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퍼플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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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딥 퍼플
DEEP PURPLE
'''
'''멤버'''
'''로드 에반스, 리치 블랙모어, 이언 페이스, 존 로드,
이언 길런, 로저 글로버, 글렌 휴즈, 데이비드 커버데일'''
'''입성 연도'''
'''2016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ffd700 후보선정 연도}}}'''
'''}}}#ffd700 2013년, 2014년, 2016년}}}'''

1. 개요
2. 이름의 유래
3. 역사
3.1. 1기: 밴드의 시작 싸이키델릭 & 프로그레시브 아트 록
3.2. 2기: 밴드의 전성기 하드록의 제왕
3.3. 3기, 캘리포니아 잼, 소울 & 블루스
3.4. 4기, 석양의 딥 퍼플
3.5. 해체 이후
3.6. 재결성
3.7.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4. 근황
5. 멤버
5.1. 舊 멤버
6. 음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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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의 최전성기였던 제 '''2기''' 때의 딥 퍼플 멤버들.
왼쪽부터 '''로저 글로버(베이스), 리치 블랙모어(기타), 이언 길런(보컬), 존 로드(키보드), 이언 페이스(드럼)'''

1. 개요


딥 퍼플은 '''하드록의 교과서, 헤비메탈의 개척자'''이자 '''록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밴드'''다. 1968년 영국 허트포드에서 결성하고 1976년 해산. 1984년에 재결합해서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밴드 중 하나로, 여러 장르에 걸치는 복잡다양한 음악을 해왔지만 특히 '''하드록과 헤비메탈 등 헤비록 계열 록음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밴드'''다.
흔히 70년대 헤비록 역사에서 레드 제플린과 늘상 비교되며[2],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와 함께 70년대 헤비록 대표 밴드로 꼽힌다. 또한 그들이 이후의 하드록, 헤비 메탈을 포함한 록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리프 등 연주기법이나 곡의 형식미 등등 거의 절대적이다. 70년대 내내 오리지널 멤버로 활동한 앞의 두 밴드에 비해, 유달리 멤버 교체가 심했지만 덕분에 장르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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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리치 블랙모어(기타),로저 글로버(베이스), 이안 페이스(드럼), 아랫줄 왼쪽부터 이안 길런(보컬),존 로드(키보드),'''
미국에서의 인기는 동시대의 레드 제플린에 비해 약했지만 유럽아시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전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딥 퍼플이 레드 제플린의 인기를 능가했고 정말 많은 밴드들이 이들의 음악을 카피했다. 한국, 일본의 록 음악은 딥 퍼플을 빼놓으면 얘기가 안되고 1975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도 공연하기도 했다.
결성 당시의 멤버로 끝까지 유지된 라이벌 레드 제플린이나 등과 달리 딥 퍼플은 끊임없이 밴드 멤버들이 교체되었는데, 이는 참여한 멤버들의 음악적 역량과 합주를 중시했던 밴드의 운영방식으로 밴드의 음악을 더 다채롭게 만드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헤비메탈 밴드 멤버들의 자유로운 이합집산도 이에 영향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은 나중에 리치 블랙모어의 밴드인 레인보우, 데이빗 커버데일의 화이트스네이크 에서도 재현된다.
이 밴드의 한가지 특이한 점은 전성기 시절의 멤버교체에 따라 Mark 1(I), Mark 2(II) 이런 식으로 4개의 기수로 구분해서 설명된다는 것이다.
멤버교체가 훨씬 심했던 수많은 다른 밴드들에 비해 유독 딥퍼플에만 이런식의 구분법이 적용되는데, 이것은 처음에 딥퍼플의 미국 배급사였던 Waner Bros.에서 먼저 만들어져서 해체 이후에 발매했던 편집앨범들에 쓰였고, 이후 평론가들도 그대로 인용한다.
이 구분법을 쓴 이유는 새로운 멤버의 영입마다 기존 밴드가 추구하는 장르에 새로운 멤버가 추구하는 장르가 융합되어 밴드 고유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계속해서 창조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각 기수마다 완전히 다른 밴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운드 변화가 확연하다. 덕분에 레코드사는 그들의 공백기에도 기수별로 편집음반을 신나게 찍어내서 4배의 상업적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80년대 한동안 유행했던 Rock family tree 에서 다른 밴드에도 이 표기법이 많이 활용되면서 현재는 단순 멤버교체에 이런 식의 구분법을 쓰고 있지만, 그 출발은 딥퍼플에서 시작했다.

2. 이름의 유래


The Ritchie Blackmore Story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리치의 인터뷰에 의하면 밴드 결성 당시 여러 이름들이 후보에 올랐었는데, 딥 퍼플이란 이름은 리치가 제안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릴 때 할머니가 불러주던 노래 제목이 딥 퍼플이었고 그 당시에는 2가지의 단어를 조합한 밴드명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핑크 플로이드, 무디 블루스, 레드 제플린이나 블랙 사바스처럼 말이다.

3. 역사



3.1. 1기: 밴드의 시작 싸이키델릭 & 프로그레시브 아트 록


딥 퍼플의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팝밴드 서처스[3] 출신의 드러머였던 크리스 커티스가 런던의 사업가 토니 에드워즈를 만나 새로운 그룹을 탄생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름을 Roundabout 이라고 짓는다. 크리스 커티스의 생각은 실력있는 유명 뮤지션들을 모집해 일종의 슈퍼 그룹을 결성한다는 계획이었고, 이 기획안에 감동한 토니 에드워즈는 두명의 파트너인 존콜레타와 론 하이어와 함께 힘을 합쳐 전폭적인 투자를 결정하고 라운드어바웃 만을 위한 회사인 HEC을 설립한다.
첫번째 합류한 멤버는 당시 세션계의 베테랑인 클래식을 전공한 해몬드 오르간 주자인 존 로드 였고, 두번째 멤버로는 함부르크로 건너가서 활동하던 떠오르는 스튜디오 세션 기타리스트 이자 아웃로즈, 닐 크리스천 밴드 [4] 그리고 스크리밍 로드서치의 기타리스트를 거친 리치 블랙모어를 합류시킨다.
보컬은 리더 역할을 자처한 크리스 커티스가 맡기로 하고 이제 리듬 파트를 찾아나설 차례였지만, 크리스 커티스는 심한 LSD 중독자였기에 툭하면 기행을 일삼았고 잠수도 여러번 탄다. 이에 매니지먼트 회사인 HEC은 그를 즉시 해고시켜 버린다.
하지만 HEC 는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의 가능성은 매우 높이 사고 있었고, 이 두 사람 또한 모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에 비해 인기는 훨씬 많았지만 음악적으로 비틀즈의 아류 밴드[5]의 드러머였던 크리스 커티스가 보컬을 맡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참에 이것은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HEC의 사장인 토니 에드워즈는 본격적으로 매니저까지 맡고, 라운드어바웃의 멤버 두명은 자신들과 함께 할 새로운 멤버를 물색한다. 세번째 멤버로 존 로드의 추천에 의해 그와 함께 플라워 포트 멘의 백밴드를 같이했고 자니키드 앤 파이어릿의 베이시스트 출신인 닉 심퍼가 가입하는데, 닉은 이미 리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드러머로는 존 로드 못지 않은 베테랑 세션맨인 바비 우드맨[6]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마지막 멤버를 뽑는 보컬 오디션에서 로드 에반스가 자신의 밴드 Maze의 팀 동료인 드러머 이안 페이스를 대동하고 나타나면서 또 한번 역사가 달라진다.
리치 블랙모어는 1966년 독일에서 Maze의 콘서트를 본 적이 있었고 그 당시 18살짜리 드러머의 연주에 깊은 감흥을 받은 터였다. 이를 기억하는 리치가 바비 우드맨이 담배를 사러간 사이에 급하게 이안 페이스에게 오디션을 시켜봤고, 결국 로드 에반스가 보컬에, 이안 페이스가 드러머로 정식 가입한다. [7]
이렇게 해서 라운드어바웃은 키보드 주자 존 로드와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에 닉 심퍼(베이스), 로드 에반스(보컬), 이안 페이스(드럼) 3인을 더해 5인조로 밴드를 구성을 완료한 후, 곧 리치 블랙모어의 할머니가 좋아했다는 곡의 이름을 따서 밴드의 이름을 '라운드어바웃' 에서 '딥 퍼플'로 개명하고[8] 이때의 멤버를 딥 퍼플 1기라고 한다.
이듬해인 68년에 나온 1집부터 이듬해 69년 3집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키보디스트인 존 로드가 음악적인 키를 잡고, 주로 당시의 주류였던 사이키델릭 록블루스 록, 그리고 클래식을 도입한 프로그레시브적인 실험성이 담긴 복잡한 구성의 음악을 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딥 퍼플의 음악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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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퍼플 제 1기, 뒷줄 왼쪽부터 리치 블랙모어(기타), 존 로드(키보드), 닉 심퍼(베이스). 아랫줄 왼쪽부터 이안 페이스(드럼), 로드 에반스(보컬).
특히 다른 뮤지션들의 곡들을 리메이크 하면서[9] 그 원곡을 연주지향적으로 더 디테일하게 다듬은 곡들을 발표했는데, 이건 당시 비틀즈의 곡들을 헤비 사이키델릭 록으로 변주해 길게 연주하면서 큰 성공을 거둔 밴드 바닐라 퍼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반적인 연주기법 부분에서도 이들과 비슷하였다.
존 로드는 영적이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려주는 해먼드 오르간을 연주하며 오르간 속주를 구사했고, 지미 헨드릭스 에게 영향을 받은 리치 블랙모어는 블루지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달리 면도날같이 짧고 공격적인 리프와 속주 솔로를 주로 연주했다.
여기에 디테일한 연주법에서는 존 본햄을 능가한다고 하는 이안 페이스의 기교넘치는 드럼 연주까지 곁들여져 이미 이 시기에 최고의 연주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거기에 로드 에반스의 블루스 필링이 강한 끈적끈적한 보컬은 이 시기에 추구하던 딥 퍼플의 음악과 잘 어우러져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팬들은 이때의 딥 퍼플을 최고였다고 얘기하며 아쉬워한다. 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가면 딥 퍼플은 이때만큼 음악적인 실험은 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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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앨범 Shades of Deep Purple
이후의 딥 퍼플의 특징인 멤버들간의 불꽃튀는 연주 경쟁은 이때 이미 나타났으며 그런 대표적인 곡이 1기 이후에도 라이브에서 자주 연주하는 "Wring That Neck"이다. 이 곡외에 당시의 명곡들을 보면 클래식 요소를 결합한 복잡한 구성의 곡들인 "Anthem"과 "April",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올라 밴드에게 상업적인 성공을 안겨줬던 조 사우스 원작의 경쾌한 하드록곡 "허쉬" [10] 도노반의 곡을 리메이크한 "Lalena", 원시적인 드럼과 공격적인 기타리프의 "Chasing Shadows" 등이 있다.
보컬리스트 로드 에반스와 베이시스트 닉 심퍼는 초기 3장의 앨범에 참여하고, 곧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로 교체된다.이로써 존 로드 주도의 클래시컬하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성을 선보인 위대한 아트록 밴드 제 1기 딥 퍼플은 막을 내린다.
로드 에반스는 이후 아이안 버터플라이의 멤버들과 함께 사이키델릭 블루스 밴드 캡틴 비욘드를 결성한다. 그 이후의 로드 에반스는 1980년에 딥 퍼플이라는 동명이름으로 재결성했다가 당연히 고소를 먹었고 자신의 밴드 제적 당시의 음반 수익료를 포기한다. 그리고 법정소송이 끝나고 로드 에반스는 음악산업에서 완전히 하차했다. [11]

3.2. 2기: 밴드의 전성기 하드록의 제왕


2기의 딥 퍼플은 1기와 달리 철저히 헤비록, 하드록 을 지향하며 활동하였고, 이때의 딥 퍼플이 가장 유명하다.
1969년 리치 블랙모어는 레드 제플린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듣고 딥 퍼플에서도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처럼 강렬하게 외쳐대는(screaming) 보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그 누군가가 바로 이안 길런 이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락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초대 지저스 역을 맡았을 정도로[12] 기본적인 성량 및 음역대가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던 이안 길런은 지금까지도 하드록 헤비메탈 보컬의 교과서로 불리우며, 그 특유의 미칠듯한 고음의 샤우팅과 무지막지한 파워를 가진 스크리밍 창법은 이후 아이언 메이든의 브루스 딕킨슨을 비롯한 여러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들의 창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안 길런의 추천으로 밴드에 가입한 베이시스트인[13] 로저 글로버는 베이스 연주와 작곡 이외에도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파이어 볼 앨범에서는 음반 커버 디자인까지 주도한다. 이후에는 주다스 프리스트, 나자레스, 마이클 솅커 그룹 그리고 후기 레인보우 에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이 시기의 딥 퍼플을 흔히 황금의 2기 딥 퍼플이라고 하며, 이 때 멤버들의 음악성과 연주력이 워낙 출중해 아직까지도 최고의 연주력을 가진 멤버들이 모인 밴드 설문조사 등등에 이 시기의 딥 퍼플이 최고의 밴드로 꼽히기도 한다.[14] 당시로는 정말 혁명적일 정도로 놀랍고 무시무시한 연주력이었으며 이후의 헤비 메탈 밴드들은 다 이 2기의 딥 퍼플 음악을 카피하고 따라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메탈계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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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존 로드(키보드), 로저 글로버(베이스), 이안 페이스(드럼), 이안 길런(보컬), 리치 블랙모어(기타)
이 정도로 이후 세대의 메탈 밴드 중 딥 퍼플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밴드는 정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약 딥 퍼플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메탈 밴드들이 있다면 이들이 평균 저하에 일조하는 것들이라고 봐도 좋다.(...) 심지어 김흥국도 무명시절에 딥 퍼플의 곡을 많이 연주하곤 했다고 자서전에 적은바 있다.
2기의 중요한 앨범으로는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Deep Purple In Rock", "Fireball", "Machine Head ", "Made in Japan" 등등이 있다. 특히 '''"Deep Purple In Rock"''', '''"Machine Head"'''는 헤비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들로 이 앨범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하드록, 헤비메탈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는 존 로드가 밴드 결성 때 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했던 클래식과 록의 결합의 실험의 결과물이다.(이게 록 역사상 최초는 아니다. 이 이전에도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사이키델릭 록 밴드들이 이런 실험을 했으며, 앨범 전체가 이런 곡들로만 채워진 컨셉 앨범이라면 1967년 Moody Blues의 Days of Future Passed이 최초로, London Festival Orchestra 와 협연한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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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은 1969년 9월 24일에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진행했고, 1부에서는 말콤 아놀드 지휘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놀드의 자작곡인 교향곡 제6번을 런던 초연했다. 2부는 딥 퍼플 단독 무대로 Hush와 Wring That Neck, Child in Time 세 곡이을 연주했고, 3부에서 존 로드의 이 협주곡을, 그 이후는 3악장의 후반부를 앵콜로 연주했다.
공연 직후 협주곡의 실황을 LP 앨범으로 발매했고, 이후 1990년에 CD로 재발매되면서 2부 연주곡 중 Hush를 제외한 두 곡이 같이 수록되었고, 2002년에는 1~3부 전체와 앵콜까지 모두 담은 한정판 라이브 앨범이 DVD-AudioSACD로 나왔다.
존 로드의 야심작이었던 협주곡은 연주는 좋았으나 구성이 너무 산만하는 평을 들었지만, 이안 페이스의 드럼 카덴차와 리치 블랙모어의 그 이전이나 이후에나 전혀 들을수 없는 유일무이한 블루스 필링 가득한 끈적끈적한 기타 연주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후 1970년 8월 25일에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보울에서 로렌스 포스터가 지휘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재차 공연했지만, 공연 직후 악보를 분실하는 바람에 재공연은 거의 30년이 지난 1999년 9월 25~26일에 가서야 네덜란드 작곡가 Marco de Goeij의 협력으로 재작성된 악보로 행해졌다. 다만 원곡 그대로는 아니었고 어느 정도 개작된 형태였다. 초연 때와 마찬가지로 로열 앨버트 홀에서 폴 맨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협연했다.
리치 블랙모어는 이 시기의 존 로드 주도에 의한 클래식과 록의 조합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15] 그러나 이 시도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영광의 2기 딥 퍼플을 알리는 효과는 대단 했다.
이에 존 로드에게서 음악적 리더 역할을 넘겨 받은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리스트로서의 역량은 바로 다음 앨범에서 폭발한다. 1970년에 발표된 2기 딥 퍼플의 두번째 앨범 '''"Deep Purple In Rock"'''은 흔히 하드록, 헤비메탈의 교과서 로 불리우는 명반 중의 명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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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은 '''헤비록 역사상 전무후무 공전절후한 앨범'''이고 나오자마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헤비록의 출력을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고출력의 시끄러운 사운드(그러한 특징들은 앨범 첫번째 트랙 "Speed king"에서 잘 드러난다.), 리치 블랙모어의 귀청을 찢는 듯한 헤비한 기타 사운드에 맞서 해먼드 오르간 만으로 그 기타에 결코 지지않는 강렬한 연주를 보여준 존 로드 이 두 사람의 대결, 그리고 "Speed King", "Bloodsucker" 등에서 들려준 이안 길런의 악마적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강렬한 보컬, 무시무시한 연주 스피드 등은 그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 앨범 최고의 곡은 더 말할것도 없이 악마적인 목소리 이외에도 프로그레시브적인 복잡한 구성과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연계되는 드라마틱한 연주가 압권인 '''"Child In Time"'''[16]이며, "Into the Fire", "Flight of the Rat" 그리고 리치의 극한으로 몰아 붙이는 긴 기타솔로를 담은 "Hard lovin' Man"등도 영원한 헤비록의 고전이다. 미국 러시모어 산의 대통령 큰바위 얼굴들을 패러디해 자기들 얼굴들을 집어넣은 커버도 화제가 되었다.
"Fireball"은 너무 달린 전작에 비해 조금은 절제된 사운드를 선보이고 있다. "Deep Purple In Rock", "Machine Head " 두 최고의 앨범 사이에 끼어 있어 약간 저 평가받는 앨범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음악성은 두 앨범에 못지않다. 두 앨범보다 더 프로그레시브적이며 많은 실험을 시도한 앨범이다. 오프닝의 스트레이트한 "Fireball", 약간 부기우기한 템포의 여유로운 곡 "No No No", 프로그레시브 한 분위기의 "Fools" 그리고 라이브때 이안 페이스의 드럼 솔로연주로 유명한 "The Mule" 등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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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앨범'''"Machine Head"'''는 '''더 말할것도 없이 헤비록의 교과서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리프의 노래 '''"Smoke on the Water'''" 는 물론 "Highway Star", "Lazy", "Space Truckin'" 등등 우리가 알고있는 딥 퍼플의 유명한 곡은 다 이 앨범에 들어있다. 심지어 '''메탈헤드라는 말이 바로 이 앨범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Deep Purple In Rock"보다는 거친 야수성은 줄어들고 좀더 정리된듯한 음악을 들려준다. 다만 너무 프로듀싱이 너무 정제되었는지 활력이 지나치게 줄어든 느낌이 든다. 이건 라이브 앨범 "Made In Japan" 등등에서 곡들이 훨씬 헤비하고 힘이 넘치게 들리는걸 보면 알수 있다. 두 앨범을 비교해보면 "Machine Head" 에 컴프레서가 과하게 걸린게 아닐까 할 정도로 "Made In Japan" 앨범은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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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존 로드(키보드), 이안 길런(보컬), 로저 글로버(베이스), 이안 페이스(드럼), 리치 블랙모어(기타)
2기 처음부터 밴드 리더 존 로드에 대항해 점차 자기능력을 과시하던 리치 블랙모어의 의도로 이 앨범에서는 리치 블랙모어가 연주파트 내에서의 위상이 완전히 존 로드를 넘어선다. 하지만 리치 블랙모어의 이 요란한 기타 사운드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존 로드의 해먼드 오르간이 또 대단하다. 1972 부터 3기 딥 퍼플 초기인 74년 까지가 딥 퍼플의 황금기로서, 이 시기는 라이벌인 레드 제플린에 비해, 음악적으로 월등히 앞서나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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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Japan"'''[17] 은 이 시기 일본에서의 라이브 앨범으로 '''록 라이브 역사상 최고의 앨범''' 으'로 얘기된다.[18] 이 앨범에서 들으면, 이들의 연주는 라이브에서도 기교에 거의 실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천재성이 넘쳐보이며 스튜디오 버전보다 소리의 박력도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19] 흔히 이 앨범을 들어 레드 제플린의 실수가 많은 라이브 앨범과 비교해 딥 퍼플이 레드 제플린보다 연주 실력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사실이다. 게다가 긴 공연 시간 내내 지친 기색 없이 실수도 없이 연주하고 노래한다. 가히 무서울 지경이다. 실제로 두 밴드의 라이브는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는데, 딥 퍼플이 작곡된 곡 원본에 충실하면서 기교적인 애드립을 첨가하는 방향으로 곡을 연주했다면, 레드 제플린은 곡 자체에 다양한 변화를 주는 즉흥적인 연주에 탁월했다. 합주 연습을 강하게 밀고 나갔던 존 로드, 리치 블랙모어와는 달리 레드 제플린은 연습은 각자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한 몫 한다.[20]
이안 페이스는 이안 길런과 리치, 존이 무대 위에서 죽도록 자기 실력을 뽐내며 서로 경쟁하는 꼴을 뒤에서 드럼치면서 즐겼다고 인터뷰 했었는데, 앨범을 유심히 들어보면 연주자들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받은 임프로바이제이션을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Strange Kind Of Woman에서 이안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가 나누는 문답(?)이 가장 좋은 예다. 존 로드의 경우 70년대 하드록 밴드의 해몬드 올겐 사운드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기타와 사운드를 헷갈릴 만큼 무지막지한 헤비 사운드를 들려 주는데, 클래식에 영향받은 프레이즈들을 제외하면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기타 연주와 아주 비슷한 어프로치가 있다.
Made In Japan 앨범이 발표된 직후, 밴드의 간판이 된 리치 블랙모어는 밴드의 또 다른 간판인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이안 길런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버린다. [21] 73년초 딥 퍼플 7집인 히트곡 'Woman from tokyo' 를 수록한 범작 "Who Do We Think We Are" 를 발표했지만 전작인 Machine Head에 비해 평이 너무나 안좋았고 멤버들사이도 좋지 못했다. 결국 73년 6월 두번째 일본 공연을 마지막으로 파워 싸움에서 밀린 이안 길런의 탈퇴로 이어지고, 이는 곧 얼마안가 로저 글로버 마저 내보낸다.
그리고 데이빗 커버데일(보컬)과 글렌 휴즈( 베이스, 보컬)가 들어온다. 이때부터 3기의 딥 퍼플이 시작된다. 한편, 존 로드는 딥 퍼플 3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솔로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며 딥 퍼플 시기 못지않은 음악적 성과를 거둔다. 실제로 존 로드 본인은 자신의 모든 작업물 중 1976년에 나온 솔로 앨범 Sarabande를 최고로 평가했다.

3.3. 3기, 캘리포니아 잼, 소울 &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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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 딥 퍼플, 왼쪽부터 글렌 휴즈 (베이스, 보컬), 리치 블랙모어 (기타), 이안 페이스 (드럼), 존 로드 (키보드), 데이비드 커버데일 (보컬)
황금의 2기 딥 퍼플과 비견되는 딥 퍼플 3기는 1기와 2기가 그랬듯이 보컬과 베이스가 바뀌었고 트윈 보컬체제를 도입하면서 별도의 밴드로 보아도 좋을 만큼 사운드 변화가 크게 일어난다. 먼저 발견 된 인물은 베이스와 세컨드 보컬을 맡은 22살 밖에 안된 글렌 휴즈였다.
그는 3인조 록밴드 트래피즈의 리더였고 작사 작곡 베이스 실력 뿐만 아니라[22] 보컬 실력도 뛰어났으며[23] 당시의 커버데일이 못내는 고음을 대신 불렀다. 사실 충분히 혼자 커버데일 못지않게 록 보컬을 할 능력이 있어서 이후 블랙 사바스 등에서 리드 보컬을 맡기도 한다. 그의 보컬은 무엇보다 커버데일보다 음역대가 높고 소울풀하다.[24]
자신을 베이시스트 보다는 보컬리스트로 인식하고 있던 글렌 휴즈는 처음 로저 글로버의 후임이라는 제의가 달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는 베이스 연주가 아닌 보컬도 겸할수 있으며, 얼마전 해산한 밴드 프리의 보컬리스트인 폴로저스가 프론트맨으로 가입할것이며 즉 트윈 보컬 체제로 갈것이라고 그를 설득 시킨다. 폴로저스와 보컬 파트를 양분한다는 말에 감동한 글렌은 가입을 수락하였다. 하지만 폴로저스는 이미 새로운 밴드 배드컴퍼니를 결성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대신 멜로디 메이커 지에 광고를 내서 오디션을 실시한다.
3기의 리드 보컬을 맡게된 무명의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목소리는 중저음을 바탕으로 헤비록적인 면과 블루지한 면이 동시에 있는 목소리였다. [25] 그는 무명 밴드 생활을 하며 낮에는 양품점 직원 일을 하다가 오디션에서 뽑혔는데, 옷이나 모습이 너무 촌스러워서 딥 퍼플 멤버들이 꾸며주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다른 멤버들이 처음엔 약간 걱정도 했지만 처음 시작하는 "Burn" 앨범에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실력을 발휘해 안도했다고 한다.
특히 글렌 휴즈는 폴로저스의 대타로 그것도 완전 무명의 보컬리스트였던 데이빗 커버데일의 실력을 매우 높게 평가해서 현재까지도 그와 트윈 보컬을 했다는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얘기한다.
데이빗 과 글렌은 선배들의 지도하에 일취월장 실력이 늘어갔고, 특히 리치 블랙모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나간다. 74년 2월에 발매된 앨범 "Burn" 은 2기 데이빗 과 글렌의 트윈 보컬을 내세운 새로운 사운드로, 과거 딥 퍼플의 명성에 버금가는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크게 성공한 명반으로 인정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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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발매 직후 딥 퍼플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대규모 락페스티벌인 California Jam 1974 의 무대에 선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와 공동 헤드라이너로 참가 한 이 공연은 총 25만명의 관객이 관람하였으며, 이 두 밴드 외에 이글스, 블랙 사바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등 영국, 미국의 슈퍼밴드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공연에서 제 3기 딥 퍼플의 조합 또한 2기에 못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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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의 딥 퍼플, 왼쪽 위 존 로드 (키보드), 왼쪽 아래 데이빗 커버데일 (보컬), 중앙 리치 블랙모어 (기타), 오른쪽 위 글렌 휴즈 (베이스, 보컬), 오른쪽 아래 이안 페이스 (드럼)
보다 젊어지고 잘 생겨진 이 3기 딥 퍼플은 두번째 앨범이자 문제작인 "Stormbringer" 를 내놓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리치 블랙모어가 많은 곡에 작곡가로 참여하고 있음에도, 글렌 휴즈의 소울풀함과 펑키(funky)한 사운드가 앨범 전반에 흐르고 있는 묘한 형태의 앨범이 만들어졌다. 글렌의 베이스 기타 사운드 또한 전작 보다 훨씬 그루브 감이 돋보였고, 세컨드 보컬로만 여겨졌던 전작 앨범에 비해, 데이빗 커버데일과 비교해도 누가 리드보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보컬 파트를 가져간다.
"Stormbringer" 는 스트레이트한 딥 퍼플 2기를 선호하는 팬들에게는 굉장한 배신으로 느껴질만한 사운드였지만, 소울 과 펑키, 그리고 블루스가 충만한 딥 퍼플의 또 다른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여담이지만 글렌 휴즈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1970년대 중반 데이빗 보위와 1년 동안 같이 산적이 있었는데, 이 때 두 사람은 음악, 패션, 약 등 공통 관심사가 많아 서로 굉장히 친해졌다고 한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당시 자신이 작업하던 <Young Americans> 앨범에서 글렌 휴즈가 노래를 해주길 바랬었지만, 글렌 휴즈가 딥 퍼플에 집중을 해주길 바랬던 리치 블랙모어의 반대로 글렌 휴즈는 <Young Americans> 앨범에서 노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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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와의 결합은 리치 자신도 지향하던 바였고 펑키한 사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에 적합한 멤버들을 선택한것도 바로 그였다. 리치는 블루스는 좋아했지만, 글렌 휴즈가 좋아하는 모타운 소울 사운드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두번째 앨범의 결과는 존 로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 글렌 휴즈의 주도하에 "Hold On", "Love don't mean a thing" 등 펑키한 소울로 넘실대는 사운드였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리치 블랙모어는 음악적 주도권을 놓치 않으려 했으나, 새파란 후배들은 그 짧은 사이에 이미 너무나 큰 스타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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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기를 타고 다니던 좋았던 시절의 딥 퍼플
더군다나 언제나 자기 편인 줄 알았던 존 로드가 이 굴러온 돌들의 손을 들어주자 리치는 딥 퍼플에 점점 흥미를 잃는다. 당시 리치는 딥 퍼플의 공연 전에 게스트 공연을 하던 밴드 ELF[26]의 멤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솔로 프로젝트를 제작중이었는데, 결국 이 프로젝트가 레인보우 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딥 퍼플 탈퇴로 이어진다..
3기에 유명한 곡으로는 "Burn", "Mistreated", "Stormbringer", "Gypsy", "Love don't mean a thing" 그 외 데이빗 커버데일이 혼자서 부른 국내에서 너무나 사랑받는 발라드 "Soldier of Fortune", 그리고 글렌 휴즈 혼자서 부른 아름다운 기타 인트로의 소울 넘버 "Holy Man"도 있다.
딥 퍼플 3기에 대한 향수를 가진 팬덤도 그 규모가 굉장히 크다. [27] 실제로 2010년이 넘어서 존 로드와 데이빗 커버데일의 주도로 딥 퍼플 3기의 재결합이 추진 되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그대로 추진 됐다면, 오리지널 멤버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 그리고 데이빗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가 참여한 3기 딥 퍼플, 그리고 황금의 2기의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 그리고 오리지널 멤버 이안 페이스가 참여한 딥 퍼플, 이렇게 두 밴드가 정통성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생길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안 페이스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존 로드의 의견에 따라 무산되었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안 페이스는 이안 길런, 로저 글로버 주도의 딥 퍼플에서 활동 하고 있기 때문에, 두 밴드를 동시에 하기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한번의 공연이라도 보고 싶다는 팬덤의 요구에, 재고의 여지가 있었지만 2012년 존 로드의 타계로 영광의 3기 딥 퍼플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존 로드 타계 이후에도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 3기의 재결합을 추진한다. 링크
보컬에 자신, 그리고 베이스에 자신의 소울메이트인 글렌 휴즈, 기타에 리치 블랙모어,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키보드 자리에 생전 존 로드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딥 퍼플의 열렬한 팬이었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키스 에머슨 까지 영입하는 계획으로 리치 블랙모어에게 여러번 제안했었다고 한다. [28] 하지만 존 로드 타계 이후에 리치는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어 결국은 무산 됐고 그 후에도 커버데일/페이지 프로젝트 처럼 커버데일/블랙모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안 도 내놓았으나, 리치는 거절했다. 리치의 말에 의하면 리치가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본인은 신곡을 작업하고 싶어했으나, 커버데일은 딥 퍼플 3기 시절의 대표곡들을 리메이크 하길 원했던 의견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20대 청춘을 보낸 빛나는 딥 퍼플 시절의 추억을 속에 담아놓기만 있기는 힘들었던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 3,4기 시절의 대표곡들을 모아 자신의 밴드 화이트 스네이크의 이름으로 2015년 The Purple Album 을 내놓는다.

3.4. 4기, 석양의 딥 퍼플


사실 존 로드는 리치 블랙모어의 탈퇴 선언에 충격을 받아 밴드를 해산시키려 했었다. 존 로드와 이안 페이스는 밴드의 상징이 되어버린 리치 블랙모어 없이는 딥 퍼플을 존속 시킬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갓 명성을 얻기 시작한 글렌 휴즈와 데이빗 커버데일은 강력하게 밴드의 존속을 주장하며 원년 멤버 두명을 설득한다.[29]
이제 대스타가 된 데이빗 커버데일은 이 명성을 조금이라도 지속 시키고 싶었고, 리치의 후임자로 제프 벡을 추천한다. 하지만 제프 벡은 모든 밴드가 탐을 내는 기타리스트 였기 때문에, 단지 그의 희망사항으로 끝난다.
두번째 초이스로 아일랜드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로리 갤러거를, 그외에도 데이빗 보위의 기타리스트 였던 믹 론슨, 콜로세움과 험블파이 출신의 데이브 크렘슨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제퍼와 제임스 갱, 그리고 빌리 콥햄의 솔로앨범 스펙트럼 에서 면도날 같은 재즈 퓨전 기타를 선보인 젊은 미국인 기타리스트 타미 볼린을 영입하여 제 4기를 맞이한다.
타미 볼린의 영입에는 두가지 다른 얘기가 전해지는데 데이빗 커버데일 말로는 이 역시 자신의 추천이었다고 하고, 타미 볼린의 생전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은 바로 딥 퍼플의 전임 기타리스트인 리치 블랙모어의 추천이었다고 전해진다.
새로 가입한 타미 볼린은 글렌 휴즈, 데이빗 커버데일 과 같은 51년 생 동갑내기로 이미 블루스와 소울이 충만한 사운드로 변신한 딥 퍼플에게 아주 적합한 기타리스트였다. 딥 퍼플 제 4기는 이 젊은 3인방의 주도하에 1975년 Come taste the band이라는 앨범을 발표 후 순회공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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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의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인 Come taste the band는 하드록에 가까운, 그러면서도 크로스오버나 퓨전재즈적인 느낌이 강화된 앨범으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명반이었다. 이 중 커버데일과 휴즈가 같이 작곡한 You Keep on Moving 은 원래 Burn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당시 리치 블랙모어의 반대로 이제서야 빛을 본다. 새로 가입한 타미 볼린이 앨범 수록곡 9곡중에서 6곡의 작곡에 참여하고 한곡에선 리드보컬을 하는등 맹활약을 하였다.
타미 볼린은 리치 블랙모어와 같은 강렬한 연주를 하는 기타리스트 아니지만, 재즈를 기본으로 한 장르적 스펙트럼이 더 넓은 기타리스트였다. 앨범 전체적으도로 타미와 나머지 밴드 멤버들의 조화로운 연주가 돋 보이는 수작이었다. 당시의 평가는 앨범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지만, 딥 퍼플 같지않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딥 퍼플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리치 블랙모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하는 결과였다. 또한 동갑내기 데이빗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 그리고 새로 가입한 타미 볼린 까지 이 3인방은 인간적인 갈등은 없었지만, 보컬 파트 배분으로 인해 리드 보컬 데이빗 커버데일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원래 자신의 밴드에서도 리드보컬 과 베이스를 동시에 맡았던 프론트맨 출신이었고 보컬 욕심이 컸던 글렌 휴즈 또한 자신의 파트에 만족하지 못한다. [30] 세 명 모두 강한 에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 자기 마음대로 주도 하지 못하는 밴드에 대한 불만이 날로 커져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새로 가입한 타미 볼린이 심각한 마약 중독자 였기 때문에, 라이브에서 실력이 들쑥날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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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글렌 휴즈, 데이빗 커버데일, 타미 볼린
해가 지나 1976년 3월경 이미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존 로드는 자신보다 10살 아래인 까마득한 후배 데이빗, 글렌, 타미 삼인방이 설쳐대는 밴드에 지쳐 버린다. 또한 당시 타미 볼린 과 글렌 휴즈 의 약물 중독증세는 점점 심해져만 갔고, 그 광기는 스테이지에서 감출수 없이 표출 된다. [31]
1976년 3월 15일 리버풀 엠파이어 극장에서의 공연후 데이빗 커버데일이 존 로드의 대기실 문을 열고 "밴드를 그만두겠소!" 라고 외쳤으나, 존 로드는 "밴드? 무슨 밴드? 그만 두고 싶어도 이제 그만 둘 밴드가 없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존 로드는 밴드가 더 이상 나아갈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자각했고 얼마전 이미 이안 페이스와 해체를 결정하고, 이 날 마지막 공연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멤버들에게 해체 사실을 함구 하고 있었다 한다.
결국 1976년 7월 공식적으로 밴드의 해체가 기사화 된다. [32]
타미 볼린은 밴드 해산 직후 두번째 솔로앨범 프라이빗 아이즈를 발표하고, 바닐라 퍼지의 마크 스테인을 건반주자로 영입한 "타미 볼린 밴드"를 결성하여 순회공연을 하며 잘나가는듯 하였으나 몇달 안가 1976년 12월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다.
글렌 휴즈는 이듬 해인 77년 트래피즈의 멤버들의 백업하에 솔로음반을 내고 1982년 활동재개시기까지 기나긴 약물중독과의 싸움에 들어간다.
'''여기서 전설의 밴드 딥 퍼플은 끝난다.'''

3.5. 해체 이후


해체이후 멤버들 모두 각자 활발한 활동을 한다.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로니 제임스 디오, 그레이엄 보넷등 명 보컬리스트를 배출하며 음악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다.
데이빗 커버데일은 화이트스네이크 를 결성하며 갈수록 일취월장하는 가창력으로 딥 퍼플도 못한 빌보드 핫 100 1위[33]에 성공했으며, 90년대 초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와의 프로젝트인 커버데일 & 페이지로 활동 하기도 했다.
이안 길런은 재즈락 퓨전 밴드인 이안 길런 밴드, 그리고 하드록으로 다시 회귀한 밴드 길런 으로 꾸준히 활동하였고 후에 블랙 사바스에 잠시 몸담기도 했었다.
존 로드 와 이안 페이스는 76년 PAL 이라는 밴드를 결성 활동하였고 그 후 차례로 데이빗 커버데일의 화이트스네이크 에 가담한다. 존 로드는 이와 별도로 'Sarabande' 등 여러장의 솔로음반을 발표하며 클래식과 재즈 팝을 접목한 음악을 선보인다.[34]
글렌 휴즈는 약물 중독을 이겨내고 80년대 초반 재기에 성공하면서 기타리스트 팻쓰롤과 함께 Hughes;Thrall 프로젝트, 페노메나 프로젝트, 그 리고 블랙 사바스 에도 몸을 담았으며, 현재까지 솔로로서 맹활약을 한다. 2009년 부터는 한참 후배 들인 제이슨 본햄 데렉 쉬레니언 조 보나마사 와 블랙 컨트리 커뮤니온 이라는 밴드 활동도 병행하고 있고, 특히 2017년 시작된 그의 Classic Deep Purple tour 에서 74년,75년 그의 딥퍼플 시기에 비해 전혀 줄어들지 않은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Voice of Rock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딥퍼플 멤버 중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70살에 가까운 지금까지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수 있다.
로저 글로버는 딥퍼플 탈퇴 후 74년 본인이 작사, 작곡,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등을 담당하고 또한 자신의 후임인 글렌휴즈 데이빗 커버데일, 그리고 로니 제임스 디오, 에디 잡슨, 존 로튼 등등 유명 뮤지션을 대거 참여시켜 The butterfly ball and the Grasshoppers' Feast 라는 락 오페라 스타일의 컨셉 앨범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앨범에 참여한 게스트 들에 존 로드와 이언 길런 까지 참가해서 1회의 공연을 하며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과시하고, 현재까지 6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프로듀서로서의 활약도 대단하여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주다스 프리스트, 나자레스, 로리 갤러거, 데이빗 커버데일, 마이클 쉥커의 데뷔앨범을 프로듀싱 하였고, 79년 레인보우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가 베이스 주자로 아예 눌러 앉아서, 그대로 딥퍼플 재결성 까지 참여한다.
딥 퍼플과 그 파생밴드(레인보우, 화이트스네이크, 길런)에는 야닉 거스, 그래험 보넷, 스티브 바이, 존 사이크스, 닐 머레이, 타미 알드리지, 돈 에어리, 코지 파웰, 로니 제임스 디오, 등등 헤비록계의 주요한 인물들은 거의 다 거쳐갔다. 더군다나 딥 퍼플 멤버들이 다른 밴드에 참여해준 것도 생각하면 80년대 자주 등장하던 용어인 소위 ""딥 퍼플 패밀리"" 를 중심으로만 70-80년대의 하드락 - 헤비메탈 역사의 대부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흔히 딥 퍼플의 역사는 헤비메탈의 역사라고 하며, 딥 퍼플을 알면 헤비메탈 세계의 절반 이상은 아는거나 다름없다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3.6. 재결성


1984년 해체 8년만에, 최 전성기 2기 멤버대로 결성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Perfect Strangers" 등의 히트곡을 낸다.
하지만 사실 이때부터 지금까지의 활동은 딥 퍼플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35] 이것이 결코 재결합 이후가 수준이하의 활동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68년부터 76년 전설의 딥 퍼플의 활약이 워낙에 대단했기에 그에 비하면 84년 재결성 이후의 음반들은 정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는게 티가 나는 슬로우 템포의 블루스록 같은 이미지 였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상업적으로는 여전히 대박을 치는 슈퍼밴드였다.
올드록 팬들이 전세계에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에 음반 판매량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특히 현재도 라이브 콘서트는는 전세계 어느 곳에서 해도 매진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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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84년 첫 재결성 음반 "Perfect Strangers" 가 나오고 곧 월드 투어에 들어간다. 전성기 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쌩쌩한 이안 길런의 보컬이 돋보이는 동명 타이틀곡인 Perfect Stranger 는 80년대 슬로우 록의 대표곡이라 할수 있을 정도로 중후한 명곡이다.
문제는 이 앨범의 대부분 수록곡이 미드템포의 곡들이고, 딥퍼플 음악의 핵심인 존로드의 공격적인 해몬드 오르간도 한두곡을 제외하곤 뒷배경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87년 "House of Blue light" 을 내고, 활동을 계속 이어나간다. 이때부터 사운드의 정체성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재결성 첫 앨범에서 그나마 딥 퍼플 2기 사운드를 약간이나마 회상 할 수 있었지만, 두번재 앨범 이후 부터는 노골적으로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를 연상케 하는 사운드가 더 짙어졌다. 그것도 디오나 보넷 재적시가 아닌 맥빠진 후기 레인보우 사운드에 가까워 져가고 있었다.
심하게 얘기하면 레인보우 사운드에 이언길런의 보컬이 입혀진 언발란스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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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인 황금의 제 2기 딥 퍼플 왼쪽부터 이안 길런, 존 로드, 이안 페이스, 로저 글로버, 리치 블랙모어
결국 얼마 안가 89년에 리치 블랙모어와 이안 길런은 대판 싸우고,[36] 이번에도 원년멤버 리치 블랙모어의 한판승으로 이안 길런은 또 다시 탈퇴한다.[37]
팀내 숙적을 제거한 리치 블랙모어는 아예 리드 보컬 자리에 후기 레인보우 출신의 조 린 터너[38] [39] 를 가입시킨다. 레인보우 시절부터 자신의 말에 절대 복종이었던 심복을 리드보컬을 시켰지만, 로저 글로버까지 치면 레인보우 출신 세사람이 참여한 이 앨범은 이게 대체 레인보우냐, 딥 퍼플이냐는 비아냥만 들으며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크게 실패한다.
결국 조 린 터너는 앨범 실패의 책임을 지고 리치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에 의해 쫒겨난다.[40] 이제는 이안 길런이 아니면 도저히 안되겠다는 존 로드와 이에 동조하는 이안 페이스와 로저 글로버의 입김에 하는 수 없이 리치 블랙모어도 한수 접고, 결국 1992년에 이안 길런이 다시 가입한다.
여담이지만 리치 블랙모어는 2004년 번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조 린 터너는 매우 강한 보컬이었지만, 딥 퍼플에서 그 목소리를 잃었고, 자신은 모든 사람들이 그 변화를 인식했다고 생각했지만, 조 린 터너를 해고할 생각은 없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안 길런의 재영입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안 길런이 돌아오길 바랬지만,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에이전트와 프로모터는 조 린 터너가 아니라 이안 길런이 딥 퍼플과 함께하길 바랬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울러 리치 블랙모어는 1984년의 딥 퍼플의 재결합에 대해 "돈 때문에 다시 모인 것이었다." 라는 회의적인 말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다. 리치의 말로 미루어 볼때 앞의 각주에도 언급된 멤버 개인 당 폴리돌 레코드에서 200만 달러씩을 받고 재결합에 응했다는 루머가 거의 사실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반면 다른 멤버들은 돈 때문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안 페이스는 그저 돈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닌, 여전히 우리가 같이 연주할 수 있고 그것이 즐거운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인터뷰 한 바 있다.
아무튼 다시 한번 뭉친 황금의 2기 라인업으로 앨범 "The Battle Rages On... "을 발표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리치 블랙모어가 다시 나가고[41], 나머지 멤버들은 조 새트리아니를 급하게 영입하여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42] [43] [44]
대신 퓨전 재즈락 밴드인 딕시 드렉스 출신의 스티브 모스[45]가 기타를 맡았다.[46]스티브 모스도 워낙에 대단한 기타리스트라 밴드의 결정은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96년 발표된 앨범 "Purpendicular"의 "Sometimes I feel like Screaming"의 기타 솔로를 들어보면 알수있다. 물론 리치와 모스의 연주 성향은 확연한 차이를 보여서 호불호가 갈린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모스가 리치보다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로서 연주한 기간'''이 더 길어져버렸다! 하지만 딥 퍼플의 명성을 보여주는 대표곡들은 죄다 리치가 있었을 때 나온 곡들이기 때문에 딥 퍼플 기타리스트=리치 블랙모어라는 꼬리표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리치 블랙모어 다큐멘터리에서 스티브 모스는 리치블랙모어 재직 시절의 곡들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리치의 곡들은 왼손의 화려함보다 오른손 피킹과 스트로킹의 박자감과 그루브가 생각보다 타이밍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했다. 그 때문에 Smoke On the Water, Highway Star 등 리치 블랙모어의 연주 스타일이 아닌 본인의 재해석을 한 버전으로 연주하기 하기로 했다고 한다.
스티브 모스가 들어온 후론 딥 퍼플의 곡들이 사이키델릭쪽 혹은 프로그레시브적인 면이 강해졌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딥 퍼플의 헤비메탈 감성은 리치 블랙모어의 감성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멤버들의 고령화 및 음악적 성향 변화+ 서로 유연한 음악적 견해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예전 같은 전통 헤비메탈은 아니지만 딥 퍼플만의 독창성을 새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이안 길런은, 2009년에 했었던 인터뷰에서 리치가 탈퇴하기 직전 자신이 밴드를 계속 하는 댓가로 자신의 은행 계좌에 25만 달러를 입금하라는 요구를 했었다고 주장했지만, 리치의 변호사는 개소리라며 이안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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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안 페이스, 스티브 모스, 이안 길런, 존 로드, 로저 글로버
2002년 존 로드가 자신의 해먼드 오르간을 밴드에 넘겨주고 솔로로 탈퇴하고[47] 대신 여러모로 존 로드의 후계자라고 할만한 레인보우, MSG 등 여러 밴드를 거친 돈 에어리가 들어와서[48] 현재 밴드구성은 스티브 모스, 이안 길런, 이안 페이스, 돈 에어리, 로저 글로버 체제로 가고 있다. 1기때 모였던 오리지널 멤버들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재결합 당시 조건이었던 2기 멤버들은 이언 길런, 로저 글로버 그리고 이안 페이스가 남아있다. 2017년 앨범 "Infinite"이 가장 최근에 나온 앨범으로, 이 앨범은 딥 퍼플의 '''20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다.
존 로드의 건강 문제 때문에 멤버가 교체된 것을 제외하면 그동안 멤버 교체가 없었다. 현재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인 스티브 모스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격도 좋고 음악적 견해가 상당히 유연하다. 이 때문에 자신과 나이차이가 10살 넘게나는 선배들과 활동을 잘하는 듯. 만약 리치 블랙모어가 이안 길런과 불화가 없었다면 끝까지 MK2 멤버들을 유지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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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인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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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현 딥 퍼플 멤버들., 왼쪽부터 이안 페이스(드럼), 로저 글로버 (베이스), 이안 길런(보컬), 스티브 모스 (기타), 돈 에어리 (키보드)

3.7.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2015년에서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하드 록→헤비메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인데도 동시대의 라이벌 격인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와 달리 23년동안 물먹다 이제서야 헌액이돼서 제임스 헷필드.슬래쉬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이를 비판했다.
라이벌 밴드격인 레드 제플린은 68년 결성 때 부터 80년까지 멤버교체 없이 지속되었고, 퀸 역시 70년 결성때부터 프레디가 사망한 91년까지 멤버교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블랙 사바스 [49] 또한 70년부터 78년까지는 오리지널 멤버로 버텨냈기 때문에 사운드의 변화도 크지 않았고, 오리지널 멤버 그대로 수상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딥 퍼플은 68년부터 76년까지 1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세번의 멤버교체를 겪으면서 각 기수마다 다른 밴드로 인식 될만큼 사운드의 차이를 보였고, 밴드의 황금기라 불리우는 2,3 기 시절은 비교적 짧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수상자는 존 로드, 리치 블랙모어, 이안 페이스, 로드 에반스, 이안 길런, 로저 글로버, 데이빗 커버데일 그리고 글렌 휴즈 이다. 즉 밴드 멤버 전원이 아닌 2기 와 3기 딥 퍼플의 멤버들 과 1기의 보컬인 로드 에반스에게만 수상 한다고 한것이다. 타계한 타미 볼린, 1기 베이스 닉 심퍼, 재결성 이후 아주 잠시만 활동했던 조 린 터너 그리고 현재의 멤버인 돈 에어리와 스티브 모스는 제외되었다.
딥 퍼플의 팬들은 리치 블랙모어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 행사에 공연하길 기대하였지만, 결국 불발 되고 말았는데, 딥 퍼플의 매니저인 브루스 페인이 밴드를 대신하여 리치의 행사 자체의 참가를 거부하였고, 그러므로 리치는 행사에 참가할 수 없다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측에서 리치에게 통보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논란이 생기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회장이자 CEO인 조엘 페레스맨이 "브루스 페인에겐 헌액자를 불참 시킬 권한이 없으며, 리치 블랙모어와 딥 퍼플이 몇십년 만에 함께 공연을 하는 역사적인 무대를 볼 수도 있다." 라고 밝혔지만,
이안 길런은 인터뷰에서 리치에게 불참을 종용했다는 이야기는 제외한채 현 라인업의 밴드만이 기념공연을 할 것이고 과거의 멤버들이 시상식에서 공연을 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멤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 에게도 이 같은 이야기를 통보하였다고 말을 하였다. 즉 리치 블랙모어의 참석은 자유지만 공연은 예의상 현재의 멤버와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딥 퍼플의 팬덤은 또 다시 헬게이트가 열렸으며, 이안 길런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과거의 멤버들에게 시상식에서 공연을 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멤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는 이안 길런의 의견도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리치 블랙모어가 오늘 날의 딥 퍼플을 만든 1등 공신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현재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는 스티브 모스라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리치가 참여한다고 해도, 존 로드는 2012년에 이미 타계했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딥 퍼플 라인업을 보는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팬덤의 반응과는 별개로 리치 블랙모어는 독일 매체와의 인터뷰 도중 이번 명예의 전당 불참으로 상처를 받았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애당초 리치는 재결합 때 탈퇴한 후로 딥 퍼플이라는 밴드에 더 이상의 미련을 가지고 있지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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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 모인 2,3기 황금기 멤버들. 좌로부터 데이빗 커버데일, 글렌 휴즈, 로저 글로버, 이안 길런, 이안 페이스. 이렇게 모이는건 정말 드물다.
결국 201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행사에서 딥 퍼플은 현재의 멤버로 2곡의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음악계를 떠난 로드 에반스와 타계한 존 로드, 그리고 리치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50]
메탈리카의 드러머인 라스 울리히의 소개로 멤버들이 차례로 호명되었고,[51] 수상은 이 5명과 존 로드의 아내 비키 로드[52] 가 같이 했다.
이어진 수상소감에서 앙숙으로 알려졌던 리치 블랙모어와 초대받지 못한 원년멤버 닉 심퍼 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안 길런 의 모습, 그리고 데이빗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의 리치 블랙모어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53] 그리고 전 멤버가 이미 타계한 존 로드와 타미 볼린에 대한 멤버들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장면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4. 근황


내한공연도 몇번 가진일이 있다. 1995년 첫 내한 공연을 가졌고[54] 이 공연은 TV로도 방송된다. 그 후 03년 앨범 "Bananas"의 월드 투어, 1999년 인천 송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55][56] 등으로 팬(빠)들의 마음에 다시금 불을 댕기고 돌아갔다.
이때 송도에서 열린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서는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57] 공연을 하고 돌아갔는데 후일담에 의하면 "비가 오니 감전사고가 우려된다"고 스태프들이 공연을 말리는데 불구하고 "청중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스태프들을 뿌리치고 저 유명한 'Smoke on the Water' 등의 명곡을 공연했다. 오오 딥 퍼플 오오...[58][59]
2014년도에는 존 로드 추모 공연이 열려서 존 로드 솔로활동 때 같이 일했던 뮤지션들과 글렌 휴즈와 아이언 메이든브루스 디킨슨과 같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밴드 창립 및 황금기를 같이 보냈던 리치 블랙모어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훗날 라이브에서 그를 추모하며 MK 2, MK 3 시절 곡들과 'Carry On...Jon'[60] 등을 연주한다.
2017년 5월 부터 'The Long Goodbye Tour' 라는 뭔가 의미 심장한 제목의 전세계 투어를 돌고 있는데, 이안 길런의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이안 페이스도 건강에 문제가 생긴 상태고[61], 투어의 일정이 발표될 당시 이안 페이스와 이안 길런은 이 투어가 딥 퍼플의 마지막 투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하였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는지 멤버들 모두 새 앨범 녹음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21번째 앨범 제목은 'Whoosh!'로, 2020년 6월 12일 발매되었다. 또한 2020년 3월 20일 해당 앨범에서의 첫 번째 싱글컷 곡인 'Throw My Bones'를 발매했다.

5. 멤버


멤버의 탈퇴와 복귀가 빈번한 편이다. 아래는 위키피디아 출처의 멤버 연혁을 정리해놓은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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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멤버.
  • 이안 페이스 (Ian Paice 드럼, 퍼커션) (1968~1976, 1984~현재)
  • 이안 길런 (Ian Gillan 보컬, 하모니카, 퍼커션) (1969~1973, 1984~1989, 1992~현재)
  • 로저 글로버 (Roger Glover 베이스) (1969~1973, 1984~현재)
  • 스티브 모스 (Steve Morse 기타) (1994~현재)
  • 돈 에어리 (Don Airey 오르간, 키보드) (2002~현재)

5.1. 舊 멤버


  • 존 로드[62] (Jon Lord 오르간, 키보드, 백보컬) (1968 ~1976, 1984~2002)
  • 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 기타) (1968~1975, 1984~1993)
  • 로드 에반스 (Rod Evans 보컬) (1968~1969)
  • 닉 심퍼 (Nick Simper 베이스, 백보컬) (1968~1969)
  • 데이빗 커버데일 (David Coverdale 보컬) (1973~1976)
  • 글렌 휴즈 (Glenn Hughes 베이스, 보컬) (1973~1976)
  • 타미 볼린[63] (Tommy Bolin 기타, 보컬) (1975~1976)
  • 조 린 터너 (Joe Lynn Turner 보컬) (1989~1992)
  • 조 새트리아니 (Joe Satriani 기타) (1993~1994)

6. 음반 목록


  • Shades of Deep Purple (1968)
  • The Book of Taliesyn (1968)
  • Deep Purple (1969)
  • Deep Purple in Rock[64] (1970)
  • Fireball (1971)
  • Machine Head (1972)
  • Who Do We Think We Are (1973)
  • Burn (1974)
  • Stormbringer (1974)
  • Come Taste the Band (1975)
  • Perfect Strangers (1984)
  • The House of Blue Light (1987)
  • Slaves and Masters (1990)
  • The Battle Rages On... (1993)
  • Purpendicular (1996)
  • Abandon (1998)
  • Bananas (2003)
  • Rapture of the Deep (2005)
  • Now What? (2013)
  • Infinite (2017)
  • Whoosh! (2020)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받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대부분 라이벌이 그렇지만 음악을 잘 들어보면 두 밴드의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다.[3] 우리나라에서는 클로버스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Love Potion No.9로 유명하다.[4] 리치의 전임 기타리스트가 바로 지미 페이지다. 지미 페이지가 닐 크리스천 밴드에서 나오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제프 벡을 추천했지만, 닐 크리스천은 리치를 선택했다.[5] 아닌 게 아니라 서처스는 비틀즈와 같은 리버풀 출신의, 음악적 성격도 거의 비슷한 밴드였고(이른바 '머시 비트') 위에서 말한 Love Potion No.9도 비틀즈가 부르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6] 의 최연장자인 존 로드 보다도 한살이 더 많은 1940년생으로, 후에 Bobbie Clarke 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한 영국 록음악사의 명드러머[7] 이 얘기가 와전 돼서 크리스 커티스가 담배 를 사러 간사이에 이안 페이스를 가입시켰다고 알려졌으나, 같은 드러머 출신이기에 잘못 전해진 얘기이다. 크리스 커티스는 위에 서술한대로 초반에 제명되었다.[8] 여담이지만 당시 존 로드는 밴드의 이름으로 '오르페우스(Orpheus)'를, 리치가 '딥 퍼플'을, 그리고 이안 페이스가 '더 힐(The Hill)'을 내놓았지만, 결국 리치가 내놓은 딥 퍼플을 채택했다.[9] 이 때 딥 퍼플이 리메이크한 곡들 중에는 비틀즈의 곡 Help!도 있다.[10] 나중에 쿨라 쉐이커도 리메이크한다[11] 위에 언급한 캡틴 비욘드라는 밴드의 재결성때 로드 에반스도 음악활동에 참여할 의사가 있었으나 2012년 캡틴 비욘드 리더의 사망으로 더이상의 로드 에반스의 음악적인 활동은 볼 수 없다. [12] 사실은 고음이 탁월했기 때문에 지저스 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언 길런이 초대 지저스 역을 하면서 고음을 내지른 결과 지저스 역은 고음으로 정의되어 버렸다.[13] 에피소드 식스 라는 밴드에서 이안 길런과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14] 딥 퍼플 멤버들은 단순히 독학이나 애매하게 실력을 가졋던 여타 밴드와 달리, 제대로 된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인물이거나 당시 다양한 녹음실에서 세션 녹음 및 공연 경험으로 이미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다. 이런 슈퍼 세션만 모았으니 어마무시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15] 하지만 리치 블랙모어는 후기 레인보우 시절인 70년대 말부터는 적극적으로 클래식과 록의 조합을 시도한다.[16] 약 10분에 달하는 대곡으로 이안길런의 절규에 가까운 샤우팅과 리치블랙모어의 휘몰아치는 기타솔로 그리고 존로드의 오르간이 압도적이다. 냉전을 묘사하는 가사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된 역사가 있다. 리치 블랙모어가 이 노래에 대해 말하기를, 이 노래는 보컬이 소화하기가 매우 힘든 노래였기에, 이안 길런은 이 곡의 라이브를 굉장히 꺼렸고, 공연에서 이 곡을 스킵할 것을 종종 요구했었다고 한다. 그럴 때 마다 리치는 "이안, 모두가 이 노래를 듣고 싶어해." 라며 이안의 요구를 무시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이안은 리치를 더욱 싫어했으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의 딥 퍼플의 공연에서 Child In Time 은 거의 포함 되지 않는다.[17] 앨범 명이 메이드 인 재팬 인 이유는 70년대 초반 당시 80년대의 한국, 지금의 중국처럼 온 세계가 인건비가 저렴한 일본산 제품이 판을 치던 시기여서 그걸 풍자한 작명 센스라 한다. 이걸 주워듣고 빈정이 상한 일본에서는 앨범명을 Live in Japan 으로 바꾸고 자켓 사진도 바꾸고 다른 디자인으로 판매를 한다. 이 앨범은 90년대 후반 역시 Live in Japan 이란 이름으로 당시 오사카와 도쿄에서의 3일 간의 공연을 담은 3장짜리 디럭스 CD 버젼으로도 나온다.[18] 이 당시에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로 이름을 올렸다.[19] 첫 곡 Highway star 에서는 몇몇군데 삑사리가 들리기도 한다.[20] 그도 그럴 것이, 레드 제플린은 락이면서도 블루스재즈 바탕인데, 그 장르가 즉흥 연주를 중시하기 때문이 합주를 하는 것 보다 즉흥적으로 모이는 잼 형식 공연을 중시하니, 노래가 매번 달라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 반면, 딥 퍼플의 존과 리치는 이와 정반대로, 정교하고 엄격한 연주를 중시하는 클래식을 한 사람이다. [21] 특히 이안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의 앙숙관계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서, 딥 퍼플 재결성시 리치 블랙모어가 들어오면 이안이 '쟤하곤 같이 밴드 못한다'고 나가고 이안이 돌어오면 리치가 나간다.[22] 22살 밖에 안된 새파란 젊은애가 넘사벽급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을만큼의 실력을 지닌 것이었다. 특히 리치 블랙모어는 글렌 휴즈의 펑키한 리듬감을 높게 평가했다. 로저 글로버가 안정적인 리듬을 탄다면, 글렌 휴즈는 공격적인 리듬이라는 것.[23] 데이빗 커버데일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냥 글렌에게 리드 보컬까지 맡길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트래피즈 시절에는 베이스 와 보컬 외에도 피아노, 트롬본을 연주하기도 했다. [24] 완벽한 두성 발성으로 4옥타브대의 음역까지 쉽게 소화했으며, 현재에도 애드리브로 3옥타브 시 정도는 그냥 찍어주는 고음 마스터. 하드 록 뿐만 아니라 소울도 맛깔나게 소화한다. 다만 커버데일에 비해 중저음이 많이 부족하고 중저음에서 음정이 늘 #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줬던 셈.[25] 데이빗 커버데일은 80년대 말 90년대초 자신의 밴드 화이트스네이크 로 딥 퍼플 보다 더 상업적으로 성공한다.[26] 해당 문서에도 언급했듯 엘프의 앨범은 로저 글로버와 이안 페이스가 프로듀서를 맡았었다.[27] 디오 시절의 블랙 사바스에 대한 향수 또한 오지 시절의 블랙 사바스에 못 지 않았듯이[28] 키스 에머슨이 동의를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도 2016년 3월 타계 한다[29] 사실 글렌 휴즈 또한 리치 없는 딥 퍼플을 상상할수 없어, 트래피즈를 재결성할 생각을 하나 데이빗의 강력한 주장에 넘어간다.[30] 이와는 별개로 이 둘의 사이는 아주 좋아서 현재까지도 서로의 공연에 깜짝 게스트로 나서는 일이 종종 있다. 그리고 토미 볼린에 대한 그리움도 자주 표현한다.[31] 당시의 라이브 앨범 특히 Last concert in Japan 을 들어보면 특히 글렌 휴즈의 연주 그리고 보컬에서 약을 하지 않고는 나올수 없는 사운드들이 표출된다. [32] 존 로드는 2년 후 데이빗 커버데일이 결성한 밴드 화이트스네이크에 참여한다.[33] 1987 앨범에 재녹음된 Here I go again 은 1987년 10월 10일 단 하루지만 빌보드 핫 100 차트의 1위에 올랐다.[34] 존 로드의 팬들은 존 로드의 음악 업적을 딥 퍼플 때보단 이 솔로 시기 때를 더 높이 평가한다. 솔로 활동 때는 여러 권위있는 클래식 연주자들과도 많은 교류도 있었기 때문에 클래식과 메탈계 양쪽에서 환대 받곤 했다.[35] 자발적인 재결합이 아닌, 폴리돌 레코드에서 한 사람당 200만 달러를 받고 재결합에 응했다는 루머도 있다[36]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계속해서 사이가 나빴던건 아닌듯 하다. 1984년 라이브를 보면 서로 웃으면서 아이컨택도 하고, 하이웨이 스타의 기타솔로에서는 이언 길런이 리치와 마주보며 기타솔로를 따라하기도 한다. 그냥 공연무대니까 친한 척한 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리치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신빙성은 없다.[37] Perfect Strangers 뮤직 비디오에서 이 둘의 앙금이 안 풀렸단 걸 알 수 있다. 다들 테이블에 모인 상태에서 리치 블랙모어가 제일 마지막에 도착해서 옛 동료들과 악수를 하는데 다른 멤버들은 다 같이 일어나서 악수를 했지만 이안 길런만 앉은채로 악수하는 손을 내밀었다 뺐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38] 후에 라이징 포스에 가입한 적도 있다[39] 원래는 Eye of the Tiger 로 유명한 밴드인 서바이버의 보컬리스트 지미 제이미슨이 유력했다.[40] 조 린 터너는 리허설이나 회의 때면 엄청 불편했다고 한다. 심지어 존 로드는 인사만 하고 자신과 아무 말을 안하려고 하는 등 늘 가시방석이었다고 한다.[41] 리치의 딥 퍼플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1993년 11월 17일 핀란드 헬싱키 공연이다.[42] 딥 퍼플 멤버들과 새트리아니는 이심전심으로 정식 멤버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매니지먼트 관계로 이루어지진 않았다.[43] 리치는 인터뷰에서 이안을 다시 불러올 때 데모 테잎을 보내서 보컬 부분만 녹음해서 다시 받아와 듣는데, 과거 딥 퍼플 때와 달리 목소리의 변화가 너무 심했고, 예전 같지 않앗기 때문에 '이건 망했다... 같이 못한다...'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설사가상 리치는 이안과 같이 무대에 선다면 예전처럼 무대 프론트에 나서지도 않을꺼고 BMG마냥 무대 구석에나 있을꺼라고 했는데, 에이전시 쪽에선 이안 길런과 같이 하기만한다면 문제없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최강의 패라고 생각했던 리치였지만 자신의 요구를 다 들어줄지몰랐던 에이전시 때문에 일단 계속 일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내내 자신의 곡과 맞지 않는 이안의 목소리 때문에 내내 짜증이 났다고 한다.[44] 이들의 갈등은 스파게티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리치가 딥 퍼플을 다시 탈퇴하는 길로 이어진다. 직원 중 한명이 점심 때 리치가 먹을 스파게티를 가져왔는데,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가 아닌 치즈와 허브로 된 스파게티였는데 리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안이 케첩으로 도배를 해버렸다. 리치가 돌아오자 이안더러 "너가 이랬냐?"라고 물어보자 존 로드와 다른 멤버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 것을 느껴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고, 리치는 스파게티를 이안의 얼굴에 던저버렸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는 앨범명 처럼 싸움의 분노가 되어버렸다.[45] 딕시 드렉스에서 활동한 이후에 캔자스에 있다가 합류했다.[46] 스티브 모스가 딥 퍼플에 합류하고 처음으로 라이브를 한게 1995년 서울 공연인데, 이 공연은 '''딥퍼플 첫 내한공연이었다.''' 여담으로 마지막에 존 로드의 아리랑 연주는 한국 팬들에게 최고의 팬서비스로 꼽힌다.[47] 41년생인 존 로드는 이 때 벌써 60이 넘은 나이였기에 더 이상 정력적인 순회공연을 할 체력이 없었다.[48] 돈 에어리는 리치 블랙모어와 좋은 인연이 있었는지 딥 퍼플 가입 후에도 리치 블랙 모어의 포크 밴드인 블랙모어스 나이트에 게스트로 나와서 공연도 하였다[49] 오지 오스본의 탈퇴 후 디오의 대 활약 또한 블랙 사바스의 위상에 크게 기여했다.[50] 유감스럽게도 원년 멤버인 닉 심퍼 는 이 행사에 초대 받지 못했다.[51] 라스 울리히가 드럼을 배운 계기가 어릴 적 아버지와 같이 딥 퍼플 공연을 본 직후이기 때문이다. 어릴적 자신의 우상들의 헌액장에서 이들을 맞이한다는 것은 라스 입장에서도 엄청난 영예다.[52] 이안 페이스의 아내와 자매간이다.[53] 데이빗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가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건 리치가 많이 가르쳐줬었기 때문이라고 인터뷰에서 많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54] 기타리스트 스티브 모스의 딥퍼플 첫 데뷔공연이었다. 한국 팬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존 로드가 연주한 아리랑 떼창은 이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55] 이 송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펜타포트가 아니다!)은 국내 최초의 록 페스티벌로, 3일 동안 Dream Theater, Deep Purple 등 초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대단히 충격적인 라인업으로 락 매니아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공연 3일 내내 폭우가 쏟아져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비로 취소된 공연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관객과 기획사는 멘붕. 파산. 이 후유증으로 3년 넘게 이런 록 페스티벌이 국내에서 열리지 못했다.[56] 그때 당시의 영상이 있는데, KBS 일요스페셜(현 KBS스페셜)에서 태풍 루사에 대한 영상 초중반에 엠넷 녹화영상을 제공받아 보여주었다. #[57] 이날 공연은 SBS에서 녹화 방송했다. 화면을 보면 당시 무대 지붕이 있음에도 강한 바람으로 인해 비가 옆 기동 사이 수평으로 들이쳐 드러머 이안 페이스가 심벌을 치면 맥콜CF처럼 물이 튀고, 기타리스트였던 스티브 모스는 아예 오른쪽 팔과 기타 사이에 걸레를 끼고서 솔로 중간 중간 찰라마다 번개처럼 걸레로 기타의 물기를 닦아내는 신공을 보이기도...[58] 실제 밤11시 넘어 공연이 끝나고 밴드가 내려간 후 열화와 같은 앵콜이 이어지자 행사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와 "앵콜 없어요 이제 그만 귀가하세요..." 하는데 관객의 애끓는 염원을 알아챈 이안 길런이 무대로 도로 뛰어 올라와서 "What the Fu**!" 하며 관계자를 내쫓고 앵콜로 2곡을 더 연주하여 캐감동케 했다[59] 한국 공연이 뜻깊은 이유는 전성기 시절인 70~80년대는 군사정권과 금지곡 양산으로 외국 밴드가 한국에 오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딥 퍼플의 곡들은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공연은 많지만 옆나라 한국은 못온 이유도 크다.[60]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2013년 앨범 'Dancer and the Moon' 의 마지막 트랙으로 존 로드를 기리는 연주곡이다.[61] 2016년 6월 경미한 뇌졸증을 겪었다.[62] 2012년 췌장암으로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63] 1976년 약물중독으로 별세[64] 그냥 'In Rock'으로도 부름