고 연속으로 쏟아내는 그 능력은 현재에도 유효하여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부분. 특히 데뷔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창법이 벨팅에 가까워지면서 중고음에서 나타나는 소리의 단단함은 퇴색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 또한 헤비메탈 뿐만 아니라 발라드 넘버도 깔끔하게 소화할 만큼 소화가능한 장르의 폭도 넓다. 무엇보다 독보적인건 그의 리듬감이다. 아이언 메이든의 히트곡들 대부분이 파워 메탈의 시조답게 베이스와 트윈기타가 달려달려하는 빠른 BPM에 스티브 해리스의 베이스 멜로디까지 꽉 차있어서, 그냥 연주만 들어도 보컬이 조금만 타이밍 놓치면 연주와 겹쳐서 죽어버린다. 웬만한 감각 없이는 그냥 보컬 맞춰 가사 읽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멜로디가 꽉꽉차있는 연주와 같이 가면서도, 긴 가사의 운율을 살리면서 리드미컬하고 각 음절의 강한 어택을 살려주는 다이나믹한 보컬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딕션이 정확하기까지 하니 리스너에게도 딱딱 꽂히는 것. 괜히 로니 제임스 디오롭 핼포드처럼 헤비메탈 보컬리스트의 본좌 계보에 올라가있는게 아니다.
초창기, 중반기, 후반기의 보컬 스타일에 변화가 꽤 있는 편인데, Powerslave 시절까지는 리릭 테너에 가까운 하이톤의 음색을 바탕으로 고음역대를 상연만 살짝 붙여서 날렵하게 내거나 혹은 중연까지 꽉 붙여서내는 두 가지 스타일이 모두 공존했고, 중음역대와 고음역대를 매끈한 레가토로 처리하면서 B4 이상의 고음역대에 스크래치도 맛깔나게 내고 무한한 성량을 자랑했었다. 사실상 리즈시기. 그러나 Powerslave 이후로는 무지막지한 라이브 투어를 견디기 힘들어지면서 C5 이상의 고음을 고의로 빼먹는 경우가 늘어났고 고음역대에서 후두가 계속 위로 붙는 인골라가 늘어나면서 대체적으로 입안에 갇힌 소리가 자주 났고 음역대 역시 하강했다. 심지어 이후엔 중음역대까지(!) 음정이 나가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 편[4]
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휴식을 어느 정도 가지게 되었는지 이전처럼 먹은 소리는 줄어들었으나 이전처럼 고음역대를 날렵하게 내거나 스크래치를 넣는 빈도는 확 줄어든 편. 메이든 탈퇴 이후로 솔로 앨범 내던 시절의 소리를 들어보면 이전의 무지막지한 고음역대는 많이 줄어든 대신 강한 비브라토와 어택으로 꽉꽉 채운 중고음역대의 벨트된 소리를 무기로 삼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로는 약간 낮아진 스핀토 테너 정도로 간주된다. 피지컬이 아무래도 젊은 시절만큼은 아닌지라 D5 이상의 고음에서 살짝 벌어지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라이브를 보여주던 시기[5]
다만 The Final Frontier 앨범 이후로는 아무래도 노령에 가까워지고 암 수술까지 겪으면서 음색이 전체적으로 둔탁해졌고 A4 이상의 고음역대에서 성대가 벌어지는 소리가 늘고 꽉 싸여진 풍성한 중음역대가 성량저하로 인해 잘 나오지 않으면서 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핀란드에서 찍은 Tallinn 공연을 보면 암 수술 이후 다시 또 회춘을 한 건지 소리의 질이 많이 좋아졌다.

4. 여담


NWOBHM의 대표주자로서 데뷔 초부터 롭 핼포드와 자주 비교를 당했는데,[6] 둘은 함께 공연도 할 만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7]
아이언 메이든 활동과 더불어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항기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Asteraeus라는 항공사에서 항공사가 문을 닫게 되는 2011년까지 기장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월드 투어 때 아이언 메이든 전용기를 직접 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메이든 탈퇴 후 냈던 솔로 앨범 타이틀이 Skunkworks... 그 외에 책도 쓰고 영화 각본을 쓴 경력도 가지고 있다.# 영국의 한 양조장과 협력하여 Trooper라는 맥주를 만들기도 했는데, 110만 리터 가까이 팔리는 대박이 났다. 그 외에 펜싱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실력은 준프로급이었던 모양.
헬로윈의 2대 보컬 마이클 키스케앙그라의 2대 보컬 에두 팔라시가 보컬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딥 퍼플의 열렬한 팬으로, 예전부터 이안 길런, 글렌 휴즈 등 딥 퍼플 멤버들과 자주 협연을 했다. 존 로드 추모 콘서트 때 글렌 휴즈와 함께 딥퍼플 시절의 곡을 불렀다.

[1] 후에 대중음악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음악 박사학위도 받는다.[2] 오지 오스본, 토니 아이오미, 기저 버틀러, 글렌 팁튼 등등 많은 동시대 네임드 뮤지션들이 음악을 하기 전에는 3D 업종에 종사했거나 부모가 하층 노동자 출신들이었다.[3] Van der Graaf Generator의 보컬로 펑크와 프로그레시브 락에 큰 족적을 남겼다[4] Live After Death 공연실황에서 이런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5] ~ En Vivo 라이브 시절[6] 원년멤버는 아니지만 밴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 둘 다 첫 밴드가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공통점도 많다.[7] 사실 밴드생활 경력으로 따지면 핼포드가 10년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