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플랜트
1. 개요
영국의 가수. 영국의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 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 였다.
2. 생애
1948년 8월 20일 영국의 웨스트 미들랜드에서 기술자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에 나이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로버트 플랜트는 어려서부터 로큰롤에 푹 빠졌고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동네에서 엘비스 흉내를 제일 잘 내는 소년으로 꼽혔을 정도. 하지만 당시 부모세대가 그러하듯 로버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엘비스 노래를 커튼 뒤에 숨어 따라 부르며 엘비스가 되기를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로큰롤 가수를 꿈꿨지만,학교 공부도 머리가 좋아 꽤 잘했던 편이었기에 아버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회계사가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회계사 학교에 집어넣었지만 얼마 못견디고 뛰쳐나왔다. 따라서 그는 낮에는 도로 포장하는 일을 하고 저녁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밴드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와중, 버밍엄에 있던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듣고 흡족해 해 '나와 함께 며칠 지내보자' 라고 제의를 한다. 그렇게 해서 지미와 로버트는 며칠간의 생활 후 서로가 매우 잘맞는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가 된다.
2007년에는 컨트리 뮤지션 앨리슨 크라우스와의 듀엣 앨범인 Raising Sand를 발매한다. Raising Sand는 메타크리픽 점수 87점에 안착하는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200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로버트 플랜트는 뮤지션으로서 여러 프로젝트 밴드에 몸 담으며 다양한 활동과 공연을 계속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의료 종사들을 위한 기부를 하기도 한다.
3. 가창력과 창법
'''락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 그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최강의 보컬'''로 평가받는다.그만큼 그를 추앙하는 뮤지션들은 엄청나게 많다. 대표적으로 오지 오스본과 겐키 히토미, 게디 리, 잭 러셀, 김종서[2] . 역대 최고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를 논할 때 로버트 플랜트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미 페이지는 처음 로버트의 노래를 들었을 때 '어째서 이 사람이 지금껏 무명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높은 음역대를 가진 테너 성종의 록보컬의 대명사로 통한다. 비음이 많이 섞인 엄청난 하이톤의 미성이 트레이드 마크이며, 이를 바탕으로 중고음을 굵직하게 긁어 처리하고[3] , 고음역대에서 소리를 자연스레 거칠고 선명한 팔세토[4][5] 로 빼는 고난도의 기교를 부린다. 때문에 소리에서 굵직한 허스키함과 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어떻게보면 상당히 모순되는 특성들을 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후대에 그를 모델로 삼고 연습한 보컬들 중에서도 그의 굵직한 허스키함과 중성적인 날카로운 하이톤을 모두 재현한 보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6] 이 야누스적인 카리스마는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으로 평가되며, 그 포스는 정말 말그대로 압도적인지라, 무대에서 삑사리를 달고 사는데도 그 특유의 음색과 카리스마, 음악적 센스로 다 커버해 사람들을 열광시킬 정도다. 또한 거대한 성량의 소유자여서 리즈시절엔 라이브 때 '''스피커를 찢어버린''' 일화도 존재한다[7]
많은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 4집까지의 창법을 일반적인 로버트의 목소리로 알고 있으나, 사실 로버트의 창법은 이후 몇 번 바뀌었다. 1집 시절만 하더라도 목을 많이 긁어 굵은 음색을 뽑아냈으나[8] 점점 날카로운 고음을 내기 유리한 식으로 창법을 변화시켜 왔고[9] , 5집 The Ocean에선 거의 여성의 톤을 방불케하는 미성을 보여준다. 6집 이후부턴 부족한 자기관리와 그 동안의 무리한 발성으로 음색이 탁해지고 음역이 줄어 초창기보단 훨씬 거칠고 진한 음색과 창법을 보여준다.
환갑을 넘은 나이라는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컬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물론 카시미르가 창법이 바뀐 후반기 앨범이긴 하고 초창기 곡을 부를 땐 고음을 전혀 시도하지도 않는다.
노년기인 현재에도 관리를 잘 하였기 때문에 수준급의 가창력을 유지하고 있다. 노년의 인상과는 전혀 매치가 불가능한 목소리는 덤이다. 현재까지 흡연자에 음주자이고, 게다가 과거 마약을 달고 살았던 사람인데도 지금도 이 정도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은 다 하면서도 관리는 엄청나게 하였다는 의미.간단하게 리암 갤러거를 보면 알 수 있다.[10] 젊었을 적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그동안 창법을 꽤나 바꿔오며 적응해냈기 때문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락밴드의 보컬들이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엄청 나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락 보컬리스트로서 얼마나 열심히 임하고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데뷔 초부터 현재까지 라이브에서, 특히 고음역대에서 고의로 음을 플랫시키거나 음을 빼먹고, 소리를 내다 삑사리가 나는등 고음역대를 버거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11] 라이브의 기복이 심하다는 점은 70년대 이후부터 한동안 꾸준히 나왔던 단점. 애초에 레드 제플린 팀 자체가 앨범의 최상의 퀄리티를 위해 녹음 때 라이브 걱정은 안하고 본인들 기량을 최대한 쥐어짜서 연주하는 타입이라, 애초에 본인의 곡들이 본인이 라이브에서 애드리브까지 다 살려가며 소화하기엔 너무 어려운 곡들이었을 것이다.[12]
또한 로버트 플랜트의 진정한 전성기는 레드제플린 가입부터 1972년까지의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13] 겨우 스물다섯도 되기 전에 목소리에 한계가 온 것. 초창기에 사용하던 독창적이지만 무리가 많이 가는 테크닉과[14] 매 공연마다 질러댄 무수한 높은 라(!) 이상의 고음들, 부족한 자기관리 [15] 그리고 이상징후를 무시한 지속적인 투어 강행이 합쳐지면서 5집 투어인 1973년부터 플랜트의 고음역은 현격하게 죽어버리고 만다. 당장 1973년 Black dog 라이브와 1971년 Black dog 라이브를 들어보면 창법도 다르지만 음역대의 차이가 꽤 크다. 이 영상을 보면 '''3옥타브 솔(G5)'''[16] 이상의 고음만 40개...
때문에 70년대 중후반의 플랜트는 음악 커리어에서 유독 라이브에서 힘들어했다. 70년대 후반엔 1~ 4집의 넘버들의 고음들을 하나도 소화 못할 정도. 1978년 발매된 라이브 앨범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선 Rock and Roll 등 히트곡들의 고음을 소화 못해 음을 다 낮춰 불렀다.
이후로 창법을 변경하면서 고음역 회복을 줄기차게 꾀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기본이 원래 엄청난 보컬리스트라 제 몫은 해냈지만, 커리어 중반이었던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 같은 공연에서는 거의 노래를 소화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행히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감을 되찾은 플랜트는 90년대 중반의 페이지&플랜트 투어들에서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로 돌아왔다. 레드 제플린 시절 앨범들을 리마스터링 하는 것 외에는 좀처럼 음악 활동을 하지 않는 지미 페이지와는 대조적으로 2018년 현재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라이브 투어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 히트곡들도 투어 셋리스트에 계속해서 포함시키는데 현재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새로운 편곡을 거쳐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평.
창법과 스타일에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 소니 보이 윌리엄슨, 하울링 울프, 재니스 조플린, 스티브 매리엇(스몰 페이시스), 로저 달트리(더 후) 등의 보컬리스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몰 페이시스의 보컬리스트인 스티브 매리엇의 열렬한 팬이어서 무대뒤, 대기실 등에까지 스토커처럼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히 창법에 있어서도 스티브 매리엇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발표한 이 곡을 들어보면 로버트 플랜트가 매리엇의 창법 스타일을 얼마나 많이 벤치마킹했는지를 알 수 있다.[17]
그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도(C2))''' ~ '''3옥타브 시(B5)'''이며, 가성까지 포함하면 '''4옥타브 시(B6)'''까지 이다..[18]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남자가수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 정도이다.[19]
4. 여담
- 매우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74년 5월에 로버트, 지미, 존 본햄은 어릴적 우상이자 오랜 팬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당시 엘비스의 공연이 열리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연을 관람한 뒤에 호텔을 방문하여 엘비스를 만난적이 있었다. 당시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잠깐만 시간을 내주려 했으나, 로버트의 재치있는 입담에 푹 빠져서 결국 2시간 동안이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대화를 계속 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때 엘비스의 매니저는 그들이 있는 방 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잠그면서까지 대화를 계속했다고. 에피소드를 추가하자면,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이 최신 인기 밴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20] 그래서 제플린의 음악보다는 당시에 매스컴에 많이 나오던 제플린에 관한 가십성 소문들에 대해 관심있었는데, 특히 순회공연 때마다 수많은 그루피족과 질펀하게 어울린다는 소문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한다. 기혼자였던 로버트로서는 답변하기가 곤란한 처지였는데, 다음과 같은 재치있는 답변으로 잘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건 소문일 뿐이고 우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린 호텔에 머물 때 딴 짓 안 하고 오직 당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휴식시간을 보내는게 유일한 즐거움입니다."(일동 웃음). 곤란한 질문도 서로 기분 좋게 넘어가게 하는 플랜트의 재치있는 언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플랜트의 장기였던 엘비스 흉내 모창을 보여줬는데, 특히 엘비스의 ‘Love Me’를 부를 때 노래나 표정이나 워낙 비슷하게 흉내내서 엘비스를 포함한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 스무살이란 어린 나이에 모린이란 여성과 결혼했으나, 당대의 많은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결혼생활 내내 여러 그루피 등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심지어 아내 모린의 여동생 즉 처제와도 관계를 맺어서 플랜트와 처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21] 몇년 전에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Band Of Joy 활동을 같이 하기도 한 가수 Patty Griffin과 교제중이었으나 2014년에 결별했다고 밝혔다.
- 창법 때문일진 몰라도 노래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야한 편이다. 또 무대에서 성적매력을 과시한다며 레드제플린 무명시절엔 안티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당시 레드제플린의 노래를 듣던 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오시면 소리를 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성적 매력 강조를 운운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1977년에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인 카락 플랜트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당시 투어 도중이라 아들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 슬픔을 토대로 만든 노래가 In Through the Out Door 앨범에 수록된 All My Love와 I'm Gonna Crawl이다.
- 서구에서 플라워 무브먼트가 한창이던 1967년에 로버트 플랜트 역시 히피즘에 도취되어 있었다.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의 웬즈베리 법원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마리화나 합법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레드 제플린 시절에도 종종 마약에 손댔지만[22] , 지미 페이지처럼 심한 마약 중독에까지 이르진 않았고, 나름 절제하려고 노력하며 건강에도 신경 쓰는 타입이었다.
- 레드 제플린 시절엔 지미 페이지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서구권에선 실제로 둘의 친분에 착안하여 브로맨스를 만끽하는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카더라 . 이 둘의 끈끈한 우정은 록계 최고였다고 회자될 정도이다. 각자의 실력도 해당 분야에서 최고였던 데다가, 우정도 돈독하여 서로를 신뢰했다고 한다. 둘이서만 별장으로 여행을 가서 지미 페이지가 리프를 만들고, 로버트가 가사를 붙이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둘의 사이가 친밀했다는 증거. 하지만 이 때문에 둘 사이에서 소외되고 자신의 역할이 세션맨에 불과하다는 불만을 느낀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가 활동 중반기와 후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를 탈퇴하기도 했다. 그런데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엔 지미와 로버트 사이가 예전만큼 사이가 좋지가 못하다. 해체 후 둘이 간혹 같이 공연하거나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뭔가 둘 사이에 의견 불일치와 사소한 다툼 등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
- 헤어스타일에 애착이 강하다. 오죽하면 외모나 노래실력에 대한 칭찬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칭찬을 더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을정도. 아무튼 애착을 갖고 신경써서 관리했던 덕분인지 그 풍성한 금빛 머리의 효과까지 더해져 20대 리즈시절 무대 위 그의 모습은 여심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 당시 별명도 황금빛 신(The Golden God)이었던데다 키도 185cm의 장신.
- 우리나라의 김종서가 로버트 플랜트와 노래 스타일이 비슷한데, 김종서는 로버트의 열렬한 팬이다. 창법 뿐만 아니라 무대 매너까지 로버트와 흡사한데, 김종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그야 말로 롤 모델, 귀감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레드 제플린 노래를 부를 땐 놀라운 수준의 가창력을 보이는데 ~ 아시아에서 로버트 플랜트와 가장 가까운 보컬이라는 평이 있다.
- 축구를 상당히 좋아한다.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자주 하며 EPL의 축구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매우 열광적으로 응원한다.
[1] 3등급 CBE 왕실 훈장 수여자[2] 아마추어 시절에 로버트 플랜트를 카피하며 노래 연습을 했을 정도로 그의 팬이다. ‘레드 제플린 커버는 아시아 최고’라는 소리도 종종 들을 정도.[3] I can’t quit you baby 등 1집에서 이 점이 크게 두드러진다.[4] 쉽게 말하면 흔히 말하는 반가성에 가까운 소리이다.[5] 1970년 이전까진 그냥 중음에서 목을 잔뜩 긁어 무겁게 소리내는걸 힘으로(...) 고음까지 쭉 유지하는 방식을 쓸때도 있었다. You Shook Me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데, Immigrant Song을 부를때처럼 소리를 얇고 날카로운 질감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완전 무겁고 거칠게 처리하는걸 들을 수 있다. 물론 에너지 소모가 매우 심한 방식이라 피지컬이 좋았던 1집때 주로 사용했으며, 라이브에서도 컨디션이 받쳐줘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창법이었다. 4집 이후부턴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현재엔 아예 사용하지 않는 소리.[6] 그와 보컬 스타일적인 면에서 쏙 빼닮았다고 평가받는 김종서도 음색은 중성적인 음색의 록 보컬리스트인 러쉬의 게디 리와 벗지의 버크 쉘리와 비슷하다고 평가된다.[7] 이는 그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도 한 몫할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착각될 정도로 하이톤의 음색으로 4옥타브를 훌쩍 넘기는 샤우팅을 애드리브로 지르고 다녔으니 스피커가 터질만도 하다.[8] 겐키 히토미가 이 시절 로버트 플랜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레드 제플린 곡을 커버한 걸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9] 물론 목상태의 변화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10] 다만 인간의 내구성이라는 건 관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유전자'.[11] 사실 이는 댄 맥카퍼티같은 당대의 고음형 록보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다.[12] 50년대 블루스 뮤지션들 스타일에 영향을 받아 굵고 거칠게 노래하는 창법을 가지게된 플랜트가 고음을 라이브에서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다 살려 라이브하기엔 레드제플린 1~4집의 곡들이 대체로 너무 고음역대다. 4집의 히트곡 Black Dog는 여성 보컬들이 자주 커버할 정도;[13] 이 점은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딥퍼플 의 이언 길런 의 경우도 마찬가지.[14] 원래 힘으로 밀어부쳐 목을 무진장 긁어내 소리를 내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리즈시절에도 라이브의 기복은 상당히 심했다. 플랫과 삑사리를 항상 달고 살았기 때문에 1집 수록곡인 babe I’m gonna leave you같은 경우는 음원과 똑같이 라이브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의 목소리가 1집 이후로 점점 날카롭고 가볍게 변해가 5집때 그것이 정점을 맞았던 건 무리한 발성으로 인한 컨디션 악화도 크게 한 몫했을 것이다.[15] 70년대 라이브 영상 중에 담배를 핀 후 Heartbreaker를 부르는 영상도 있을 정도다; 이 라이브는 지미 페이지가 해당 곡에서 기타 솔로를 즉흥적으로 길게 늘려 유명하기도 하다.[16] 소찬휘의 Tears, 스틸하트의 She's Gone의 최고음과 같다.[17] 이 곡은 윌리 딕슨이 작곡하고 머디 워터스가 1962년에 녹음해서 발표한 'You Need Love'란 곡을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커버한 곡이다. 이 스몰 페이시스의 커버 버전과 머디 워터스의 원곡을 레드 제플린이 짜깁기 한 뒤 편곡해서 녹음한 곡이 바로 그 유명한 'Whole Lotta Love'다.[18] https://www.concerthotels.com/worlds-greatest-vocal-ranges[19] 프레디는 음역의 정확한 넓이가 밝혀지지 않았다. '''주변인들이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적 없다'''고 하였고 본인도 고음을 선호하지 않았으며 , 저음역도 상당히 넓었다.[20] 엘비스는 자기를 구시대 가수로 만들어버린 1960~70년대 후배 세대의 록음악, 이른바 "요즘 것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래서 최신 음악은 일부러 멀리 했고, 자기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올드송들이나 가스펠 음악을 주로 들었다.[21] 그렇게 태어난 아들과 본처와의 아들은 서로 외사촌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한 셈.[22] 그 시절 서구 록 음악인들 중에서 마약을 안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